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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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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4. 15. 16:39 교회진리/예배

주의 만찬

A. G. 클라아크

주의만찬의 거행

단순성-우리는 성경의 본을 따라 주의만찬을 단순하게 거행해야 합니다. 기독교계에서 볼 수 있는 이탈, 심각한 오류들, 형식적인 습관들은 모두 원래의 의미를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또 이 의식을 엉성하게 준수하는 것도 역시 그 참된 의미를 망가뜨립니다(고전 11:20), 처음에는 이 의식이 식사교제와 연관되어 지켜졌는데 이 식사교제는 나중에 애찬(헬라원어로는 agape)으로 불려졌습니다( 12, 벧후 2:13, 고전 11:21~22). 사도행전 2:46의 모습은 아마도 성도들의 많은 숫자에 기인하는, 적절한 조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배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나머지 유대인들과 함께 성전에서 모였으며, 이것은 초기의 사회 질서가 가정생활의 붕괴를 수반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주의만찬의 악용과 그 밖의 다른 이유들로 인해 결국 이 의식은 보통의 식사나 교제적인 식사로부터 분리되기에 이르렀습니다(고전 11:34).

날짜와 시간-주의만찬의 날짜와 시간에 대한 명령은 종종, 자주(as often, 고전 11:25~26. 우리말 성경에는 ····할 때마다로 나와 있음-역주)이지 아주 드물게 또는 너희가 원할 때마다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의만찬을 빈번히 거행해야 함을 의미하며(유대인의 유월절처럼) 일 년에 한번이라든지 혹은 일 년에 세 번, 혹은 매달 한 번 거행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0:7은 규칙적인 거행을 시사하고 있으며, 제자들은 매주 첫째 날에 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함께 모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지난 월요일에 이미 드로아에 도착해 있었지만 그의 여행이 긴박했음에도 불구하고(16) 특별한 집회를 소집하지 아니하고 다음 주일(主日)을 기다렸다가 그 후에 더 이상의 시간 손실이 없이 그곳을 떠났습니다(11,13). 의미심장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신 날이 다름아닌 그분의 부활의 날과 새 피조물을 상징하는, 그 다음 주 첫째 날이었다는 사실입니다(반면에 유대인의 안식일은 옛 창조 순서를 회고합니다). 헬라어 신약성경에 오직 두 번 나오는 kuriakos 라는 단어는 주님의 만찬과 주일(主日)을 서로 연결시켜 주고 있습니다(고전 11:20, 1:10). 그리고 고린도전서 16:1~2절도 이상의 사실을 간접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리고 만찬이라는 단어가 주의만찬의 거행시간을 결정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활동 중에서 예배를 드리고 떡을 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것이 합당한 일일 것입니다.

떡과 잔-주의만찬용 떡과 잔의 성분에 관한 논란은 피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주님께서 주의만찬을 제정하신 것은 유월절 식사 때이긴 했지만 우리는 이 둘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한 덩이의 떡과 한 잔의 포도주를 단순한 재료로 취하여 제자들에게 넘겨주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주님의 대속적인 죽음에 대한 상징물로서, 포도주가 강조되어 있지 아니하고 언제나 () 덩어리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떡의 성분이나 잔의 내용물에 관하여 아무런 교훈도 제시되어 있지 않으며, 이것이 현명한 배려라는 사실은 밀가루떡과 포도즙을 구할 수 없는 지역에서 실감됩니다. 그러나 얇게 썬 떡 조각(cut wafer)과 개인용(작은) (individual cup)을 사용하는 현대적 관습은 주의만찬이 지니는 교제(communion)의 의미를 크게 상실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떡과 한 잔에 참예하는 의미를 상실한다는 뜻임. 고전 10:16~ 17 참조-역주).

떡과 잔의 분배-주의만찬 집회의 순서에 관하여 고린도전서 11, 14장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 집회를 관장하는 장(), 예를 들면 수석장로(首席長老)나 다른 어떤 공적(公的) 사람 따위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중요한 점입니다. 따라서 누가 떡과 잔의 분배를 담당하는 특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만찬의 성격을 완전히 변조시키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명백히 위배됩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심지어 사도들조차 공적인 지위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단지 다른 성도들과 자리를 같이했을 뿐입니다. 사도행전 20:11도 예외는 아닙니다.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왜냐하면 이 구절은 식사론 의미하기 때문입니다(이 구절에 나와 있는 동사들은 모두 단수형인데 이것은 개인적인 행위를 시사합니다). 이 때 누가와 다른 사람들은 아마 배를 타고 이미 떠났던 것 같습니다(13). 오직 임명 받은 목사나 특별한 사람만이 주의만찬식을 집전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관습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성직자들은 이것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준비-만일 우리가 한 주일을 지내는 동안 성령님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주의만찬 집회에서 성령님의 인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자극과 고무(鼓舞)는 어떤 초자연적인 충동에 의한 것도 아니고. 은사를 무시하고자 하는 육신적인 욕심에 의한 것도 아니며, 또 순전히 감정적인 행동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신령한 사람의, 신령한 이해와 신령한 분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고전 14:14,15,19,20). 고린도전서 11:27~32은 엄숙하고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당시의 고린도교회에서 볼 수 있었던 무절제가 오늘날에는 없을 수도 있겠지만 합당치 못한 태도와 무의미한 형식은 너무나 흔한 것 같습니다. 합당치 않은 참가자합당치 않은 태도를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나누인 교제. 불화, 산만한 생각, 방해하는 움직임 등등은 모두 주님의 임재 앞에서 합당치 않은 것들입니다. 더러워진 양심도 예배를 방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자기를 살펴서 죄가 있으면 그것을 판단하여 자백하고 깨끗케 함을 받아야 합니다(요일 1:9). 그렇지 않을 때 주님의 징계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과 거리끼는 관계에 있다면 야고보서 5:16과 마태복음 19:15, 그리고 마태복음 5:23~24에 제시된 절차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만찬을 준비하셨던 사실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3:1~10에 나타나 있는 바대로 의미심장한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

 

주의만찬에 관계된 미신

이미 지적한 대로 많은 그릇된 교리와 관습이 원래는 그처럼 단순했던 규례 주위에 운집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 -A D. 831년에 도임된 로마 카톨릭의 이 교리는 다음과 간이 가르칩니다. 떡과 포도주를 봉헌하는 그 순간, 겉으로 보기에는 떡과 포도주가 그대로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들은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그 몸으로 변한다. 이렇게 하여 기념의 측면이 우상숭배적 미사의 거행으로 변하게 되며,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성체(聖體)가 거양(擧揚)되면 성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현현(顯現)하신 것으로 여기고 그분을 경모합니다. 이 교리를 더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위해 참되고 적절한 대속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진다. ()의 눈을 몹시 끄는, 매우 아름답게 장식된 의식(儀式)이 이 미사에 수반됩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7:27, 9:14, 10:10~14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체공존설(聖體共存設, Consubstantiation) 루터교의 교리인 이 성체 공존설은 그 기원을 16세기에 있었던 종교개혁에 두고 있습니다. 이 개혁은 비록 많은 업적을 쌓았을지라도 성직자 제도에서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리에 있어서나 관습에 있어서 어떤 오류들이 아직도 그 개혁교회들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성체 공존설의 교리는 사람들이 떡과 잔에 참여하는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이 떡과 및 잔과 함께 육체로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주의만찬에 관한 그릇된 개념들

어떤 성경 말씀들이 주님의 만찬에 잘못 적용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요한복음 6:48~58은 주님의 만찬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주님의 만찬이 아직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48~58은 영생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과 관계 있습니다(54). 고린도전서 5:7~8도 주님의 만찬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리신 제사를 상징합니다. 이 유월절에 바로 이어지는 7일간의 무교절(본문에서는 이것이 누룩 없는 떡으로 표현되어 있음)은 영적인 누룩, (동기의) 괴악(怪惡) (행동의) 악독(惡毒)으로부터 지켜지는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을 상징합니다. “유월절이든지 무교절이든지 둘 중의 한 가지 명칭은 때때로 이 두 절기를 동시에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22:1, 14:12을 레 23:5~6과 비교). 교회가 없는 지역에서 떡을 떼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고린도전서 11장은 교회의 규례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곧, 일시적인 상황에서 믿는 자들, 예를 들면 배를 타고 여행하는 중에 있는 것과 같이 일시적인 상황에서 믿는 자들의 주의만찬을 기념하려는 특권까지 박탈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가 실제로 존재하기 이전부터 제자들을 위해 규례를 제정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42, 20:7에서 떡을 떼는 것은 교회에게 속한 특권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속한 특권이라는 것을 의미심장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4:30, 35과 마태복음 18:20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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