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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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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3. 14:33 횃불/1992년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간증

바르나르도 고아원의 창설자

바르나르도

 

영국 왕립 의과대학교의 평의원이자 왕립 지리학회의 회원이었던 T. J. 바르나르도(Barnardo)박사는 고아들의 친구였으며, 그가 설립한 고아원”(Homes)은 무려 11,000명이 넘는 고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구원간증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습니다.

『어린 바르나르도는 유아()시절에 더블린의 성()() 앤드류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습니다. 그의 부친은 그 성당의 임원이었고, 모친은 그 성당의 회원이었습니다. 그는 이 성당의 주일학교에 다녔으며, 15세 때에는 더블린의 대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았지만 이런 의식들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습니다. 궤이커 교도들의 전통을 지니고 있던 모친의 경건한 본이 그에게 항상 존경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견진성사의 의식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던 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그는 확신 때문이 아니라 외부의 강요에 못이겨서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형식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때쯤 그는 기독교보다 오히려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더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견진성사를 받기 전 1년 동안 그는 회의적인 견해를 말하고 다녔으며, 그 후 거의 2년 동안 철학자 볼테르(Voltairs), 루소(Rousseau), 페인(Paine)을 주로 숭배했던 것입니다. 이런 저술가들이 그 대륙의 급진적인 개혁자들에게 어떠한 자극을 불어넣었던지 간에 어린 바르나르도에게는 단지 냉소적이고 건방진 태도만을 심어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중생(重生)의 모든 능력을 의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당시 아일랜드는 부흥의 물결에 휩싸여 거듭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겠노라고 헌신했습니다. 이와 같은 각성은 1859년경 멀리 북부에서 시작되어 이듬해에는 벨파스트까지 확산되었으며, 그 영향은 자못 켰습니다. 그리고 노도(怒濤)와 같은 영적 능력은 남부로 하강하여 급기야는 더블린으로 넘어가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전에는 서커스 공연장으로 쓰이던 메트로 풀리탄 홀이 그 활동의 본거지였으며 , 다른 지역에서도 보조집회들이 열렸습니다. 이 열화(熱火)같은 역사(役事)가 확산되면서 바르나르도의 가족 중 여러 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며, 여기에는 톰의 두 형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이 중 한 형은 나중에 의사가 되었고, 다른 한 형은 인도의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이 형들은 새로 찾은 기쁨을 톰에게 이야기 해 주고 그의 생애를 그리스도께 헌신하도록 간곡히 권했지만 그는 여전히 비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스스로 분별해 보겠다고 응락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놀라운 영적 능력을 목도하게 되었지만 이미 그의 선생들은 종교적인 체험들을 교묘히 설명하여 무시해 버릴 수 있도록 교활한 반증들을 그에게 주입시켜 놓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감정적인 히스테리가 아닐까? 부흥의 결과들은 심리적인 현상에 불과하며, 오래가지 않을지도 몰라. 소위 새로 성도들이라고 선언된 사람들이 옛날의 죄로 돌아가는 것을 보라.’

하지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그의 마음 속에는 석연치 않은 것이 있었으며, 사태가 다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갈등이 너무나 심했으므로 그는 이것을 피하려고 가정에서 열리는 소집회에 자기 형들과 함께 참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윌리암 프라이(William Fry 경의 부친)의 가정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면서 그는 그리스도께 자신의 생애를 헌신하라는 권고를 받았지만 모두 허사였고, 그의 냉소적인 태도는 여전히 기세등등 하기만 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영적인 능력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것을 목격 했지만 그때는 이미 이전의 선생들이 종교적인 체험을 교묘하게 논박할 수 있는 반론들을 그에게 가르쳐 놓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프라이 씨에게 발송된 편지 속에는 바르나르도가 이 집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집회에 참석했으며, 그 집회에서 로체포오드 헌트(Rocheford Hunt)가 저에게 말씀하셨으며 선생님도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주 형편없이 행동했지요. 여느 젊은이가 하는 것처럼 건방지게 굴었으며,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선생님이 저를 보고 이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저 젊은 녀석을 나에게 5분만 맡겨 놓는다면 그의 자만심을 늘씬하게 꺾어 줄텐데.’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은 무척 친절했으며, 제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지요.

바르나르도의 회상은 의미심장합니다. 윌리암 프라이의 가정집회는 시작이었습니다. 그 날부터 의심이 그의 마음에 침투해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불가지론적인 신조를 점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우월감은 엉터리에 불과한 것일까? 내가 비웃는 사람들이 옳고 나는 틀렸단 말인가?’

이제는 가정 집회에 규칙적으로 참석하게 되었으며,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부흥 속에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많은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프라이의 가정에서 그런 경험을 가진지 몇 주 후에, 그는 한 때 비극작가였던 죤 햄블톤(John Hambleton)의 예리한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하나님을 발견할 때까지는 평안과 능력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르나르도의 한 형은 햄블톤의 설교에 대하여 그것은 전환점 이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날 밤 자정이 훨씬 지났을 때 영혼의 큰 갈등을 겪으며톰은 형들의 침실로 들어 갔으며, 이 사건에 관하여 그 형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줄줄 흘렸어요. ····왜냐하면 마음의 고통을 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세 형제는 함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간구를 은혜로 들어 주셨으며, 바로 그 때, 거기에서 빛과 기쁨과 평안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일어났습니다.”

이 일은 그의 17번째 생일이 되기 5주 전 1862년 5월 26 있었으며, 하나님의 광채는 이와 같이 그에게 계시되었던 것입니다. 그 날 거듭난 후로 바르나르도는 웨슬리(Wesley), 월버포오스(Wilberforce), 세프츠베리(Shaftesbury)처럼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바르나르도의 고아원은 13,000명 이상의 고아들을 수용했으며, 그 창립자는 갔지만 그 사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1992 7,8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