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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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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5. 10:45 횃불/1978년

1부 성서적인 재정원칙

 

HAROLD G. MACKAY지음

20세기의 팽창경제에 있어서 생활상 재정적인 문제는 점점 복잡해져만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컴퓨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정생활이나 사업에 있어서뿐 아니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랬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신앙적인 활동에 이처럼 막대한 재정이 투자된 적이 없었습니다. 복음적이고 기본적인 활동에 국한시킨다 하더라도 연간 비용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 돈이 마련 되는 것일까요? 어디에서 수입되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전세계에서 하고 있는 주님의 일을 도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만으로 만족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해답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딤후 3:16,17). 주님의 일과 일꾼을 합당하게 도울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성경적인 원칙은 무엇입니까? 이에 관한 말씀을 함께 상고 해 봅시다.

 

족장시대의 십일조

이 주제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아브라함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주었던 경우일 것입니다( 14:20, 7:1). 안식일이나 사형제도 등을 망라하는 율법으로서 십일조를 명하신 것은 시내산에서 있었던 일로서 아브라함의 경우보다 400년이나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주님께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28:22). 그러나 그가 약속을 지켰다면 과연 십일조를 누구에게 바쳤을까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사실을 통해서 십일조는 하나님께 속했음을 보여주시는 분명한 계시라고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26:5)는 말씀대로 십일조가 족장들에게 주셨던 계명과 율례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모세에게 주신 경제적인 규례

이스라엘 만족은 하나님을 통치자로 모시고 있는 신정국가였으며 그들은 십일조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27:30~32). 이것은 성막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을 도와주는데 쓰였습니다( 18:21~24, 26:12). 레위인들은 거주지로 48성읍과 촌락을 분배 받았습니다( 35:1~8, 14:3~5, 21:1~42). 제사장들이 제물로 드렸던 제물을 먹어도 되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습니다( 2:3~10, 5:13, 6:16~18, 26~29, 7:8~10, 31~36, 18:8~20). 성막이나 성전의 두 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원하는 예물을 통하여 완성되었습니다( 35:4~9, 36~2~7, 대상 29:1~9,16). 성막과 성전의 유지와 보수는 20세 이상의 사람들이 내는 반 세겔의 세금을 통해서 충당했습니다( 30:12~16, 대하 24:6~14).

아브라함( 20:7) 아론( 7:1)과 모세( 18:15, 34:10)가 선지자로 불리웠으나 아직껏 사무엘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국가적인 면모가 되는 직제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삼상 3:20, 3:24, 13:20). 그 때로부터 사무엘 선지자는 국가생활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망과 개혁과 국가의 장래에 대한 계시 등이 그것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에 관한 경우처럼 사무엘의 활동을 위한 특별한 재정적 후원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의 일행이 순회할 때에 개인적으로 접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왕하 4:8~10) 사무엘상(9:5~9)에서 이들이 순회할 때에 돈과 음식과 선물로 필요를 도와주는 습관을 보게 됩니다. 이상 말씀드린 사실등으로 미루어 구약 성경에 기록 되어 있는 재정적인 원칙은 아래와 같았다고 생각됩니다.

. 주님의 일은 주님의 백성들의 공급으로 할 수 있었다.

. 주님을 섬기고 있던 사람들은 법정 헌금인 십일조와 자원하는 헌금을 통하여 공급을 받았다.

. 십일조를 성실하게 하면 하나님께로서 축복을 받았고( 3:9~10, 3:10) 성실치 못하면 하나님의 재물을 도둑질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3:8,9).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기 전에 애굽사람들에게 받았던 금은패물을 통해서 첫째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었고( 11:2~3, 12:35~36) 바사왕 고레스와 다리오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해서 도왔던 것입니다( 6:4,8~9). 그러나 전자의 경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바로에게 종살이 했던 댓가인 밀린 노임을 요구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1:7~14). 후자의 경우에 바사왕들은 이방인 침략자로 말미암아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황무하며 이스라엘 전토가 황폐한데 대한 형식적인 보상이었습니다(대하 36:17~20).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의 재정상황

신약 성경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성전의 유지관리에 필요한 법정 부담금의 지불을 기적적으로 이행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17:24~27). 주님과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하실 때에 그들을 환영하는 이들의 공궤를 받으셨습니다( 26:6, 7:36, 11:37, 12:1,2). 주님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재물로 주님을 섬겼고( 8:3) 이것은 보통 전대에 보관했습니다( 12:6, 13:29). 열두제자나 칠십제자를 보내실 때에 주님께서는 선례를 따르도록 실제적인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10:9~14, 10:1~8).

사도행전은 교회의 선교 활동과 기독교의 발전 복음의 전파와 지역교회 시작 등 오순절 이후 30년 간의 사실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이 진리의 교훈에 따라 그런 속도로 복음이 전파 되었던 시기는 전무후무할 것입니다( 1:6~23 참조). 그런데 우리가 놀라게 되는 것은 오늘날 많은 선교활동에서 현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두가지 요소 즉 일군들을 도와야 한다는 호소나 모금을 위한 호소가 사도행전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사도들이 복음 사업에 대한 모험적인 정열에 기인한 것으로써 사도들이 없는 오늘날에는 더 한층 눈에 뜨이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재정에 관하여는 별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장거리 여행을 하며 복음의 수고를 하는 데에는 많은 돈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물론 일세기와 20세기에 소요되는 비용은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성도의 수도 지역교회의 수도 적었고 아울러 수입도 변변치 못했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교회사인 사도행전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 나그네에게 물질적으로 도와주고 있음을 말씀해 주시며(21:16) 멜라데 성의 토인들이 로마로 가다가 파선한 가운데 있는 성도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음을 언급하셨으며 때로는 바울이 손수 일함으로 자신과 일행의 필요를 도왔던 사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18”3, 20:33~35).

바울이 로마에서 2년간 자기 셋집에 유하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8:30).

주님의 일과 일군들을 위해 돕는 문제를 더 알려면 서신서를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신약 서신서의 저자 다섯 사람 가운데 야고보와 유다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접대에 대한 권면과(벧전 4:9) 장로들에게 더러운 이를 취하려는 동기에서 양무리를 돌보아서는 안된다는 경고에서 그치고 있습니다(벧전 5:2).

요한은 세 서신서에서 단 한번 삼서 5~8절에서 주의 종들이 여행을 하면서 주의 이름 때문에 이방인들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데 가이오가 이를 도왔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미루어 보건대 주의 종들에게 세상의 재정적 도움을 피하는데 적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죤 다비, 아이언사이드, 칼빈, 로버트슨, 그리피드, 토마스 알포드 등 주의 깊게 성경을 상고했던 분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통해서는 충분한 자료를 얻지 못하지만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던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던 서신들을 통하여 더 한층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78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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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