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메칼리스터
3. 해석의 일관성
우리는 성경의 구절이 그것의 문맥을 고려하고, 그것의 어휘와 문법에 따라, 그리고 다른 성경과 함께 그것을 비교함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은 그것이 말하는 의미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한다. 우리가 이 원칙을 포기하는 경우에 그 때 성경은 독자가 상상하는 무엇이든 의미하는 대로 취할 수 있다.
많은 무천년주의자들은 성경의 완전한 영감으로 믿고 일반적으로 동일한 방법을 유지한다. 많은 중요한 교리들, 그와 같이 처녀 탄생과 부활처럼 성경은 그것이 말하는 의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예언에 대해 그들은 성경의 명백한 문장이 영적으로 먼 것과 개인이 선택하는 어떠한 의미로 했던 비유적인 것을 대체하는 이 방법을 포기한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해석의 그런 방법에 관한 모순을 몇 가지로 보여주도록 추구할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기 12-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약속을 주셨다. 몇몇 예로, 그는 상속자가 있을 것이다; 그는 많은 민족들의 조상일 것이다; 왕들이 그에게서 나올 것이다; 그의 자손은 이집트에서 노예가 될 것이다; 그들은 그 속박에서 나올 것이다. 그것들 모든 예언은 역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따라서, 동일한 언약의 일부분인 땅에 관한 약속에 대해 우리는 그것들도 또한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해석의 일관성은 이것을 요구한다.
지금 동일한 구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약속을 고려하는 것은 무천년주의자가 교회에 대해 언급하는 그것들을 만들려는 노력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용어를 가리키는 신약의 구절들에는 모든 믿는 자들이 사용된다, 그리고 이들은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에 대한 약속을 언급하고 그의 문자적인 자손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해석의 일관성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창세기 15:13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신다, “네 자손이 자기들의 소유가 아닌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이것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의 일시적으로 거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문자적인 자손을 가리킨다. 약속의 언약은 또한 이삭의 “자손”(창 17:19)과 야곱의 “자손”(창 28:13)에게 주어진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이삭의 자손” 또는 “야곱의 자손”이라고 우리가 결코 언급하지 않는 것처럼 문자적인 자손이어야 하고 신약의 신자들을 의미할 수 없다. 창세기에서 “자손” 단어에 대한 다른 참조는 7:3; 9:9; 38:8; 46:6; 그리고 48:11,19을 포함한다. 각각은 문자 그대로 자손을 나타내어야 한다. 일관성의 근거로 하나님의 언약에서 언급은 또한 아브라함을 주목해야 한다.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삼하 7:12-16)할 다윗에 대한 약속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던 다른 예언에 포함된다(그것은 그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며; 이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고; 그는 불법에 대한 벌을 받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그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다윗은 전체적인 예언(18-29절)의 문자 그대로 성취가 예상되고, 일관성의 근거로 우리는 또한 문자 그대로의 성취를 예상할 수 있다.
다른 구약 구절들은(그와 같이 시 22, 사 7,11,53,61장; 미가 5장에서처럼), 그리스도의 첫번째 오심을 예고한 것은(그것은 그는 다윗에게서 계승될 것이며; 그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고; 그분은 처녀의 탄생일 것이다; 그분의 지상적인 사역의 묘사; 그분의 고난과 죽음의 세부사항) 확실히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마찬가지로 구약의 수많은 구절은 지상에 그분의 다시 오심, 그분의 지상재림, 심판, 이스라엘을 위한 축복된 미래, 민족들에게 흐르는 축복과 함께 그리고 전례가 없는 평화와 의의 시대를 말한다. 종종 이들은 그분의 첫번째 오심의 예언과 함께 있다(예를 들면, 사 61장에). 우리는 그분의 첫번째 오심이 이사야 53장의 문자적인 성취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동시에 어떻게 그분의 재림에서 이사야 11장의 문자 그대로의 성취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선지자가 그분의 첫번째 오심에 관하여 기록했을 때, 그것은 문자 그대로를 의미했지만 그분의 재림에 관하여 그들이 기록했을 때 그것은 영적인 의미였다고 말하려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누가복음 1:31에서 신약에 현재 오심을, 마리아가 말한 것은 그녀가 아들을 잉태하고, 낳을 것이고, 그분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러한 단어들의 문자 그대로 해석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음에 곧바로 우리는 읽는다,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32,33절). 무천년주의자는 양쪽 방법을 가질 수 없다. 그가 문자 그대로 주님의 탄생의 세부사항을 받아들이는 경우에 그 때 그는 또한 문자 그대로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 위에 다윗의 왕위로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무천년주의자는 계시록은 상징이 가득한 책이라는 이유로 문자 그대로의 천년기를 부정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위의 검토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그가 계시록에 대해 얻기 훨씬 이전에 문자 그대로 해석을 포기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계시록 20장의 문자 그대로 의미에 관한 그의 묵살을 고려하자. 상징의 가득 차 있는 계시록을 기준으로 해서 이것을 행하는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상징의 풍부함이 있지만 그 상징은 문자 그대로 나타낸다. 예를 들면, 1:12에서, “등대(촛대)”는 상징이다, 그러나 실제로 무언가를 뜻한다: 일곱 교회(20절). “어린양”(5:6)은 비록 그분이 문자 그대로 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숫자의 사용은 묘사되는 무엇에 관한 실체를 무효로 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그것은 20장에 있다: (예를 들면) 1절에 “사슬”은 비유적이다, 그러나 사단의 묶임(그것이 나타내는)은 실제이다. 수사적 표현의 사용은 성경을 풍성하게 하고 그것들로 우리의 통찰력을 깊게 한다, 그러나 묘사된 문자 그대로 사건들의 실제를 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무천년주의자는 일반적으로 문자 그대로의 방법을 사용하지만 예언에 대한 비유적인 방법이나 적어도 몇몇 예언에 대해서는 성경에 관한 그의 해석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예언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이 주님의 첫번째 오심과 관계하는 때에 그는 그것을 문자 그대로 취한다, 그러나 그의 재림과 관계하는 때에 그는 문자 그대로의 방법을 포기한다.
우리가 역사적이고 문법적인 방법의 동일한 해석의 척도를 일관되게 사용하는 경우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 문자 그대로 미래 천년왕국이 될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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