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에서 가나안까지(18)
아말렉과의 싸움
죤 리치
만나를 처음 거두어들임과, 매맞은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온 생수의 첫 기갈 해소로부터 이스라엘은 이제 첫번째 대적을 만나 주의 구속함을 받은 자로서 첫 싸움을 치르는 새로운 과정을 지나고 있다. 그들은 기꺼이 가나안 본향으로 평화롭게 통과할 수 있었으며 전쟁의 소요를 원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싸움에 공격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에서의 후손으로 육신을 따라 났고 이스라엘의 가까운 친척이 되는 아말렉은 이제 강하고 전투적인 백성으로 “나라들 중 으뜸”(민
이 정당한 이유가 없는 공격이 아말렉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주의하라, 이들의 목적은 주의 백성을 근절시키고 없애버리는데 있었다. 그것은 음흉하게 이루어졌으니 우리가 읽는대로 그들은 “길에서 대적하였던” 것이다(삼상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다양하고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들 중의 하나로 현재 우리에게 그림자로서 광야의 싸움을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될 것들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먼저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보고 다음으로 모든 성도가 담당해야 될 전쟁의 형태를 본다.
이스라엘에 대한 아말렉의 적대 행위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 사이에 있는 것이며,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할 때 했던 것과 같다. 또한 에서가 야곱과 출생시부터 계속했던 싸움과도 같은 것이다. 이제 아말렉이, 새로 구속함을 받고 여호와의 택한 백성으로 분리된 나라를 대적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속박 아래 있는 동안에는 싸울 일이 없었다. 그 때에 아말렉은 자기 처소에 한가로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구속과 성별이 이루어지자, 그리고 만나를 맛보고 생수를 마시자, 곧바로 대적하여 싸우러 나타났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말렉은 구속받은 자와 순례자의 원수라는 사실이다. 또한 전쟁은 속박당했던 시절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바로로부터의 해방은 아말렉과의 전쟁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체험과 역사를 불 때 이에 대한 답은 분명하고도 교훈적이다. “모조리 핥아버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아말렉은 바로 육신의 성징이다. 르비딤에서의 이스라엘과의 싸움은 하나님의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 어두움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고 현재의 악한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성도들에게만 알려진 투쟁의 그림자인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이에 대한 것을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육신의 지배 아래 있으며 정욕을 일삼으며 그것을 따라 행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피지배자와 싸우지 않고 육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출생의 순간부터, 다시 말하면 성령의 내주함이 시작된 때부터 육신과의 투쟁이 시작된다. 거듭난 영혼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 하늘 가는 길을 따라 달려감으로 평강 가운데 만나(그리스도)를 먹고, 반석으로부터 나오는 물(성령)을 마신다. 그러나 육신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성령을 거스린다.”
이 집요한 원수의 첫 공격은 어린 성도에게 놀라움을 주곤 한다. 그 성도는 노래를 부르며 광야 여행을 방금 시작한 것이다. 그의 속박의 줄은 끓어졌고, 하늘의 떡을 먹으며 신선한 시냇물을 마시며 산다. 전날의 죄와 슬픔은 지나갔고 세상에서 그를 매혹시켰던 것들에 대한 맛은 잃었다. 그의 발을 둘러쌌던 가시덤불과 찔레들이 없었더라면 그는 거의 이 세상이 광야라는 사실까지 잊을 뻔 하였으니 그의 기쁨은 매우 크고 영혼은 매우 만족스럽게 하나님과 조용히 동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자기 원수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전투가 맹렬해졌다. 다소간 옛 습관이 나타나고 약간의 육신적인 정욕이 발동하려고 하였다. 어린 성도에게 미치는 효력은 오싹 소름이 끼치는 정도였다.
그는 이와 같은 도전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했고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님을 모신 그는 자신 속에 있는 육신이 죽었거나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구원받은 이후에 그는 매우 조용하고 반항심이 없이 살아 왔기 때문에 그것이 근절된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어떤 이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가 않았다. 매력적이면서도 배반을 쉽게 하는 교활한 그것은 매복하고 있다가 “하늘로부터 출생한 생명,” 곧 의로 지음 받은 새 사람을 공격하는 위치로 변하여 믿음의 자녀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대적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아말렉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 둘은 완전히 구별되고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하나님의 영은 성도 안에 있는 육신을 근절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추방될 수 없을지도 모르며 개선될 수도 없다. 육신은 악하고 악하며 항상 악할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육신을 신뢰치 말라”(빌
이스라엘은 여기 대적해 오는 원수를 맞아 싸울 적수가 못 된다. 아말렉은 “열국 중 으뜸”이었고 전쟁에 익숙한 자들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전쟁을 본 일도 없고”(출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지 않으셨다. 방금 태어난 어린 영아와 같은 나라로서 싸움에는 약하고 적합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구속함을 받아 성별된 자들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로부터 그들을 구원해낼 때 맨손으로 일하셨으며 이제도 그분은 그들의 백성들이 아말렉에게 삼키우는 모습을 조용히 비켜서서 보고만 계시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의 군대를 패배시킬 때에 이스라엘 편에서 역사하였던 그 동일한 능력이 이제는 아말렉을 이길 수 있도록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얻는 교훈은, 주님의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큰 가치를 지닌 것들 중의 하나이다. 마치 원수들이 갑자기 많아져서 이스라엘을 쉽게 이길 것같이 보이는 때가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것은 쉽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육신 안에 거하는 죄는 강하고 잔인한 원수이다- 그것은 오랜 경험을 갖고 있기에, 쉽게 그것을 처리 하려고 하는 어린 성도에게서 발견된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를 위해 계시며 신령한 능력이 그의 편에 있다. 한때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킬 때 행사된 능력이 이제 가장 연약한 성도 안에서 역사하신다(엡
이 승리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또한 매우 중요한 교훈들을 보여준다. 싸움터는 높고 낮은 형세를 나타내고 있다. 산꼭대기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든 것은 여호와의 능력을 상징한다. 골짜기에서 여호수아는 “아말렉의 세력” 위에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지팡이를 든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여호와의 승리가 확실하였다. 그러나 손이 내려오면 승리는 아말렉에게로 넘어갔다.
산꼭대기에 있었던 모세에게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성도의 모습을 본다. 그가 거기 있는 동안, 그의 손이 실제적인 필요로 인해 위로 올려져 있는 동안 하나님의 능력은 그를 대신하여 역사되었다. “내가 약할 때 도리어 내가 강하다”라고 하는 것은, 그의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산 위에 서 있는 성도가 경험하는 체험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 위치에 계속 거할 수 없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선 도움을 받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곧 연약한 손은 내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론(높이다)과 훌(자유롭게 태어남)이 그 옆에서 그들의 위치를 지킴으로 싸움이 여호수아의 칼에 의하여 승리로 끝날 때까지 모세의 손이 쳐들어질 수 있었다.
이것은 적어도 한 모형이 될 수 있는데, 성도들이 광야에서 싸움을 치를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교통하시는 두 옹호자 혹은 후원자의 예가 될 수 있다. 그분은 휘장 안에 계신 대제사장이시며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올리시는 분이시며(히
또 한편으로 그분은 “다른 위로자”, “변호자”, 혹은 “옹호자”(이 말은 요한일서 2장 2절의 대언자와 같다)라는 이름을 가지셨으니, 그에 관하여 “이와 같이 성령도 저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중보로) 간구하시느니라”(롬 8.26)고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시는 한 중보자와,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중보자를 통해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아말렉을 대항하여 칼을 휘두르던 여호수아는, 두 날 가진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자신의 육신을 대항하여 사용하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며(히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시리라 하셨다 하라”(출
그는 항상 칼을 옆에 차고 있다. 훗날에 아말렉은 다른 모습으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로 나타나고 있음을 읽게 된다. 사울 왕은 아각 왕을 살려주고 주님께 희생을 드린다는 미명 아래 우양의 가장 좋은 것을 남기었다(삼상
또 다른 한 사람 유다인 모르드개의 경우, 그는 아각 사람 하만을 주(主)로 인정하며 절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하만은 왕의 총애를 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모르드개의 눈에는 거만한 하만이 이스라엘의 대적이며 주의 원수임을 식별할 수 있었다(에
(198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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