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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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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4. 16:47 횃불/1978년

3장 근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미 말씀드린 사실과 오늘날 기독교계의 현실은 얼마나 판이합니까? 우리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주님에 대해 가르치고 전파하며 섬기는 자들을 가리켜 전심 사역자라 부르고 있습니다. 전심사역자는 그 동역하고 있는 다른이들과는 구별하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세상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이러한 전통으로 본다면 사도 바울은 전심 사역자의 자격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경우에 따라 장막 만드는 일을 해가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렸습니다. 그는 누군가를 책망하기 위해서 한 것도 아니며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해서 몸된교회의 연합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양한 은사를 통해서 필요할 때에 서로서로 도와줄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4:28).

우리가 전심사역자라고 말할 때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조심성있게 정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심 사역자란 전심 전력을 다 기우려 주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전심 사역이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기가 다소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우리가 장막을 만들어야 한다면 누가 우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관심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복음이나 가르침에 은사가 있음을 인정받고 있을 뿐 아니라 말씀에 성숙해 있어 보수없이 복음을 전하면서 까마귀를 통해서든 사람을 통해서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리라는 확신과 평안함을 누리고 있다면 누가 우리를 가리켜 잘못 되었다고 시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분이십니다.

몇몇 사람들이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좇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유물 곁에 있습니다(삼상 25:13). 그들이 소유물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불순종을 변명하면서 합리화시킬 위험성이 늘 있습니다. 우리가 소유물 곁에 그저 머물러 있든지 소유물 곁에 서 있으라고 부르심을 받았든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천거서에 의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천거서가 없다고 해서 그가 전심 사역자로서 자격을 상실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다고 했습니다. 동일한 서신에서(8) 자신과 디도를 천거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3장에서는 그 필요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음은 어인 일일까요? 이는 고린도 성도들이 일군과 일에 관하여 우리들만큼이나 무분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일하면서 도움 없이 복음을 전했다면 그들은 그의 가르침이 권위가 없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에게서도 보수를 받지 않았습니다. 만약 바울이 일하지 않았다면 소위 사역자로서 합당치 않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수를 바라고 일하는 자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갖가지 중상모략을 당했습니다. 보수를 받든지 받지 않든지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임에 틀림없으며 그 증거가 그의 심령에 있었습니다. 그는 이 직분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내 직분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그날에 밝혀질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시든 말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처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위하여 살기를 원하며 당신 때문에 인생을 바치고 싶습니다. 당신이 천거하든 말든 인정하든 말든 존경하든 말든 나는 당신을 위해 바치렵니다.”

 

동일한 복음

바울이 무슨 유별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동일하게 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우리도 여전히 값없이 복음을 전할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노예로서의 직분을 감당하기를 두려워할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종노릇 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겐가 아니면 무엇엔가 종노릇 해야 할 것이며 더욱 비참한 경우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하듯 그의 종들을 잔인하게 다루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에 매여 종노릇 하는 것보다 훨씬 선하게 우리를 대우하십니다. 주님은 그의 종들을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양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아무도 그들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하늘나라의 영광과 존귀를 예비해 주셔서 함께 누리게 하십니다.

이상 말씀드린 진리에의 전망이 구름이 낀듯 잔뜩 흐려져 있습니다. 우리들의 이러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두 부류로 분열되는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전심 사역자의 부류가 일어나고 있으며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역자가 있는가 하면 일하지 않는 사역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마치 역할을 말해주는 척도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전심 사역자)것으로 나누어져서 좀체로 그 간격이 좁혀질 것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도록 기도하시지 않고 제자들을 보존하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두시고 복음전도자로서 하나님의 양무리를 먹이는 자로서 때로는 장막을 만드는 자로서 일하도록 하셨습니다. 장막을 만들도록 부르셨을 뿐 아니라 장막을 만들지 않도록 달리 부르시기도 하셨습니다 참으로 신령한 것은 근로와 동일시 해서도 안되며 근로도 아닙니다. 사람이 일 하거나 하지 않는데 따라서 더욱 신령하다거나 덜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육신의 소욕을 좇아 살지 아니하고 성령을 좇아 행할 때에 신령한 사람이 됩니다. 지역교회에서 신실한 목자는 어디에선가 무슨 일인가를 하도록 전심 사역자로 천거를 받은 일군들이 많습니다.

 

동일한 유전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배울만한 수년간의 세월이 어떤 사람은 그저 신문이나 읽고 있어 세상 물정에 대해서는 학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 사람이 텔레비젼을 부수어 버린다면 무엇을 해야 할는지 멍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는데 있어서 충분한 시간을 갖기를 원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뜻을 애써 상고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24시간이라는 동일한 분량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심령이 윌리암 케리처럼 되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Carey가 그의 직업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저의 직업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생애를 마치 서투른 구두 수선공이 구두를 지어 가는 것처럼 주님을 위해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준 모본과 유전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언행간에 모든 것을 동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 우리가 살아 가는 동안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찬송하고 존귀를 돌리는 것이 아닐까요? 사도 바울은 다른 모든 사람이 수고한 것보다 더욱 수고했고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가라고 권면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사명입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이거나 위대한 사람이거나를 막론하고 이처럼 살아 가도록 노력해야 마땅합니다. 그러게 하면 우리를 욕심꾸러기라고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평안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수고하게 될 뿐 아니라 필요를 느끼고 있는 사람을 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근로에 관한 가르침에서 외면할 사람이 일어나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안이하고 차선의 방법을 강구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옛 아담이 이마에 땀흘리면서 살기를 회피하게 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양무리를 우리그들로 나누어 놓으려 합니다. 즉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며 대제사장도 한분이시며 중보자도 한분이시며 주인도 한 분이심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양무리를 돌보기 위하여 목자를 세웠으나 제사장들을 세우지는 않았습니다.

 

근로의 두가지 원칙

근로는 우리에게 물려준 전통이며 그리스도인의 봉사입니다. 첫째로 근로는 선한 것입니다. 둘째로 기회를 주시는 대로 거저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근로와 동일하게 선한 것입니다.

첫째 원리인 근로는 자원함으로 즐겨 순종함으로 충성스럽게 그리스도를 섬김으로써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선히 여기실만한 종과 같이 상전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상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고용주가 나에게 은혜롭게 대하든 악덕 고용주이든 우리는 여전히 경외와 존경심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그날에 사람의 모든 근로가 재연(再演)되고 우리가 한 일이 어떤 것인가 다 드러나고 우리 가운데서 개개인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기에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원칙인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소원이십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님을 인하여 고난을 당할 뿐 아니라 주님의 자취를 따라가도록 하시려는 경륜과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부르셨음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다. 이것이 세상 앞에 드러낸 구세주의 신분이었습니다. 그저 노동자로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근로를 솔선수범으로 보이셨습니다. 아무도 강권하지 않았겠지만 주님은 친히 30년 동안 노동을 하신 분이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계속적으로 도와주는 분이었습니다. 마침내 산제물로 자신을 드리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신것입니다. 그제서야 수고는 다 이루셨습니다.

사도 시대에 오순절의 불길이 전 세계로 번져갔던 도화선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 1:8).

이 말씀은 우리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는 그 자체가 입증해 주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던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리스도의향기를 온 세계에 전파해야 합니다. 사람이나 그들이 하는 봉사에 관하여 비판하지 마십시오. 서고 넘어지는 것이 그 주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붙들어 세우실 수 있기 때문에 그가 넘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14:4) 모든 사람이 다 자기의 하는 일에 따라 상을 받을 것입니다(고전 3:8).

우리는 우리 중에 다른 사람보다 위대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으로 인하여 전통을 다시 세워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은사로 주시지 않은 왕이나 명칭이나 칭호 나 영예나 칭찬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보다는 우리 가운데서 수고하고 있는 사람을 분별하고 그들의 일로 말미암아 그들을 존귀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주께 하듯 진심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경영자, 고용주의 이름으로 하며 그가 기뻐하는 방법으로 하며 그를 위해서 하십시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참으로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78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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