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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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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27. 11:54 횃불/1984년

광야의 성막(11)

존 리치

은 받침

이제 성막의 기초와 뼈대가 되는 은 받침, 금으로 입혀진 조각목 널판, 띠를 꿸 금고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위에 언급된 것들은 곧 토대와, 벽과, 벽끼리 결합시켜 주는 기구들을 말합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하셨던 이 땅 위의 처소 중 맨 처음 것이며, 이것은 곧 그분이 사람들 사이에 거하시는 현재의 처소인 교회를 예표(豫表) 한다고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옛부터 그 영광은 광야에 있던 그 장막의 널판과 앙장(仰帳) 안에만 거했던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의 임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무리들 안에만 거하십니다. 이방 땅에는, 그것이 아무리 찬란하고 장엄하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처소라고 주장할만한 성전이 없었습니다. 이방 신전들의 화려함과 웅장함이 이 땅의 수많은 왕들과 참배객들을 끌어들이고 있지만 하늘의 하나님께서 택하신 처소는 자신의 뜻과 식양(式樣)을 따라 지어진 그 성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그분의 권위가 인정되는 곳이었으며, 그분의 명령이 순종되는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건축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 필()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39:43). 그리고 자기 백성의 순종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은 다음과 같은 감격적인 말씀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모세가 이같이 역사(役事)를 필하였더라 그 후에 구름이 회막(會幕)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40:33~34)

 

우리는 여기에서 축복스럽고도 준엄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주님의 임재와 능력이 나타나는 장소는 그분이 명령하시고 지은 곳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거기에 말뚝이나 띠 하나가 모자랐다거나 혹은 꽃받침이나 꽃 하나가 더 많았다면 여호와께서는 결코 백성들이 제멋대로 불순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그 성막으로 내려와 거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분의 뜻에 따라 되었으므로 그분은 자기 집으로 내려와 온 마음으로 그곳을 점거하셨던 것입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처소는 산 돌로 지어졌으며 신령한 집입니다(벧전 2:5). 그것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밖의 사람들은 거기에 속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사실은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위로부터 태어난 살아있는 영혼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께로 모아져야 하며 반드시 하나님의 식양을 따라 함께 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약속된 주님의 임재를 기대한다거나 또는 그분의 집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그들의 예배와 봉사와 돌아봄의 모든 순서가 반드시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의 교회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보통 추측하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조건적인 특권이며 잘못하다간 그 특권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3:6, 2:5). 물론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개인의 궁극적인 구원은 결코 상실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거짓 제자나 악한 교훈에 의해 나쁜 재료가 교회 안으로 유입(流入)되면 교회가 더러워지게 되고 결국 주님의 현재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고전 3:16~17, 벧전 4:17). 그분이 우리에게로 오셔서 함께 거하며 동행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먼저 개인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방법들을 살펴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따라 규모있게 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그분의 복된 이름 아래 함께 모일 때에도 그리하여 그분께 만족과 기쁨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은으로 된 기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48개의 널판은 각각 두개의 은 받침 위에 서있었습니다. 사막의 모래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조각목 널판들을 받쳐줄 만한 튼튼한 기초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기초위에 서 있었습니다.

 

은 받침은 값진 것임과 동시에 내구성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0:11~16을 펼치면 그 은의 출처가 어디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속전(贖錢)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계수(計數)하는 날 자기 이름이 민수기에 기록된 모든 남자들은 자기 영혼을 위한 속전으로서 반 세겔을 바쳤습니다. 그가 무슨 지파에 속해 있었든지 그의 가문이 무엇이었든지, 혹은 그가 속전을 드리는 일을 분명히 이해하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잘 설명해 줄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 속전을 바치지 아니하면 그의 이름이 하나님의 백성의 명부에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상징에서 분명히 살펴볼 수 있는 사실은, 자연적인 출생이나 훈련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할 처소를 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 속전이 상징하는 것처럼 오직 구속(救贖) 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전혀 갖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뽐내었던 것처럼 요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그분의 보혈의 효력을 부인하면서도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자랑하고 순교자들의 무덤을 곱게 단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며”( 17:11), 그 피와 그 피를 흘려주신 분을 믿지 아니하면 어떤 아담의 자손의 이름도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이 점에 있어서 실책을 범하지 않도록 간곡히 권합니다. 사방 곳곳에는 죄인을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대적하는 설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인간은 그렇게 타락한 존재가 아니며, 인간에게는 어떤 선한 것이 있어서 적절히 계발하고 양육하면 인간은 잘 발전하여 결국 괜찮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소위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는, 구속과 중생이 없는 구원이란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당신의 이름은 속전을 바치지 않고도 하나님의 백성의 명부에 오를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기만인지요! 영혼을 멸망시키는 그와 같은 거짓말을 퍼뜨리는 사람들은 참으로 두려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가르침이 아무리 유명하고 그와 같은 가르침을 전파하는 자들이 교회나 대학에서 아무리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단이 보낼 그 밀사(密使)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들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똑같은 액수를 드려야 했습니다.

다른 때에, 예를 들어 여호와께 자원하여 예물을 드릴 때 각 사람은 자기의 능력에 따라 부자는 많이 드리고 가난한 자는 적게 드렸습니다. 그러나 속죄의 문제에 있어서는 모두가 동일했던 것입니다 차별이 없느니라”( 3:22).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이며 모든 사람은 그것에 순복해야 합니다. 왕자나 거지, 술주정군이나 교회의 회원이거나 간에 다 똑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9에는 이 속죄와 연관된 언급이 나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또 사도행전 20:28에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성막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 은 받침이 모든 작업의 첫째 일이었습니다.

널판을 세우거나 므라리 사람들이 말뚝을 박기 전에 그 큰 은받침들이 먼저 사막의 맨 모래 바닥 위에 놓여져야만 했습니다. 이 일을 먼저 하지 않고서는 성막이 결코 세워질 수 없었습니다. 이것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바울이 교회라곤 전혀 없는 고린도에 들어가면서 죄인들의 터(foundation)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전파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믿었으며 ( 18:8), 그는 거기서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그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의 터를 닦아놓은 셈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10~11에서 말하기를 바로 그리스도께서 고린도 성도들의 구원과 교제의 터라고 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의 이름은 그들의 구원과 교제의 터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려고 부르심을 입었습니다(고전 1:9)

 

교파의 명칭들과 교파의 가르침들은 그것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흩어지게 하고 나뉘게 할 뿐이지만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말씀은 하나로 모이게 하고 세우며 함께 묶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기초가 되시는 그분의 귀한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며, 또한 주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함께 나누는 교제의 기초가 되는 그분의 이름을 소중히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1984 12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