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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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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3. 29. 17:16 교회진리/예배

예배에 대한 그릇된 평가

 

앞서 우리는 상당한 지면(紙面)에 걸쳐, 예배에 대한 그릇된 개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예배에 대한 몇 가지 그릇된 평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릇된 개념은 항상 그릇된 평가를 초래합니다. 이에 대해서는(1)물질주의적인 평가,(2)종교적인 평가,(3)미성숙한 신자들의 평가의 세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물질주의적인 평가( 5: 1~17).

모세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느니라고 이르며 바로 앞에 나아갔을 때 이 불경건한 왕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적의(敵意)와 무지로부터 파생하는 물질주의의 표현 방식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하지 않았을뿐더러 그들의 짐을 늘림으로써 이스라엘의 속박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이러한 잔인한 학대에 대한 이유로 그는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자 하나니(8)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회생을 드리자 하는도다 이제 가서 일하라(17,18). 이 왕에게는 부르심에 복종하여 그들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명백한 열망이 단지 고된 노동을 피하기 위한 변명, 즉 그들의 게으름을 드러내는 시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손으로 자신을 위해 노동함으로써 그들의 시간이 훨씬 유용하게 쓰여진다고 믿었습니다.

성경에서 애굽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로부터 독립된 생활 양식을 추구하는 물질주의 세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대한 바로의 불신앙적이고 반역 적인 태도는 오늘날 세속적인 사람의 사고방식을 잘 드러내 줍니다. 세속적인 사람에게 영적인 일이나 하나님께 대한 예배 따위는 한낱 시간과 정력의 낭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어떤 이들은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까지 신랄히 비난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물질적인 것과 비교되는 정신적인 것과 관련을 가진 조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냉소주의자는 복음 전파와 예배를 위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영적인 노력을 가리켜, 남의 말을 쉽게 믿는 순진한 대중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거대한 도박 시장이라고 비꼬며, 어떤 이들은 로마인 재판관이었던 갈리오와 같이 무관심한 태도를 취합니다.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니라(18:17).

우리는 우연히 예배 모임에 참석케 된 어느 세속적인 사람이 역시 하나님을 모르는 친구들을 만나 어떤 식으로 소감을 얘기할는지 쉬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얘기할 것입니다. 글쎄, 그 건물 안에 모인 사람들은 공상가들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어! 그들은 식탁 주위에 둘러 앉아 대부분 시간을 눈을 감은 채 보냈어. 가끔씩, 어떤 사람이 일어나 기도하고, 잠시 후 또 한 사람이 찬송을 택하고, 그런 식으로 그들은 아무것도 안한 채 전 시간을 다 소비해 버렸어!

이러한 예배에 대한 그릇된 평가의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산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고전 2:14). 인간의 마음은 본질상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영적인 실재들을 원하지도 않으며, 또한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가 지닌 엄청난 중요성과 가치를 아주 하찮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2) 종교적인 평가

그러나 당신께 이것을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24:14). 이 구절은 바울이 벨릭스에게 더둘로에 의해 제기된 거짓 고소에 대한 해명으로 밝힌 내용의 일부입니다. 바울은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5)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당시, 의심할 바 없는 하나님께 대한 참 예배에 대해 내려진 유대 종교인들의 평가는 이단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편견적이고, 종교에 먼 눈에는 바울이 이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배의 구성 원리에 관한 고정된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왜곡되고, 완전히 잘못된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했으며, 이에 그들은 그를 이단으로 명명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에 대한 그릇된 인식하에 그들은 그를 핍박했고 기꺼이 그의 생명을 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사람들로부터 말미암은 것만큼 그토록 극심하고 보복적인 핍박은 없습니다. 무수히 많은 고결하고 진실되고 신령하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피로써 그들의 신앙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종교인들은 그들의 교리와 신조를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어떠한 극형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의 실체를 깨닫고 그 가운데서 행해 온 신자들이여, 비단 물질주의 세계에 의해서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종교에 충실하고 매우 열정적인 사람들에 의해서도 자신이 이단으로 불리워진다 할지라도 지나치게 놀라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그 교령(敎令)에 동의하지 않고, 그 결정 사항에 복종하지 않고, 그 체제에 소속되기를 거절하는 모든 사람을 이단·이라 지칭하는 종교 조직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초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주체가 이방 로마였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동일한 일을 행한 주체가 종교적인 로마였습니다! 영적인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종교적인 사람들의 박해는 아벨에 대한 가인의 증오와 박해 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가인은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아우에게 분명히 계시하신 방법대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거절했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거짓 신에 대한 예배가 아니라 참 하나님에 대한 거짓 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거절하신지 얼마 안되어 가인은 그의 손을 의로운 아우의 죄없는 피로 물들였습니다(4:115, 요일 3:12, 11, 11:4).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성령 안에서 그리고 성경에서 발견되는 진리를 따라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전에 속해 있던 종교 조직이나 교파와 관계를 끊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대개 이들 조직들은 그들의 조직화된 교단과 전통과 의식 및 사람의 계명들로부터 이탈하려는 어떤 시도도 관용하지 않습니다. 그들과의 관계의 단절은 그와 한때 종교적인 동료 관계를 맺었던 자들의 분노를 살 것입니다. 그들은 그를 비방하고 그를 이단으로 낙인 찍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의 선진들의 신앙의 반역자로 고소를 당하며 엄청난 모욕과 경멸과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한 희생은 치러질 가치가 충분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5:11). 이 세상의 모든 명예나 지위나 권세나 재물을 다 동원한다 해도 이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예배 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실패한 신자의 불행을 보상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미성숙한 신자들의 평가( 26:613).

마리아의 헌신에 관한 본문의 내용은 이미 살펴본바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조차도 이 아름다운 예배 행위에 대해 완전히 그릇된 평가를 내린 사실에 특별히 촛점을 맞춰 다시 한번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그들은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8)라고 촌평(寸評)했습니다. 그들은 이 값진 향유는 팔아서 그 돈이 빈민 구호품과 같은 보다 유익하고 가치있는 목적에 쓰여져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이 소중한 향유가 그리스도에게 헛되이 낭비했다고 결론지은 것입니다! 반면에 이 행위에 대한 우리 주님의 평가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그 이름이 후세에 영원토록 전해지는 존재가 되게했습니다. 그분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10, 13).

이 장면에서 우리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배의 엄청난 중요성과 무한한 가치를 깨닫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주님을 위한 봉사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예배의 막중한 중요성을 주장하는 동료 신자들의 자세를 올바로 평가하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주의 백성의 모임 내에선 마땅히 예배에 할당돼야 하는 시간과 노력을 다른 곳으로 분배해 왔습니다. 그들은, 매주마다 떡을 떼고 잔을 마심으로 주 예수님을 기억하기 위해 성경적인 단순함 속에 모이는 시간을 꾸준히 갖는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다소간 비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예배 집회에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거나, 은사있는 교사의 설교를 듣거나, 아니면 임명된 성직자의 주관 하에 묵도에서 축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순서가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미리 준비된 예배 의식에 참여하는데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답변은 첫째 우리는 성경의 모본을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자기 희생적인 예배의 진정한 가치는 구주 자신에 의해 올바르게 평가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스스로 이 소중한 진리들을 발견한 사람들은 이 진리들을 겸손하고 인자하고 은혜로운 자세로 동료 신자들에게 전해 주어야 함은 물론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본을 좇아야 합니다. 이 경건한 부부는 하나님의 말씀의 보다 충분한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아볼로를 보고는 그를 곁에 데려다가 사적으로 하나님의 도를 보다 완전하게 상세히 풀어 가르쳤습니다(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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