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2. 9. 9. 15:43 횃불/1979년

성경해석의 원리(11)

13. 문맥에 의한 해석의 원칙②

 

(4) 사사기 5:8-여기에는 이스라엘 군에게는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무장되어 있지 않은 군대였다. 사사기 3:16에도 에훗이 가지고 있던 칼은 손수 만든 것이었다. 사사기 3:31에 삼갈은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을 죽였는데 이 역시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사기 14:5,6에 삼손은 힘센 사람이었지만 무장되어 있지 않았다.

사무엘상 13:19-22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어 졌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는 말씀으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즉 평화로운 때에는 칼과 연장을 버릴 수 있었지만 막상 전쟁 때에는 다른 무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5) 역대하 22:11,12-아하시야 왕의 모친 아달랴는 왕손이라 생각되는 사람을 모조리 죽였다. 당시 제사장 여호야다와 결혼했던 공주가 왕궁에서 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비하셨다. 아달랴가 왕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했을 때 여호사브앗 공주는 어린 왕자 요아스를 숨겨 성전에서 6년 동안 길렀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어떻게 어린 아이를, 그것도 성전에서 숨겨 기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울고 보챌 때 탄로가 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역대하 24:27에서 하나님의 집이 황폐하고 파괴되어 중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유인즉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전국에서 바알을 숭배하도록 가르치자 수많은 백성들이 이를 따랐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전의 기명들을 가져다가 바알의 전각에 두고 경배했다.

하나님의 전은 황폐했고 아무도 찾는 이가 없었다. 엘리야가 자신 외에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가 없으리라고 생각할 만큼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젖혀 놓고 바울을 숭배했다. 이처럼 성전에서 경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유왕(乳王)을 감추어 양육하기에 성전이 안성맞춤이었던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6) 열왕기하 18:13-16-히스기야 왕에 관한 기록이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사람들에게 많은 조공을 바쳐야만 했기에 국고가 바닥나버렸다. 그런데 이사야 39:2히스기야가 궁중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전혀 대조적인 기록을 보게 된다. 조공을 바치느라 빈털털이가 된 히스기야의 궁중에 어떻게 그처럼 많은 보물이 있었을까?

역대하 32:22,23에서 그 해답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 히스기야를 산헤립의 손에서 구원하셨을 때에 백성들은 즐겨 헌납했던 것이다.

(7) 예레미야 32:4-여기에는 유다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운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가리니 나의 권고할 때까지 거기 있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34:3에도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반복되어 있다. 그런데 에스겔 12:13에는 그를 끌고 갈대아 땅 바벨론에 이르리니 그가 거기서 죽으려니와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바벨론 땅에 끌려가서 왕을 대면하고 대화하며 그 땅에서 죽으리라고 예레미야서는 말씀한 바 에스겔서에서는 보지 못하리라 했으니 모순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열왕기하 25:6,7을 상고해 보라. “갈대아 군사가 왕을 잡아 립나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저에게 심문하고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 갔더라이상의 경위로 왕은 보았지만 그 땅을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8) 자유주의자들이나 신신학자들의 도전을 받게 될 때에는 문맥상 해석의 원리에 의하여 반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4:6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며, 죄인들은 탕자이며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죄인들은 탕자가 아니다. 죄인의 아버지는 악한 자, 마귀이다. 죄인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다. 그러나 현대주의자들은 에베소서의 말씀을 들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게 될 때에 이러한 적용은 잘못된 것이며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며 결코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고 다만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신다. 웨이모스(Wey mouth)이 책은 에베소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 즉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 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은 모든 신자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지 모든 인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가리키지 않는다. 현대주의자들의 주장이 그릇된 것임을 지적해 주는 여러 대목들이 있다. 요한복음 1:12,13이나 갈라디아서 3:26 등을 찾아 보라. 성경상의 의문을 성경적으로 해결하려면 문맥상 해석의 원칙을 명심하라. 누구든지 성경에 대한 정상적이고 논리정연하고 균형 있고 건전한 지식을 갖추기 원한다면 문맥상 해석의 원칙을 항상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7. , 절의 잘못된 분류에서 비롯된 진리에 대한 오해

(1) 마태복음 16:27,28 17:1-후천년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이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나라가 아니라면 이 구절의 말씀은 도대체 모순이 아니냐? 그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는데 그 왕권을 가지고 올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고 이 구절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냐?”고 말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말씀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다만 그들 가운데 그것을 볼 때까지 죽지 아니할 사람이 있으리라는 말씀이다. 17장에서 보건대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는데 이들은 16:28에서 주님과 함께 서 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천년왕국의 영광을 보았다.

이로써 주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오리라 하신 약속을 성취하신 것이다. 베드로후서 1:16-18에서 베드로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고 증거했다. 그들은 항상 왕권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의 위엄을 친히 보았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목격한 자들이었다.

(2) 고린도전서 12:31 13:1-때때로 장절이 문장의 도중에서 끊어지는 경우가 있다. 12 31절에서 장이 바뀌어지는 것 보다는 colon으로 연결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구분이다.

(3) 고린도전서 10:33 11:1 -10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소신을 피력한 후에 11 1절에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결론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10장은 11:1까지 연속되었어야 마땅하다. 지금 구분된 장절로서는 10장의 교훈을 적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4) 마가복음 2:23-28 3:1-5-이 두 단락은 연결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예수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신 후에 계속해서 이를 증명해 주시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5) 고린도후서 7:1 6:18-전자는 후자의 결론임으로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6) 이사야서 53장과 52:13 이하-전자는 후자에서 시작되어야 문맥상 일관성이 있다.

 

8.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2 12.13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신령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책에서만 발견하게 되며 사람의 책에서 발견하려는 것은 헛수고에 불과하다. 이 구절의 말씀은 성경은 성경으로 비교해 가며 상고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1) 성경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성경으로써 하는 것이다. 성경은 곧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이를 사람에게 속한, 세상에 속한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성경에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만족한 해답이 마련되어 있다. 성경 자체가 설명서이다. 성경의 의문을 해결함에 있어서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의 책인 성경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다. 성경의 분별은 성경 자체를 통해서 갖게 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그러기에 문맥상 해석의 원칙은 참으로 값진 성경해석 방법인 것이다.

(2) 로마서 3:10-19에서 우리는 바울이 사용했던 문맥상 해석의 방법을 보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원칙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하여 보여주는 대목이다.

1장에서 이방인과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2장에서 유대인과 그들의 죄에 관하여 말한 다음에 3장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선언한 바울은 성경을 인용하여 이를 입증하고 있다. 문맥상 해석의 원칙에 의하여 바울은 죄악의 보편성을, 구약을 인용하며 증명하고 있다.

 

9. 문맥상의 원리를 사용하는 법.

피어슨 박사는 이것을 비교의 원리라 부른다. 성경구절들은 피차 비교 혹은 대조될 수 있다.

(1) 율법과 은혜-율법과 은혜를 비교해서 상고해보는 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유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새 사람과 옛 사람( 3:5-14, 4:22-24)-새 사람과 옛 사람의 특정을 자세히 비교해 보라.

(3) 대적자와 변호자-그리스도와 사단을 비교해 보라( 3:15), 여기에는 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놀라운 비교가 나타나 있다.

① 대적자는 끊임없이 신자를 고소하는 반면 변호자는 그를 변호하고 계신다.

② 대적자는 신자를 혼란에 빠뜨리려 애쓰는 반면 변호자는 항상 하나님 우편에 서서 신자가 불의한 모습으로 나타날 때 하나님 앞에서 그를 변호해 주신다.

③ 대적자는 악한 영을 보내는 반면 변호자는 성령을 보내신다.

(4) 보혜사- “위로자라고도 옮겨지며 곁에서 돕도록 부름 받은 자라는 뜻이다( 14:16).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이 이름으로 불리우는데 성경에서 이 이름을 가진 이는 그 두분 뿐이다.

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보혜사이시며 성령께서는 이 땅의 보혜사이시다.

② 성령께서는 신자에게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며 주님은 하나님께 신자를 제시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신다.

③ 성령께서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우리의 대리자가 되신다.

④ 성령께서는 신자와 함께 중재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를 위해 중재하신다.

(5) 하나님의 아들과 불법의 아들-이 둘 사이에는 놀라운 대조를 볼 수 있다.

 

그리스도

적그리스도

진리

거짓

속이는 자

3년 반 동안의 공사역

3년반 동안의 공사역

오실 자

오실 자

새벽 별

계명성

만왕의 왕

많은 면류관을 쓰시게 됨

열 면류관을 쓰게 됨

하늘로부터 모든 권세를 받으심

사단에게서 모든 권세를 받음

 

(79 6월호)

 

'횃불 > 1979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 교사 샘터-크고 작은 두개의 그릇  (0) 2012.09.09
독감  (0) 2012.09.09
엘리야-불길한 소식  (0) 2012.09.09
장로들의 임명  (0) 2012.09.09
성경일람(30)-요나  (0) 2012.09.09
父 형제에게  (0) 2012.09.09
너희는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  (0) 2012.09.09
알고 싶습니다  (0) 2012.09.09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