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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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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27. 07:41 횃불/1992년

저주아래 있는 거짓 기독교인들이여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갈라디아서 3:10).

하나님께서 아담을 저주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을 저주하시겠는가? 만약에 인생에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인생이 스스로 저주 아래로 걸어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저버리고 자기의 고집과 욕심에 잡혀 저주 아래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필자는 수없이 보아왔다.

한 영혼도 멸망의 지옥에 빠지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의 모습을 생각할 때 저주를 스스로 취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을 생각하며 가슴 아픈 심정을 억제할 수 없다.

창세기 3 17절에 저주라는 단어가 최초로 사용되고 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 때에 하나님은 아담을 저주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야 하는 인생에게 고통은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만드신 그 아름다운 동산과 좋은 과일들이 화염검에 의해 막혀진 채 그들은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내보내는 하나님이나 쫓겨나는 인간이나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웠겠는가! 슬프다 인생이여!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을 스스로 범하고 고통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으니····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에 대 한 기사가 있는데 가인의 경우는 저주 아래 있는 죄인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가인은 저주 아래 있었다. 그는 저주를 받은 바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한 사람을 한두 번 잘못했다고 저주하시므로 죄인의 회개할 길을 막으셨는가? 그렇지 않다. 가인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쉽게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가인은 아벨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다. 이에 대해 어떤 설교자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사랑이 부족하여 받지 아니하였다고 하는데 이 얼마나 우매한 소경 목자인가! 이러한 소경들에 의해서 오늘날 기독교는 점점 더 썩어져 가는 것이다. 그러면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는가? 그것은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의 방법, 즉 진리 와 관계없는, 진리를 떠난 제사였기 때문이다.

가인이 알아야 했던 진리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기록이 창세기 3 21절에 나오고 있다. 사실 이때까지 아담 하와는 무화과 잎으로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워보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햇빛만 나면 말라버리는, 또는 저절로 말라 소멸되어 버리는 무화과 잎으로는 수치를 가리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아담에게 가죽옷은 지독한 가뭄에 소나기만큼이나 기쁜 일이었다. 이것은 신약의 구속의 복음인 바 가죽옷을 짓기 위하여 죽은 양은 예수님의 속죄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요한복음 1:29, 히브리서 9:12). 이제 양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므로 인간의 죄는 가리우고(용서) 하나님 앞에 경배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진리가 그의 아들에게도 전수된 것이다.

아벨은 이러한 가르침을 순종하고 양의 피흘림으로 제사를 지냈으나 가인은 자기의 생각대로 진리를 거스리고 피없는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진리를 불순종한 가인의 제사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가인은 즉시 하나님께서 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셨는가를 깨닫고 회개했어야 했던 것이다

이 제사의 의미는 피로 말미암은 구속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바 이 복음의 진리를 거스리고 다시 구원받을 길은 없다(사도행전 4:12).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는데 피흘림의 진리를 거부하고 뉘우치지도 아니 한 자에게 무슨 구원의 길이 있겠는가!

가인은 오히려 안색이 변하고 불만을 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인에게 안색이 변함을 지적하고 두번째 회개할 기회를 주고 있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을 쳐 죽이므로 이 하나님의 충고와 깨우침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며 회개할 기회를 주고 있으나 그는 아벨의 일을 모른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속이려 하고 있다 이제 가인은 모든 회개할 기회를 다 버리고 끝까지 거역한 죄인의 길을 걸어가므로 저주 아래로 들어간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11절에서 저주받은 가인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살펴보면서 다음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으로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로마서 2:4,5).

회개를 거부한 죄인이 저주 아래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성경에는 저주에 해당되는 단어로 표현된 죄인의 모습들이 여러 군데 나온다. 그 중 몇을 살펴보면

 

첫째, 이사야 1 4절에 행악의 종자요하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돌이키지 않으면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가리키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요한복음 8 44절에 보면 인간은 누구나 마귀자식으로 출생하였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귀 자식은 마귀를 따라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때 저주 아래서 빠져 나오게 된다.

이 사건을 성경은 거듭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십수 년을 거듭남의 경험없이 교회당 문턱만 밟고 다니며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다닌다 하여도 근본적으로 종자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죄악의 씨앗이 죄인의 영혼을 주관하고 있는 한 저주 아래 있는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지옥 자식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교회의 중책을 맡고 있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신앙은 흉내 내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에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행악의 종자요 사단에 속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새종자)으로 새롭게 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6:4).

필자는 수많은 기독교인 중 열심인 사람들이 새 생명으로 태어난 경험 없이 하나님의 자녀 행세하느라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하고 있다. 그들을 상담하여 보면 대부분 예수 믿는 것을 힘들어 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조직과 사람(목사)의 권위에 눌려 겁먹은 표정으로 억지로 붙잡혀 끌려가고 있다. 힘들어 하는 이유는 흉내 내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분명 이것은 아닌데” “무엇인가 오늘의 기독교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은 하지만 달리 묘책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 상태에 대해서도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문제의 핵심을 진단할 수 없으니 포기한 상태로 현실에 적응하면서 끌려가고 있다.

, 불쌍한 죄인들이여!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으시라. 근본적인 변화를 입으시라.

 

둘째로 저주로 표현된 죄인의 모습은 이사야 1 4절의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다. 행악의 종자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니 당연히 그들의 생활의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 되는 것이다.

행위의 부패함은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바 첫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순종하고자 하는 양심이 없다.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고자 무릎을 꿇기보다는 사람의 가르침과 교훈만 맹종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금세기의 기독교가 천주교에서 개혁하였다고는 하나 그들의 생각과 가르침을 비슷하게 따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은 특정인 즉 사제들만 보고 풀어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며 일반인들은 함부로 성경을 풀거나 가르치면 안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상을 이어받아 그들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은 특정인(목사, 전도사 등)에게만 가르침 받아야 하는 것이며 평신도가 해석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가르친다(금일에 변화된 교회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긴 하지만). 물론 성경내용 중 풀기 어려운 부분이나 함부로 해석하기 위험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그런 것처럼 가르쳐 마땅히 읽고 깨닫고 순종해야 할 성경을 교인들과 떼어놓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 결과 오늘날 수많은 기독인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따르나 실제는 사람을 따르며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사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행위가 부패함은 사단을 따르는 그들에게서는 자동적으로 부패한 행위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 중에서 차라리 믿는다고 말하지 아니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 사람도 수없이 만나 보았다. 필자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길거리나 가게나 직장에서나 믿는 놈들이 행실이 틀렸다” “신자가 욕심은 더 많다····나쁘다등 비판의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었을 줄 안다. 왜 이와 같은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필자자신부터 본래 행실이 훌륭하고 태어날 때부터 성품이 온화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기독인인가?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다. 필자자신도 성격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기타 여러 면에서 너무도 허물이 많고 문제가 많은 사람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필자가 이웃에게 몹쓸 사람소리를 듣지 않고 살고 있다면 그것은 필자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거저 받은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변화된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내 안에 거하므로 성령에 의해 다스리심을 받는 삶이 필자를 죄악의 구덩이에서 건지고 허물의 거름더미에서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길 터인즉, “오늘날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변화되지 못하고 비방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맞다. 필자도 그런 경우를 수없이 목격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거짓 성령은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거짓 영이 사람의 생각과 생활을 일시적으로 변화시키므로 그리스도인처럼 꾸며서 한때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처럼 행세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은 주님에 게만 있는 것이다(고린도후서 5:17).

세상에 못되고 더러운 죄악의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을 섬기노라고 간증했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결국 세상의 죄에 다시 빠진 경우를 보아왔다. 중생의 경험 없이 거짓 성령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나라의 의와 관계도 분깃도 없는 거짓 영을 받은 거짓 신자일 뿐이다. 이러한 거짓 신자가 대부분인 한국의 교회들을 슬퍼하고 있는 필자에게 잘못이 있을까? “믿는 놈들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는 거짓교인들을 세례교인 삼을 뿐 아니라 시키는대로 열심히 맹종하고 물질적으로 잘 헌신하면 중요한 직 책도 서슴없이 맡기는 기독교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중심의 신앙심이나 변화된 생활보다는 외모를 취하는 이러한 잘못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행악의 종자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을 낳을 것이요 그들은 저주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니, 그들을 위하여 저주의 지옥 불이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는 슬퍼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제 본문 서두에 있는 갈라디아서 3 10절을 중심으로 잘 믿는다고 하면서 어째서 저주 아래로 들어가는가 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하여 보고자 한다. 10절의 말씀을 잘 분석하여 보면 그들은 율법의 행위에 속하였기 때문에 저주 아래 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아니한가! 도대체 율법의 행위로 완전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의로워지고 천국갈수 있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나오고 있는가? 성경에 행위의 완전함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 데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도 오늘날 필자가 만나본 수많은 기독인들이 행위가 부족한데 대해서 그토록 떨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교인들을 만나 상담할 때 마태복음 25장의 열처녀 비유 중 어리석은 처녀가 기름 준비를 못하여 잔치에 참여치 못하였는데 집사님은 기름준비 다하셨습니까? 하고 질문하면 열명 중 아홉은 제가 부족해서····하고 말끝을 흐리고 있으니 울분이 터지지 아니 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기름 준비도 안된 사람에게 무슨 세례를 주며 집사, 장로를 맡긴단 말인가! 기름 준비가 되지 못하였으면 지옥의 형벌이 눈 앞에 있으니 이 문제부터 풀어야 할 것이 아닌가! 도대체 부족해서 구원받지 못하였다는 것이 무슨 궤변인가! 부족하니까 구원받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수영 잘하는 사람은 잘하니까 물에 빠져도 구원(구출)이 필요 없겠지만 수영 못하는 사람(부족한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치 아니한가! 이러 한 웃지 못할 희극이 기독교인들에게 만연된 것은 바로 수많은 한국의 교회들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의 저주 아래로 몰아 넣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가? 죄로 말미암아 죄의 늪에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죄인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예수님은 이제 당신의 죄짐을 다 지셨다. 당신이 책임져야 할 죄는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대신 책임지셨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9:30). 이것을 대속(代讀, 대신할 ’, 죄속할 ’)이라 하며 당신의 죄를 대신 속하셨다는 뜻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주여 감사합니다. 나의 죄를 이미 용서하셨으니 나는 오늘부터 죄인이 아닙니다. “ 이 한 마디를 외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중심으로부터 이렇게 깨닫고 외쳤다면 당신도 구원받은 것이요 거듭난 것이며 기름 준비한 것이다. 당신이 지옥으로 가야 할 이유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당신의 종교적 노력과 열심으로 죄를 해결하려는 것은 당신 스스로를 저주 아래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이요, 예수님의 거저 주시는 속죄의 십자가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당신을 저주의 지옥에서 건지는 것이다(갈라디아서 3:13). 문제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당신의 행위를 의지하고 지옥에 가는 것과 예수님의 행위(십자가의 속죄)를 의지하고 천국에 이르는 길이 당신 앞에 놓여 있다. 가인은 자기 행위(자기 생각대로의 제사)를 선택하였으나 아벨은 피(예수님의 피)를 선택하였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복음 6:4).

 

(1992 3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