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메칼리스터
8. 인용문의 문맥
이 연재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1,000년 통치를 믿는 이유를 여기에서 제공했다. 그러나, 특정한 신약 구절들을 인용하는 관점의 반대 의견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인 그들은 구약 예언들을 영적인 의미로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기를) 문자 그대로 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범위의 기사에서 우리는 그러한 인용문을 단지 견본으로만 고려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종종 “아브라함의 자손”과 관련하여 인용된 용어는 갈라디아서 3장에서 현 시대 믿는 자들에 관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무천년주의자는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해 성경에 모든 약속들은 아브라함의 문자 그대로의 자손에 대한 미래의 성취가 아니고 우리들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리는 문맥을 바라보자. 갈라디아서 3:8을 숙고하라,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이 장의 나머지에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때문에 모든 민족들이 믿음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구원이 성취되고,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을 약속을 보이려고 나아간다(14,26,28절). 따라서, 그는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는 말씀과 함께 장을 닫는다(29절). 약속은 어느 것인가? 문맥에서 그것은 14절에 진술된 약속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으로 우리는(19,29절) 복음을 통해서 세상에 축복으로 만들어진 약속을 성취한다. 아무것도 민족과 땅에 관한 약속들에 관한 어느 것도 무효로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언급조차 않는다.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의 이스라엘에 대한 문자 그대로 성취를 기다린다.
무천년주의자들에 의해 사용된 인용문의 또 다른 모습은 히브리서 8:8-12과 10:15-17이며, 예레미야 31:31-34의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에 주어진 “새 언약”의 약속을 나타낸다. 이들 약속들은 “이스라엘과 유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이거나 동일하다는 의미(무천년주의자들의 주장)로 이 시대에 신자들에게 인용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따라서 이 예언에 관해 완전히 성취되고, 민족을 위한 미래의 성취는 없다.
다시 한번, 우리가 조심스럽게 문맥을 검토하자, 그리고 우리는 새 언약의 약속이 마지막으로 교회에 완전하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히브리서의 기자는 어디에도 말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새 언약에 관한 근거는 그리스도 피 흘리심이다(눅 22:20; 고전 11:25; 히 9:15), 그리고 그 아래로 오는 사람들을 위한 결과는 그들의 죄들이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것이다(렘 31:34; 히 8:12, 10:17). 따라서, 오늘날 자신의 구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새 언약의 복에 들어온다. 그것이 히브리 서신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그 미래 성취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주님께로 돌아올 때, 민족에게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될 것이다. 현재 시대 신자들은 이스라엘이 아직도 기다리는 어떤 축복 안에 이미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스라엘이 미래에 부인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천년주의자에 의해 사용된 또 다른 보기는 바울이 로마서 9:23-26에서 인용하는 호세아 1:10,11과 2:23이다. 호세아 1장과 2장의 문맥은 그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을 가져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무천년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은 바울이 이스라엘에 대한 호세아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는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단순히 호세아의 말을 빌리고 있다, 그리고 다른 문맥에서 그것들을 적용하고 있다. 그의 말은 분명하다: “이것은 그분께서 호세아의 글에서도 이르시되”(25절). 그는 이방인의 축복이 호세아의 말씀의 성취하는 것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호세아의 말씀이 그것에 대해 적용될 수 있다. 그는 호세아의 예언이 미래에 문자 그대로 성취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 다른 경우는 사도행전 15:14-17에서 야고보가 아모스 9:11을 인용한 것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하신 예언을 현재 이방인 축복에서 충족하는 것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야고보는 그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의 말에 관한 검토는 현재 이방인의 축복이 이 예언이 가지는 “일치”(15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것은 다윗의 장막이 복구될 그 “이 후에”(16절)이다.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14절)을 이방인 중에서 취하여 내고 계시다. 이것은 아모스가 말했던 것과 함께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그것의 성취가 아니다.
그들의 문맥에 있는 인용문에 관한 이 분석은 확실히 속속들이 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보이기 위해 가록되었다고 신뢰한다. 무천년주의자가 자신의 교리에 대한 특정한 “증거 본문”을 인용할 때, 그것들에 관한 주의 깊은 검토는, 그것들의 문맥에서 그것들이 자신의 이론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결론
이 연재에서 우리는 왜 우리가 미래에 지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문자 그대로 1,000년 통치를 믿는지 약간의 이유를 깊이 생각했다: 성경이 그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세계에 있는 현재 조건이 선택적 시야에 응답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해석의 일관된 원칙과 함께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성경이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서 구분이 영속적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가진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완전함에 대한 필요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특성으로 일관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들의 올바른 문맥에서 검토되는 경우 전혀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다르게 제시하는 것을 보일 수도 있는 성경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의 회복과 축복을 확실하게 가르친 것처럼 바울과 함께 기쁘게 참여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 연재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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