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數)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하)
“너를 좇은 백성이(내게는) 너무 많은즉”(삿
사람은 누구나 수(數)에 의존하는 마음과, 통계에 의해 결과를 평가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으레 적은 무리에게는 무관심과 비난이 가해지고 큰 무리에게는 관심과 호의가 베풀어집니다. 우리는 이런 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물론 그것이 성령의 사역의 열매일 경우 큰 수는 무시되어서는 안됩니다. 오순절 날에 3천이나 되는 영혼이 한꺼번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예가 그러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인간에게 축복을 의미할 경우 큰 수를 기뻐해야 합니다. 큰 무리가 그들의 마음을 열고 음성을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들고 세상에 나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심히 보기 원하는 일일 것입니다.
반면에 그것이 자만을 초래할 경우 큰 수는 해롭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말하지 못하도록 기드온의 군대를 감소시키셔야 했습니다(삿
E. 스탠리 존스는 “집단적인 이기주의”를 조장하는 오늘날의 “수(탈) 쟁탈전”을 혐오한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주님보다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만들 경우 큰 수는 해롭습니다. 다윗의 인구조사는 이런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삼하
또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표준을 낮추고 성경이 가르치는 원칙을 타협하고 그 메시지를 흐리게 하고 경건의 훈련을 등한히 하게 될 경우 큰 수는 해롭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보다 무리에게 있을 때는 항상 그런 시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주님과의 밀접한 교제를 잃게 할 경우 큰 수는 해롭습니다. 개개인이 무리 속에서 자신을 잃고 있을 때, 그들이 자리에 없어도 찾는 사람이 없게 될 때, 아무도 그들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하지 않게 될 때, 그 때는 한 몸의 개념이 상실되고 맙니다.
또한 그것이 몸 안에서의 은사의 개발을 막을 경우 큰 수는 해롭습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신 것은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 아닙니다. 큰 무리를 택하셨다면 효과적인 양육에 적지 않은 지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역원칙은 소수 잔존자를 통해 일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큰 무리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적은 무리에 등을 돌리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큰 수를 자랑하지 말아야 할뿐더러, 그것이 우리 자신의 나태함과 무관심으로 말미암은 결과일 경우 적은 수에 만족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
(199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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