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08. 9. 16. 16:32 교회진리/예배

예배는 생활이다

 

14:3-9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 26:6-13 및 요 12:1-8]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는 교회에서만 가능하다" "예배는 입에서 계속적으로 나오는 화려한 말들로 되어진다" 혹은 "아름답고 따뜻한 느낌이 마음에 넘칠 때 예배가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는 꼭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예배의 전부라는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성경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간단히 종합해 볼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나"에 대해 직접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감사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며 외형적이고 기계적인 종교적 행위로부터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이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감사는 입술로 또는 삶으로 드려질 수 있습니다.

, 예배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나"에 대해 하나님께 말로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일 수 있으며 또 그러한 감사로 인해 말이 아닌 행위로 드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롱과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의 도덕기준을 낮추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 학생은 주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며, 그는 거룩의 기준이신 하나님께 그의 삶으로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들이 좋지 않은 일로 여기는 일들을 분냄이나 씁쓸해 함이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도 주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요구에 대해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로 하지 않는 예배는 불평하는 입술과 더럽혀진 삶을 살다가 주일날 아침 하나님께 드리는 입술의 기도와 찬양보다 하나님보시기에 훨씬 기쁘게 받으실만한 것입니다(이사야 1:10-17). 물론 바람직한 것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어려운 생활가운데에서도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예배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러 범주가운데 하나인 것이 아니며, 예배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전체입니다.

마태복음 14 3-9절에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모습은 우리에게 예배의 여러 면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2 1-8절 말씀을 볼 때 그 여인이 베다니의 마리아임을 알 수 있습니다(누가복음 10:39에서 주님의 무릎 앞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배우던 그 마리아이다). 우리는 마리아의 경배의 행동을 연구하면서 우리 자신의 예배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배는 희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이러한 면은 주님께 향유를 붇는 것이 마리아에게는 큰비용이 드는 일이었음을 통해 강조되고 있습니다. 순전한 나드는 모두 인도에서 수입되는 매우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삼백 데나리온(5)은 그 시대 보통 남자 일꾼의 일년치 삯에 해당되는 액수인데, 마리아의 예배에는 많은 수고와 희생이 드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예배는 나에게 어떠한 값을 치르게 하고 있습니까? 혹 그것은 전혀 희생이 없는 싸구려 향유는 아닙니까? 나의 예배는 주님을 위한 시간의 희생을 포함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위한 즐거움만으로 삼고 있습니까?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부적절하거나 엉뚱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건조하고 먼지가 많은 기후에서 손님에게 기름으로 발을 씻고 머리에 붓도록 하는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마리아가 통상 붇는 기름이 아닌 값비싼 향유로 부은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특별하였습니다. 그녀가 삼백 데나리온으로 할 수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녀는 그것을 희생하여 한 행동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모두 나타내었습니다. 일년치 봉급으로 우리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그 많은 금액을 기꺼이 주님을 위해 한번에 희생할 수 있는가? 입술로만 아니라 삶으로도 예배는 희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히브리서 13 15-16, 로마서 12:1).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는 우리로 얼마의 값을 치르도록 하고 있습니까?

예배는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희생보다 한 단계 더 앞선 것입니다. 어떤 것을 희생한다하여도 반만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예배의 방법이 아닙니다. 다시 마리아의 행동을 보면, 주님은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저녁식사를 위한 손님이었습니다(아마 그는 주님에 의해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식사 때 사람들은 낮은 식사테이블 주위로 등받이 없는 짧은 소파 위에 누워 몸을 발꿈치로 받치며 다른 손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일상의 모습이었습니다.

마리아, 그녀의 오라비 나사로와 언니 마르다 역시 손님이었습니다. 저녁식사 중에 마리아는 주님의 소파에 다가와서 옥합을 깨뜨려 열어 주님께 값비싼 향유 전부를 부었습니다. 요한복음 12 3절은 그것이 한 근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엄청난 양의 향유입니다. 대개 나드 향유는 정제되어 기름끼가 있거나 끈적거리지 않습니다. 순전한 나드는 매우 맑으며 빨리 증발되는 휘발성 액체 향유입니다. 분명 그 집은 향유의 향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12:3).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마리아가 그녀의 예배 행위를 통해서 취한 것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귀중한 향유 몇 방울로 주님을 기름부은 것이 아니며, 그녀는 그 향유 반만을 사용하고 반은 남겼던 것도 아니며,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예배입니다.

8장에서 주님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의미의 원뜻은 번역상 충분히 전달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는 큰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는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마리아가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까지 갔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몇 방울만을 또는 반만을 행했다고 말씀하셔야 하겠습니까? 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나의 미래와 얻고자하는 경력에 대한 나의 계획에 대해서는 어떠합니까? 나는 오직 나를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 취하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는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결코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몇 명의 손님들(가롯 유다와 다른 제자들-12:4, 26:8)이 예배드리는 마리아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녀의 행동을 쓸데없는 짓이라며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더욱 긴요하게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4-5). 그러한 얘기는 충분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까? 일년치 봉급은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우는데 충분히 쓰여질 수 있습니다. 보통의 기름으로도 그 일을 할 수 있었을 때에 왜 그 큰돈을 한 병의 값비싼 향유에 써버렸을까요? 마리아가 그 순간의 감정에 사로잡혔던 것이고 그녀는 보다 자제했어야만 했던 것은 아닌지요! 하지만 그러한 추론은 우리 주님에 의해 무색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옹호했을 뿐 아니라 잘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6). 그것은 낭비가 아니라 선한 행동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주위에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찬양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을 완전한 시간낭비로 여기는 것을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예배하기 위해 불쌍한 자들의 필요를 잊어버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항상 있는 불쌍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항상 노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7). 사실 주님의 이름으로 불쌍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것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관심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하지만 주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 없이 단지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예배가 아니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점에서 불균형한 경향이 있습니다. 바람직한 것은 모든 것에 대해 항상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러한 찬양이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행동으로 항상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예배의 깊이는 8절에서 더욱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저는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장사를 준비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리아는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다른 믿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제자들보다도 훨씬 더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8:31, 9:31-32). 정상적인 절차는 죽은 후에 향료와 함께 향유을 붇는 것입니다(19:40). 마리아는 주님이 곧 그들로부터 떠나갈 것이라는 것을 깨달기에, 그래서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 장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부었던 것입니다(요한복음 12 3절은 몸에 향유를 붇는 것은 그 머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래서 마리아의 행동은 만찬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붇는 일반적인 관습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 이상의 예배의 깊이가 있었습니다. 다른 손님들은 값비싼 향유의 낭비만을 보았으며, 그들은 마리아의 행동이 순간적인 감정의 흥분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주님은 그것이 마음을 잘 표현한 것이었고 예배의 의미 있는 행위였던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시고 9절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깊이의 예배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시간과 노력의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가치를 지녔으며, 마리아에 의한 기름부음은 전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부여한 일이나 직분이나 행동이 무엇이든지 그 안에서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예배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학업, 사회 생활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말과 삶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예배가 우리의 생활이 되도록 합시다.

David R. Reid

'교회진리 > 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떡 뗌을 위한 실제 교훈  (0) 2009.11.04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0) 2009.02.12
예배(禮拜)란?  (0) 2009.02.06
만찬예배  (1) 2008.12.19
주의 만찬(성만찬)  (0) 2008.04.15
예배에 대한 그릇된 평가  (0) 2008.03.29
성경에 나타난 예배들  (0) 2008.03.27
주의 만찬  (0) 2008.03.23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