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A. 바네스
칼빈주의자들은 성령님이 택한 자들의 마음에서만 역사하시고 그분의 권고하심은 거절될 수 없다고 하며 “불가항력의 은혜”라는 용어를 주장한다. 다시 한번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책임보다 우선한다. 그러나 우리의 논지는 그것들이 공존한다는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성령의 인격으로) 구원받으려는 누군가를 위해 일하셔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개인은 그들의 마음을 바꾸라는 명령 즉 회개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구원을 위한 성령님의 사역
주 예수님께서 요 16:8에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셨던” 세상(요 3:16)과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신 동일한 세상으로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요 3:17). 그래서 성령님은 죄, 의와 심판에 대해서 (택함 받은 자들만이 아니라) 세상을 책망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요점은 그것이 단어의 의미하는 폭을 고려하는 약간의 시간을 할애할만한 가치가 충분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관련된 헬라어 단어는 ejlevgcw(엘렌코오)인데 문자 그대로 “빛으로 비추다”를 의미한다. 이 번역을 위해 제시된 가능성 중 하나는 스트롱 사전(히브리어와 헬라어 사전과 일치)에서 나온 “유죄 입증하다, 확신시키다, 잘못을 말하다, 꾸짖다, 책망하다”가 있다. J.N 다비의 (새 번역)에서 “증거를 가져오다”; 영어 개정판 의 “유죄 입증하다”; 로버트 제미슨, A.R. 포세, 그리고 데이비드 브라운 (완전한 성경에 비평과 해설의 주석, 1871): “확신하다”(영어 단어의 책망은 라틴 단어 “설득하다”에서 온 것을 주목하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설득하다), 동시에 다른 번역은 “폭로하다”가 포함되어 있다.
마빈 빈센트(1834-1922)는 “그들의 실제 본성의 무지에 관해 (세상을) 정죄할 것”에 대한 의미를 확대했다(신약 단어 연구, 에드맨스, 그랜드 래피즈, 1946), 하지만 프리츠 라이네커(1897-1965)는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 증명하려는 책망”으로 확대하여 유용하게 설명했다(헬라어 신약성경에 대한 어 핵심, 존더반, 그랜드 래피즈, 1980). 또 다른 사람은 흠정역에서 번역된 단어 '책망하다'를 영어로 만족스럽게 번역하기가 다소 어려우며(그러한 의미는 매우 풍부하다), 하지만 “권위 있는 조사, 의심할 여지없는 증명, 결정적인 판단의 개념”이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영국의 캠브리지의 신학 교수였던 B.F. 웨스트코트(1901-1825)이 쓴 글에 주목한다: “그것은 권위 있는 시험, 의심할 여지없는 증명, 결정적인 판단, 그리고 징벌적 권력의 개념을 포함한다. 다른 사람을 ‘유죄 판결’하는 자는 진리를 자기 앞에 분명한 빛으로 제시하며 그리하여 진리를 보이고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거부하는 사람은 …그의 눈을 뜨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을 거부한다”(성. 요한에 따른 복음서, 그랜드 래피즈, 미시간: 윌리엄 B. 에드먼즈 출판사, 1971, P. 228).
요약하자면 “책망”은 죄, 의, 심판의 실재, 진리, 그리고 심각성에 대한 충분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공하는 개념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증거 없다면 죄인들은 회개할 수도 없고 회개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일단 그것을 갖게 되면 그들은 회개할 의무가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들이 그분의 증거를 거절할 수 있는가?” 스데반은 산헤드린에서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행 7:51)라고 말했다. 빈센트(단어 연구들)의 설명에 따르면 “거역하다”라는 동사는 “적극적인 반항을 의미하는 매우 강한 표현”이다. 여기에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고의적이고 강한 반항의 한 예가 있다.
성령님에 대한 이러한 충분한 증거를 거부할 때 그것은 분명히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이며(악한 말)(마 12:31)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이다(히 10:29). 만일 이것이 지속되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대홍수 이전 시대에도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항변하다, JND) 아니하리니”(창 6:3)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 악한 날에도 성령님이 에녹과 노아의 행실과 증거를 통해 그들에게 회개하는데 필요한 증거를 주시는데 활동적이었음을 의미한다(벧전 3:19; 벧후 2:5-9, 유 14).
이 성령님의 사역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에 대한 거룩한 증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성령님의 사역으로 그들의 양심에 증거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은 일반적으로 영적으로 죽었지만, 복음을 듣는 자들은 성령님에 의해 이러한 중요한 문제의 진리를 보도록 충분한 증거를 받는다. 만약 우리가 성령님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복음 안에서 행사되는 사람의 책임에 대한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다. 일단 우리가 그분의 사역을 이해하면 다른 방법으로는 볼 수 없었던 가능성들을 볼 수 있다.
복음의 부르심
복음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초청이다”라고 F.F. 브루스는 썼다(에베소서, 피커링과 잉글리스, 런던, 1961).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국 칼빈주의자인 C.H. 스펄젼이 한 번 이상 기도했다고 쓴 사람은 F.F. 브루스가 쓴 글이다 “주님, 당신의 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데려오시고 더 많은 사람들을 택하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질문에 대한 답변, P. 198, 주기도문 출판, 엑세터, 1972).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의 진실한 선포와 함께, 성령님께서 듣는 자들의 마음 속에서 활동하시며, 그 진리에 대해 그들이 구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주신다. 그러면 그들은 회개(자신들의 마음을 바꾸고)하고 복음을 믿어야 할 책임이 있다.
물론 성령님의 사역을 이해하려고 할 때 주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람이 마음대로(예를 들어, 원하다) 불매 …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요한 3:8). 히브리어에서 “성령”과 “바람”이라는 단어가 동일하기 때문에 성령님은 우리가 기대하거나 이해하는 대로 역사하지 않으시고 그분께서 원하시고 선택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구원을 위해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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