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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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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11. 14:48 횃불/1989년

바리새인

제임스 허치슨

이 글에서 저는 주님의 백성들을 바리새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자녀들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조심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4:11).

바울은 그릇 행하고 있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라고 일컬었는데(고전 15:58),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처럼 되는 것을 경고하셨는데 이 글에서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시편 28편에서 다윗은 자기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이 되지 않기를 기도했는데 이것을 고려해 볼 때 다윗에게도 같은 생각이 있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그는 그러한 자들 중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자들처럼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주께서 그러한 사항을 경고하셨다면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엄숙한 교훈을 받아 바리새인과 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죠오지 고울드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유화(油畵)와 같은 사람들이어서 멀리 떨어져서 보면 더 잘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너무 가까이 가지는 않을 것이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접근하여 그 위험성들을 보고 힘써 피해야 합니다.

바벨론 유수(幽囚) 이후의 선지자들의 사역이 끝나면서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한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타락과 바벨론에 속한 것들을 개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배워 그것을 엄밀하게 지키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준수하고 두 번 다시 하나님과 그분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강구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원래 그들의 동기는 좋았었지만 그 결과는 다음에서 살펴보는 대로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참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이 모두가 다 외식하는 자들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외식하는 자들이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들을 혹독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로는 어떤 사람들은 이 부류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바리새인이요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었던 바울은 물론 외식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추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역시 미혹 당한 자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가리켜 주 예수님께서는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언가 아는 것처럼 이야기 하고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려고 열심을 내었던 그들은 미혹을 당한 자들이었으며, 또한 다른 사람을 미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시고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계몽시키려고 무리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데 마태복음 23:2-3이 그 해답을 제공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다시 말해서 그들은 선생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그들 자신은 그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행위는 어떠했을까요?

 

[1] 그들은 자기 자신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을 신뢰하는 것과 더불어 시작되며, 또 그러기를 계속하라는 권면의 말씀, 다시 말해서 여호와(주님)를 영원토록 의뢰하라는 말씀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자기 자신을 믿었으며, 자신만만했으며,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으며, 항상 자기가 옳다고 생각했으며, 자기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온전치 못한 자들이다라고 말하는 구원받은 바리새인들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2] 그들은 다른 사람을 멸시했습니다.

헤롯도 주 예수님을 멸시했으며,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14:2). 우리 자신을 살피게 하는 의미심장만 말씀들이 로마서 14: 10,12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씀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깊이 숙고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다른 사람을 멸시한 것은 죄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이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욥의 친구들도 이 때문에 어려움을 당했으며, 비슷한 태도가 이사야 65:5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자칫하면 바리새인과 같이 되기가 쉽습니다.

 

[3] 그들은 상좌(上座)를 좋아했습니다.

집회 시간에 지역교회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앞자리에 맞게 하는 것은 잠시 어려운 일이며, 이런 현상을 우리는 여러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 늦게 오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스스로 뒷좌석이 아닌 다른 곳에 앉음으로써 손님들을 불편하지 않게 해드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정중히 문안하기를 기대 했으므로 높은 지위를 추구했습니다. 사단은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한 이 약점을 이용하여 너희가····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3:5). 이것은 누가 크냐?”라고 변론했던 제자들 사이에서도 역시 끊임없는 다들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디오드레베는 이런 면이 어찌나 두드러졌든지 심지어 요한과, 복음 안에서 수고하는 다른 일꾼들을 교회로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요삼 9-10).

만일 여러분이 디오드레베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글쎄요····진리에서 이탈하는 일이 흔한, 어두운 때인 만큼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나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을 신중히 분별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죠.” 하지만 그는 인간은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그의 마음을 간파하시고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라고 말씀하신 하나님만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여러 곳에서 오랫동안 주님을 공적으로 섬기고 난 후에 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

교회와 교회 사이, 주님의 종들 사이, 지역교회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중에서 많은 문제의 원인이 바로 이 지위 추구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는 바리새인과 같은 가식이 종종 있으며, 그들은, 자기들은 세우고 다른 사람들은 무너뜨리려고 과부의 가산(家産)을 삼킵니다.” 그들은 가식적으로 길게 기도하며”, 많은 사람들이 근엄한 얼굴로 지혜롭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으뜸되기를 좋아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빌립보서 2:1-8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어떠한 책망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참으로 바랍니다!

 

[4]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동했습니다( 23:5).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며”,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배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나팔을 불며”,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에더샤임(Edersheim)은 말하기를, 월요일과 목요일은 예루살렘의 장날이었는데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얼굴을 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 때였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나팔을 불지 말라”, “은밀한 중에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너는 금식 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여기에서의 강조점은 허식(과시)이 아니라 진실에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라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전도하거나 가르치거나 기도하거나 구제하거나 교제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던사람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거짓된 것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수양회의 기도집회가 끝난 후에 필자는 어떤 일군에게, 아까 그가 드린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인지 혹은 다른 형제들이 들으라고 드린 기도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지체없는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저에게 말하기를 제가 그런 식으로 기도를 드리면 기쁘다고 하더군요. 아까 기도집회 자리에는 그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5]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열심으로 인해 성도들이 죄인들의 구원받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도움받는 것을 보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숫자를 늘려 영향력을 더 크게 하려고 그렇게 했으며, 만일 교인 하나를 얻으면 그들보다 더 악한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때때로 추종자에 불과했던 사람이 자기 지도자들보다 더 심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한계를 그을 줄 알기도 하는데에 비해 추종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침례요한은 열심히 수고하며 전도하는 사람이었지만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나 혹은 당파를 만들려고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35-39절을 보면 오히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자기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돌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위대한 전도자이자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었던 바울은 그 위험을 예견했습니다( 20:30).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는데 고린도교회는 바리새인적인 정신으로 편만해 있었으며, 사도바울은 3-4장에서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어떤 사람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개척정신을 좋아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저는 아볼로의 웅변과 재능을 좋아합니다.” “저에게는 베드로의 율법성이 매력을 주는데요.” 그러나 그들의 모든 지식과 재능, 그리고 취사선택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뜻깊은 말을 했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6] 그들은 더 중요한 것들을 버렸습니다( 23:23).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박하와 회향과 근채만을 요구하셨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것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만 그들은 의()와 인()과 신()은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 중에서 어떤 말씀은 더 중요하고 어떤 말씀은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유익하니”(딤후 3:16), 우리는 어떤 일의 한 쪽에만 치우쳐 편파적으로 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가련한 마음은 어찌나 거짓된지 이런 연약성을 거의 자각하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르기를, 제사도 좋은 것이지만 순종이 더 낫다는 뜻으로 말했습니다. 이사야 1-11장과 16-17, 그리고 미가 6:6-8도 역시 중요한 교훈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습니다. , 재능과 지식, 웅변, 너그러운 구제, 심지어(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만한)확신조차 좋은 것이긴 하지만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온갖 은사와 재능, 그리고 이것, 저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와중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살피게 해주셔서 우리가 바리새인이나 고린도 사람들처럼 더 중요한 것들을 버리지 않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7]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켰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어찌나 비판적이고 신랄한 태도를 취했던지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도, 즉 다른 사람의 티는 빼내면서도 약대는 삼켰습니다.” , 자기 눈에 들보는 여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8]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것을 더했습니다( 15:9).

유전(遺傳, 전통) 중에는 좋은 것들이 있으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그 유전을 지키는 것을 칭찬했습니다(고전 11:2, 살후 2:15).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과 매우 달라서 하나님의 말씀에다 인간의 생각들을 첨가시켰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이고 지켜야 하며, 말씀을 덜 순종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완성된) 말씀에 무엇을 더하는 행위입니다( 22:18-19).

이브는 그런 일을 행함으로써 커다란 재난을 초래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계 역시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해옴으로써 얼마나 많은 혼란을 자아냈는지 모르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진리가 흐려지고 인생들이 흑암 가운데 살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믿는다고 하는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지도자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그처럼 많은 분쟁과 슬픔을 가정들에게 갖다 주고 있으며, 세상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의 교회에 속해 있는 우리도 그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어떤 하나님의 진실한 종은 감독하는 위치에 있는 형제들에게, 그들의 행동들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요청했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성경 말씀이 필요 없어요. X X 기독교지의 X X 페이지를 살펴보세요. 그게 우리의 권위 있는 근거죠.”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합당한 말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유익한 기독교지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이 있지만 편집자가 누구이든, 필자가 누구이든 간에 어떠한 기독교지도 교회들의 대변자나 또는 기관지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전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최고법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위한 것이며, 여기에 인간의 유전(전통)을 첨가해서는 안됩니다.

루터(Luther)와 녹스(Knox), 다아비(Darby), 그 외 다른 많은 선조들을 세상 종교의 흑암과 죽음에서 구원한 것은 영혼들을 밝히며, 구원하는 능력을 지닌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개방적인 눈을 가진 사람이나 보수적인 눈을 가진 사람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살펴보면서 자기가 바리새인과 같이 되지 아니하고 날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을 더욱 닮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주님을 곧 뵙게 될 것입니다.

 

(1989 7,8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