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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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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19. 11:43 횃불/1993년

요한 계시록 강해(2)

(1:11~19)

어거스트 반 린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1:11).

 

우리는 다른 곳에 규모가 큰 성도들의 회중이 많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이 일곱 교회들이 부활하신 주님에게 선택되었는지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은 아마도 이 일곱교회들이, 이 책에 기록된 순서대로, 지난 19세기에 걸쳐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발생한 모든 영적인 국면을 보여주었기 때문인 듯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교회들은 전 역사에 걸친 교회의 영적인 상태의 뚜렷한 전개과정을 그 소개된 순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들 일곱 교회 역시, 레위 기 23장의 일곱절기와 마태복음 13장의 일곱가지 비유와 함께 이 은혜시대의 연속된 역사의 흐름을 제시해 줍니다. 이 일곱으로 이루어진 사항들은 저마다 현재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시기에 살고 있는지를 일깨워줍니다.

이 일곱 교회들의 이름은 의미가 풍성하며 그 영적인 상태와 부합합니다. 에베소는 신부가 남편에게 그러하듯 사랑스런을 뜻합니다. 서머나는 몰약을 뜻하는데 이는 극심한 핍박 기간에 그들이 겪은 고난 및 죽음과 잘 부합합니다. 버가모는 결혼은 했으나를 뜻하는데 이는 비록 그리스도와 결혼했지만 그분께 충성치 못한 그들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두아디라는 향기, 사데는 남은 자, 빌라델비아는 형제사랑, 그리고 라오디게아는 사람들의 권리 를 각각 뜻합니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1:12,13).

 

요한은 일곱 금촛대를 보았으며 그 가운데 인자가 서 계셨습니다. 이분은 전에 변화산상에서 요한이 목격한 동일한 눈부신 분이었으며 그 얼굴은 해같이 빛이 났습니다. 그는 요한이 잘 알고 있었던, 즉 그 배신의 밤에 그 가슴에 기대던( 13) 바로 그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제 그는 그분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촛대 사이에 서 계셨습니다. 성막에는 촛대가 하나뿐이었는데 솔로몬 성전에는 열 개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일곱개가 있는데 우리는 20절에서 그것이 일곱교회, 혹은 다시 말해서 이 은혜시대 동안의 전체 교회(the Church)를 가리킨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5:37에서 우리는 촛대의 한가지 목적이 그 촛대 위에서 빛을 비추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일곱개의 불빛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이는 촛대가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자는 이 일곱개의 불빛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데 그 불빛의 임무는 그분께 빛을 발하고, 존귀케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자요 세상의 구주되신 그분의 도덕적이고 영광스런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 전에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이제는 영화롭게 되신 그분께 시선을 모을 특권이 주어졌으니 얼마나 복스런 축복인지요!

인자라는 칭호는 사복음서에서 우리 주님에 의해 약 70회 사용된 말입니다. 그것은 그분만이 자신에 대해 사용하신 칭호입니다. 그것은 지고한 영광의 정점(頂點)에서 저주의 심연까지 그분을 끌어내린 그 무한한 낮아지심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친히 인간이 되실 때 그분이 취하신 칭호로서 결코 철회되지 않을 것인데 이는 그분은 인자로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칭호는 절반 정도는 주님의 고난과 관련하여 사용되어 있으며 나머지 절반은 그분의 미래 영광과 관련하여 사용되어 있습니다. 가야바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26:64).

요한이 여기서 그러한 미래의 영광을 본 것은 들리는 음성을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킬 때였습니다. 마리아 역시 뒤를 돌이킬 때 주님을 뵈었습니다( 20:16). 그녀는 그녀의 부활하신 주님을 뵈온 것입니다 요한이 본 주님은 영광 중에 오실 그날의 모습이었습니다.

요한은 근동에서 영예와 위엄을 나타내주는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은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가슴은 금띠가 둘러져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띠는 보통 허리에 띠는 것으로 나와있는데 여기에는 가슴에 띠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영광스런 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신 그 동일한 분이심을 알려주고자 하는 뜻이 아닐까요? 이 금띠는 그분의 은혜의 영광을 상기시켜 주지 않습니까? 가슴, 전능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단어가 가슴을 가진 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그분의 권능을 암시해 주지 않습니까? 그분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은혜와 권능과 영광 등 모든 것이 그분의 것입니다!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연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1:14,15).

 

이러한 묘사는 비록 상징적이긴 하지만 모두 다른 곳에서 발견되며(에스겔서와 다니엘서에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흰 머리털은 그분의 영원한 위(, 그분은 다니엘 7:9에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로 불리우고 있음), 그러한 심판장을 특징지우는 지혜와 경험과 거룩함을 말해 줍니다

불꽃 같은 눈은 그분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으며 그분의 판단은 확실하고 순결함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모든 것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분 앞에 벌거벗은 듯이 밝히 드러나 있음은 물론입니다.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았습니다. “ 이는 시편기자의 표현과 같습니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 93:4). 큰 파도가 해변의 바위에 부딪히는 광경은 자못 두려운 느낌을 갖게 합니다. 나는 종종 두려운 눈길로 그런 모습을 지켜보곤 합니다. 그분의 음성은 거센 물결의 격랑이는 소리를 능히 뛰어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동일한 음성이 부드러운 미풍과 같이 우리의 곤한 영혼에 평강을 고하며 조용히 속삭이는 것을 듣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동일한 주 예수님께서 먼저는 그분의 백성에 대해서, 그런 다음 세상에 대해서 심판을 행하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그분은 자기 백성가운데서 심판을 행하십니다 잠시 후 그분은 이 그리스도 없는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1:16,17).

 

별은 권능 혹은 권위를 암시해 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오른 손 안에 있다는 것은 모든 영적인 권위가 그분의 손 안에 있음을 가리 킵니다. 그분은 교회의 머리 이시며 그분 외에는 아무도 그 위치에 있을 수 없습니다.

날선 검 은 히브리서 4:12이 말해주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 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권위를 행사하십니다. 그분은 자기를 믿는 영혼을 구원하는 그 동일한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과 뜻을 따르지 않는 모든 것을 심판하십니다.

그분의 얼굴은 힘있게 비취는 해와 같았습니다. 그 얼굴은 전에는 심히 상하고 침뱉음과 손으로 침을 당했지만 이제는 신적인 영광의 모든 위엄 가운데 빛을 발합니다. 요한은 일찍이 변화산상에서 이와 같은 장면을 목도했는바 그때 그는 그분의 권능과 영광의 찬란한 광채를 보았습니다. 나는 우리가 혹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의 자녀가 된 기쁨에 만족하여 우리를 그분의 백성으로 삼고자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이 동일한 예수님이 여기 계시록 1장에 묘사된 위엄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잊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있는 죄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있는 죄와 마찬가지로(아니 그보다 더) 가증스런 것으로 그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을 찬양할지니 그분은 자신의 성도들 안의 죄를 지금, 여기에서 다루십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우리도 요한과 같이 그분 발 아래 겸손히 엎드려 그분의 위대함과 영광에 대한 깊은 깨달음 속에 입술과 삶을 통해서 그분께 경배드리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솔로몬의 노래 속에는 우리 주님에 대한 또 다른 긴 묘사가 나옵니다( 5:10~16). 이 두 묘사는 매우 표현이 대조적이어서 마치 빠른 두 사람을 묘사하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신부의 눈에 비친 사랑스럽고 매혹적인 분으로 묘사하는 반면 다른 하나는 주님을 사람들의 심판주로서의 직임적인 영광 중에 계신 분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이 동일한 예수님을 묘사해 줍니다. 솔로몬의 노래에서 그분의 신성의 영광은 정금 머리를 통해 나타나 있으며 그분의 겸비한 인성의 영광은 정금 다리를 통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에 의하면 그분의 해와 같은 얼굴과 빛난 주석 같은 발은 그분의 인자로서의 눈부신 순결과 거룩을 표현해 줍니다. 그분은 전에 그렇게 행하신 까닭에 더 이상 땅을 밟지 않으시며 이제는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땅을 발등상으로 삼고 계십니다.

솔로몬의 노래에서 그분의 머리털은 검고 고불고불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풍성한 생명과 왕성한 젊음을 상징해줍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하는 자의 눈에 비친 연인으로서의 그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는 이 머리털이 양털과 눈 같이 희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후자의 표현은 우리로 이사야 1:8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죄인이 씻음을 받으면 눈처럼 희게, 즉 주님 자신처럼 깨끗하게 순결하게 됩니다. 하룻밤사이에 검은 머리가 희어지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노래와 계시록 사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음을 암시해 주는 듯합니다. , 그 흰 머리털은 우리의 복스런 주님께서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해 견디신 그 무서운 고통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니엘 7:9을 통해 흰 머리털이 연륜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는 본문의 흰 머리털이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그분의 복스런 아들 안에서 나타난 그분의 절대적인 순결을 말해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의 노래에서는 그분의 눈이 비둘기의 눈과 같이 부드럽고 따스하게 묘사되었으나 본문에서는 그 눈이 불꽃같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일곱 촛대 사이로 다니시며 그분의 구속받은 백성을 살피고 그들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날마다 그들의 행위를 감찰하십니다.

 

자비와 공의의 판단으로

나의 삶의 순간 순간을 빚어가시네

 

이 두 대목이 동일한 한 인물을 묘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노래에는 생략되어 있는 그분의 한가지 특징이 여기 계시록에 나타나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슴입니다. 솔로몬의 노래에는 금()이 두번 언급되어 있는데 비해 계시록에는 그분의 가슴에 두른 띠와 관련해서 한번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또한 계시록에는 두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되는데 (1)띠가 허리가 아닌 가슴을 두르는 것으로 언급되었고, (2) 가슴에 해당되는 말이 남자가 아닌 여자의 가슴을 가리키는 말임을 보게 됩니다. 이 인자에 대한 두려운 광경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분의 가슴을 두른 금띠를 통해서 여인의 사랑에서 엿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분의 희생적이고 섬세한 사랑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광채나는 얼굴과 타오르는 눈빛, 빛나는 발 가운데 이러한 따스한 사랑을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대조적인지요! 띠는 띠인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 예수의 무한히 섬세한 사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가슴은 성경에서 사람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것으로뿐 아니라( 5:19) 어린 아기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도 나타나 있습니다. 거기서 그리스도 안의 어린 아기는 양식을 발견하며 성숙한 신자는 온전한 만족을 발견합니다. 우리 주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아버지의 품 안에서(그 품을 결코 떠나지 않고) 나오셨습니다. 요한은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에 대해서 쓰기 위해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나왔습니다( 13:23). 하나님은 전능자로 불리우는데 이는 가슴을 지닌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진실로 그분 안에는 갈급한 영혼이 바라는 모든 것이 발견됩니다!

솔로몬의 노래에서 그분의 입술은 골짜기 가운데서 은밀히 피는 백합화 같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이곳에 계셨을 때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는지요! 솔로몬의 노래에서는 그분의 입이 심히 달다고 했으나 여기에서는 그분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곳에 계셨을 때는 물론, 지금 은혜 가운데 다스리고 계신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작게 호소하는 그분의 자비로운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두려운 권능 가운데 대적에게 소리를 발하시며 그 큰 능력으로 그들을 분쇄하실 날이 다가옵니다. 한편, 신자는 지금 이 순간도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며, 모든 능력이 그분의 손 안에 있음을 깨닫기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분의 입에서는 부드럽고 다정한 말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날선 검이 나올 것입니다. 그분께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실 때 그 입에서는 열국을 멸할 날선 검이 나올 것이며, 그런 다음 그분은 철장으로 세상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19:IS). 이 심판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으나 그 동일한 날선 검, 즉 하나님의 감찰하는 말씀은 지금 성도들을 심판하는 중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게도,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입지 않도록 그 심판은 지금, 이곳에서뿐입니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17,18).

 

이것은 얼마나 승리에 찬 선언인지요! 주님은 사망과 음부의 영역에 침입하셔서 거기에서 승리자로 나오셨습니다. 이는 성경에 미리 예언한 바와 같습니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16:10). 그분은 무죄하신 까닭에 사망이 그 몸을 가둬둘 수 없었으며 그 몸에 대해 아무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음부도 그 영혼을 가둬들 수 없었는데 이는 그분께서 자기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그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신자에게 이것은 사망과 지옥이 그 두려움과 권능을 빼앗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는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냐 음부(지옥)야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신자는 여전히 사망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미 그 쏘는 것을 잃었습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인데 예수께서 신자를 위해 죄를 정복해주신 것입니다. 신자에게 죽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 잠이 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음부 또한 그 승리를 잃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에 의해서든 그분의 성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강림에 의해서든 이 세상을 떠날 시간이 찾아올 때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됩니다.

죄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죄인이 죽으면 그 몸은 무덤 속에 갇히며 그 영혼은 최후의 심판날이 올때까지 지옥에 있게 됩니다. 그 날에 그리스도께서 무덤을 열기 위해 그 열쇠를 사용하실 것이며 모든 죄인이 거기서 나올 것입니다. 지옥 또한 그 영혼을 내어줄 것이며 죄인은 영혼과 몸이 재결합된 모습으로 크고 흰 보좌(백보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보좌에 계신 심판 주께서 이곳에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지니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1:19).

 

이 구절에서 계시록 전체는 아주 간단하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요한이 본 것인데, 이는 본장에서 계시된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에 대한 사실들을 가리 킵니다. 요한은 11절에서는 보는 것”(혹은 볼 것”)을 기록하도록 지시를 받은 한편, 여기 19절에서는 본 것을 기록하도록 지시를 받았는데 이는 이것이 본장에서 계시된 것임을 입증해 줍니다.

둘째는 이제 있는 일인데 이는 2,3장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 이 은혜 시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를 가리 킵니다.

그리고 셋째는 장차 될 일인데 이는 4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나타나 있는 예언적인 사건들을 가리킵니다. 계시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장들은 구약예언의 핵심부라 할 대환난 기간 동안의 이스라엘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치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의 강림과 세상 심판, 그리고 그분의 천년통치 및 영원한 통치로 절정에 이릅니다.

계시록은 이 괄목할 중대한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제시하고 있으며(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유일한 책임) 따라서 비교적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1993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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