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2. 12. 11. 19:38 횃불/1988년

우리는 어디에 충성을 바쳐야 할까요?

-윌리암 맥도날드 -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심

우리가 옹호해야 할 세 번째의 중요한 진리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진리입니다( 5:23, 1:18). 이 말은 지역교회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인도와 지침을 받기 위해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교황 같은 이가, 자기가 지상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진리가 적극적으로 부인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교묘한 오류를 경계해야 하는데 그것은 곧,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교회의 제반 사항을 자기마음대로 처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하기 위해 책략을 쓰거나, 원외활동을 벌이거나 눈감아주는 등 육신적인 방법을 쓰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금식과 기도로 분을 기다리는 대신 우리는 성공적인 사업 방법과 이 세상의 지혜를 적용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들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시라면 제반 사항들은 그분의 인도와 지배하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제사장임

그 다음에 네 번째의 진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5~9에서 우리는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제사장이자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령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립니다(벧전 2:5). 이 제사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포함됩니다.

몸의 제사( 12:1~2)

찬미의 제사( 13:15)

물질의 제사( 13:16)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는, 우리가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합니다(벧전 2:9). 이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생활과 실제의 말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의 자격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예배를 드립니다. 왕 같은 제사장의 자격을 가지고서는 세상으로 나아가 그분을 증거합니다.

예매와 섬김이 제사장, 혹은 성직자로 알려진 어떤 특별한 무리의 역할이라는 생각은 신약성경의 개념에 위배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제사장이기 때문에 각자의 제사장 직분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일인(一人) 목회는 있을 수 없음

세상에는 성직자 제도를 거부하는 지역교회들이 있는데 이 교회들은 일인 목회를 거부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부류에 속해 있다면, 지역교회에서 일인 목회자(사역자)를 갖는 것이 어째서 잘못된 일일까요?

그 첫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와 같은 제도를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시대의 교회들은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중에서 감독들, 즉 장로들은 항상 복수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1:1). 다시 말해서 한 지역교회 안에 단 한 명의 장로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각 지역교회마다 여러 명의 장로가 있었습니다. 성경역사가들은 성직자 제도가 2세기에 생겨났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합니다. 성직자 제도는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둘째로, 성직자 제도는 일반적으로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의 은사가 교회에게 주어진 목적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이와 같은 은사들의 역할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것입니다( 4:12).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의 봉사는 신자들의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신체가 성장하고 개발되고 성숙해지려면 각자의 모든 지체가 각자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에베소서 4:11에 나와 있는 은사들의 역할은 성도들을 세우되 자기 역할을 다하는 성숙한 지체가 될 때까지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역교회에서 한 사람이, 가르침과 전도를 모두 책임질 때에 사람들이 그 한 사람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며 주님을 중심으로 모이지 않을 위험이 항상 존재합니다. 게다가 그 사람이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은 바로 그 사람의 설교에 끌리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그 사람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떠한 이유로 그 사람이 떠나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으며, 설혹 그렇지 않을지라도 그들은 종종 다른 곳으로 유리(流離)하거나 은사를 가진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18:20). 우리는 그분의 임재에 이끌려 나와야지 사람에게 이끌려 나와서는 안됩니다. 믿는 자들이 다 이와 같은 원칙에 따라 행동할 때 지역교회는 사람들이 떠나는 일로 인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는 힘과 안정과 결속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봉사는 다양한 가르침을 제출할 수 없으며, 이것은 성령님이 여러 사람을 통해서 자유롭게 말씀하실 때에라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 정확한 가르침에만 관심을 쏟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균형잡힌 음식물을 공급하는 일에도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이것에 대한 성경의 지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고전 14:29).

일인 목회가 지역교회 안에서의 은사 활용을 억누르는 일은 너무나 흔합니다. 어떤 사역자들은 대부분의 일을 자기들한테만 한정하려고 고집하며, 다른 사람이 자기 영역을 침범하면 분개합니다. 그러나 설혹 이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 사역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참여를 바라고 있다 할지라도 성직자 제도, 그 자체가 소위 평신도라 불리는 사람들을 위축시켜 하나님께 부여 받은 은사들을 활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일인 목회자가 지역교회로부터 봉급을 받게 되면 멧세지에 물을 타고픈 교묘한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회중이 일군의 봉급을 통제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가르침 받지 못하는 현상을 종종 빚고 있습니다.

성직자 체제 속에도 복음을 신설하게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그리스도의 양들을 치려고 애쓰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고 계신 것도 인정합니다.

또 우리는 많은 일인 목회자들이 성직자로 구별되려는 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들은 가능한한 모든 방법으로 성도들을 돕고자 하는 진실한 소원을 가지고 있으며, 본을 보임으로써 인도하고자 하고 하나님의 유업을 주장(主掌)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직자가 아닌 사람이라도 성직자로 구별되려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를 들면, 요한삼서 9~11에 나오는 디오드레베는 한 지역교회에서 폭군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제도는 근본적으로 비성서적이며, 잘못된 제도라는 것은 여전히 사실대로 남아있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유지되는 한 세상은 결코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법으로 복음화되지 않을 것이며, 교회가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세워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성령님의 주재권(主宰權)

각 지역교회가 반드시 유지해야 하고 실천해야 할 또 다른 중대한 진리는 성령님의 주재권입니다( 14:16,26). 이 말은 성령님이 이 땅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표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기도와 찬양과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필요를 따라 그분이 선택하시는 종들을 통해 자유로이 말씀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4:26에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집회에 관하여 하나의 그림을 보게 되는데, 그 집회에서 성령님은 다음과 같은 자유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이와 같이 성령님이 자유롭게 인도하실 때 가르침과 전도와 예배와 중보기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의식이나 예배식이 도입되므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사역이 크게 소멸되어 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인쇄된 기도문들을 사용하는 것, “교회 달력위에 인쇄된 어떤 특정한 날들을 위해 판에 박힌 멧세지를 사용하는 것, 규정된 의식의 규정된 순서를 조금의 편차도 없이 따르는 것, 이와 같은 일들은 지역교회의 집회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속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성령님을 소멸시키는 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집회에서 인간이 만든 규칙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떡을 떼기 전에는 말씀 시간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또는 집회 시간이 어느 일정한 시간을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또는 기도하거나 찬양할 때는 반드시 앉거나 서야 한다는 불문율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규칙들은 자연스런 예배정신을 소멸시키고 사람들을 결국 형식주의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해서 사람을 위반자로 만드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영적으로 어린 어떤 성도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죽어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가정합시다. 그는 이것 때문에 책망을 받아야 할까요? 우리 모두는 성부 하나님이 죽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 어린 성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공적으로 참여하는 일에 다른 사람을 의식한 나머지 서투르게 표현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머뭇거리면서도 처음, 공적(公的)으로 드리는 그의 예배를 부끄럽게 해야 할까요? 조금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진실한 찬미를 듣는 것이 전혀 듣지 않는 것보다 더 낫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성령님이 어떤 일정한 주제를 따라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가 그 주제와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찬송을 선택했다고 가정합시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 형제를 난처하게 만들어야 할까요? 오히려 우리는 그 형제가 충분히 성장하면 집회의 주제와 성격에 맞게 찬송을 선택하게 되리라는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향한 그 형제의 애정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그 찬송을 그대로 부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집회가 끝난 후에 그 형제를 세워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의 마음과 이해심과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그 형제의 서투름을 판단해 주는 것도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어떤 형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만일 어떤 형제가 성령으로 찬송을 선택하지 않았음이 분명할 때 형제님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것을 성령으로 부르겠습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성령님에게 합당한 자리를 내어드리려고 노력할 때 그 분을 소멸시키거나 또는 자연스럽게 꾸밈없는 예배를 손상시키는 규칙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 다음 호에 계속-

 

(1988 3월호)

 

'횃불 > 1988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세  (0) 2012.12.12
사람을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  (0) 2012.12.11
불의 심판  (1) 2012.12.11
당신의 사고방식을 바꾸세요(2)  (0) 2012.12.11
그리스도인의 성장지침(6)  (0) 2012.12.11
불가능한 일들  (0) 2012.12.11
순전하고 신령한 젖(6) - 기도  (0) 2012.12.11
미루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0) 2012.12.11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