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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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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7. 09:27 횃불/1992년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 사랑의 영속성과 은사의 일시성 -

 

“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8~11).

 

(이 부분에 관하여는 성경적인 강해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그 중에서 좋은 견해라 생각되는 두 종류를 선별하여 제시하오니 판단과 교훈은 독자들 나름대로 내리시기 바랍니다-역주).

 

1. 성경의 완성을 온전한 것으로 보는 견해

 

사랑의 영속성(永續性)

13:8 자신의 은사를 사랑 가운데서 행사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묘사하고 난 후에 그 사도는 이제 사랑의 영속성(永續性)과 은사의 일시성(一時性)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주님을 사랑할 것이며, 또 여전히 서로 사랑할 것임을 감안할 때 사랑은 영원토록 계속될 것입니다. 반면에 다음의 은사들은 일시적으로만 지속됩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 구절들에 관해서는 주로 두 가지의 해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여기에서 영원의 상태만을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사랑은 영원히 계속되는 반면 은사는 오직 이생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가 동의하는 또 다른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원래 그 기적적인 은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문서 형태로 완성되기 전 초대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고 믿습니다. 오늘날의 신약성경이 없던 당시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분은 자기 메시지를 표적(表蹟)과 기사(奇事)로 확증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여기셨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그 기적적인 은사들이 하나님 말씀의 완성과 더불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상고하는 단락 속에는 이것에 관한 강력한 암시가 숨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13:9 바울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는 초자연적인 지식이 여러 사람들에게 주어졌으며, 예언의 은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든 그것은 기껏해야 부분적인 지식이었고, 부분적인 예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3:10 이미 말씀드린대로 이 구절은 천국의 상태를 언급하는 것으로 대부분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강해자들은 이 견해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문맥에 가장 어울리는 의미일까요? 바울은 여기에서 천국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문서 형태로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이 사용 가능케 된 때를 말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후자의 견해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온전한 것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즉 완성된 성경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일이 끝나자 부분적으로 하던 것, 즉 기적적인 은사들은 폐해졌을 것입니다.

13:11 고린도 사람들은 기적적인 은사들을 마치 어린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자신의 오락과 기쁨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유치한 것들을 벗어버리고 더욱 어른다운 태도를 취하라고 권면합니다.

13:12 여기에서 바울은 부분적인 계시의 시대를 장차 임하기로 되어 있던 것과 비교합니다. 그가 기록하는 대로 그것은 마치 불완전한 거울로 사물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계시는 부분적 이었고 미완성 상태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주어지자 그것은 마치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계시를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당시의 지식은 부분적이었지만 신약성경의 완성과 더불어 더욱 충분한 지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12절은 우리가 완전한 지식을 갖게 될 것이다는 의미로 취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전지하시며, 이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혹 이 구절을 천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일지라도 우리가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희미하고 불분명한 지식과 분명한 지식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우월성(優越性)

13:13 은사와 견주어 볼 때 사랑은 영원할 뿐만 아니라 믿음과 소망이란 덕목(德目)들보다 더 우월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기독교의 특성인 주요 도덕 원칙들을 수반합니다”(켈리).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어떤 의미로 믿음과 소망은 단지 이생을 위한 것들입니다( 8:24, 11:1, 고후 5:7). 그러나 또 다른 의미로는 믿음과 소망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하나님을 믿고 또는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할 것이며, 우리는 언제까지나 더 많은 축복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목적들과 약속들이 성취되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사랑은 여전히 우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소망이란 덕목들은 특히 우리 자신과 관계 있는 반면, 사랑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람은 그 미덕들 중에서 제일이라고 일컬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음과 소망은 그것이 아무리 귀중하다 할지라도 특히 믿는 자 자신과 관계 있습니다. 믿음은 영혼을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며, 하나님과 화평케 하고, 천국으로 가는 길을 얼어 줍니다. 소망은 장차올 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고대하게 하고, 눈에 보이는 많은 사항들이 낙담시킬지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함으로 위로를 얻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유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뛰어난 미덕입니다. 그것은 선행과 친절의 원천이며, 전도단체와 학교, 병원의 뿌리입니다. 사랑은 사도들로 하여금 영혼들을 위하여 자신을 허비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랑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꾼들을 일으키고, 그들로 계속 일하게 합니다. 사랑은 언쟁을 누그러뜨리며, 분쟁을 그치게 하고, 이런 의미에서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벧전 4:8). 사랑은 기독교를 아름답게 치장하고 세상에게 천거해 줍니다. 어떤 사람이 참된 믿음을 소유하고 그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의 믿음이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소유한 사랑은 결코 숨겨질 수 없는 것입니다”(J. C. 라일).

 

2. 영원한 천국의 상태를 온전한 것으로 보는 견해

 

은사는 일시적임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바울은 사랑의 영속성(永續性)을 세 영적 은사인 예언, 방언, 지식의 비영속성과 비교함으로써 사랑이 최상의 본질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 각 은사들은 결국에 가서 떨어지고 사라질 것이지만 사랑은 계속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 은사는 언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 은사들이 중지되는 때와 연관 지어 두 종류의 다른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예언과 지식은 폐해질 것인 반면, 방언은 그칠 것입니다.

폐해진다라는 단어는 카타르게오(Katargeo)라는 원어에서 온 것인데, 이 원어는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 또는 폐지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8절에 두 번 나온 폐해진다라는 동사나 10절에 나온 폐해진다라는 동사는 수동태로 되어졌습니다. 이것은 곧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이 그 은사들을 중지시킬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은 온전한 것이 오는 때입니다(10).

아래에서 논해진 바대로 그치다라는 단어는 파우오(pauo)라는 원어에서 온 것인데 이 원어는 중지하다, 끝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동사는 카타르게오(Katargeo)와는 달리 중간태(中間態, middle voice)의 헬라어로 되어졌는데 이것이 사람에게 사용되면 의도적, 자발적 행동을 가리키며, 무생물에 관하여 사용되면 재귀적(再歸的, reflexive), 자인적(自因的, self-causing) 행동을 가리 킵니다. 그 원인은 내부에 붙박아 넣어져 있기 때문에 내부에서 옵니다. “그 은사는 스스로 중지할 것이다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방언의 은사는 마치 건전지처럼 제한된 전력과 제한된 수명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한계에 이르렀을 때 자동적으로 활동을 중지했습니다. 예언과 지식은 외부의 무엇인가에 의해 중지될 것이지만 방언의 은사는 스스로 중지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용어들에 있어서의 이 구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은사들이 과연 언제 그리고 어떻게 중지될(중지할)것이냐입니다 예언과 지식은 온전한 것이 올 때중지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9,10). 온전한 것의 정체와 시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9,10절을 강해할 때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방언의 중지 시기는 온전한 것의 오는 일과 무관합니다. 방언은 더 일찍 중지되기로 되어 있었으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방언은 다른 두 은사를 중지시키는 것에 의해 중지되지 않습니다. 저는 방언의 은사가 사도시대와 더불어 끝났다고 믿습니다.

첫째로, 방언은 기적적인 은사였으며, 신약성경이 완성되었을 때 병고치는 은사 및 능력(기적) 행하는 은사와 더불어 활동을 중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 행하시는 일을 결코 중지하지 않으셨으며, 오늘날에 있어서도 기적적으로 병을 고치시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다른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인간에게 기적 행하는 은사를 주신 시기가 역사(歷史) 가운데서 오직 세 번 있었습니다. 그 중 처음 시기는 모세와 여호수아가 섬길 때였고, 두 번째 시기는 엘리아와 엘리사가 섬길 때였으며, 세 번째 시기는 예수님과 그 사도들이 섬길 때였습니다. 이 각 시기는 단지 70년 정도만 지속되다가 갑자기 중단되었습니다. 이 밖의 유일한 기적 시기는 천년왕국 시대가 될 것이며, 이 기적의 근원은 내세의 능력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6:5). 신약성경의 기록으로는 하나님이 인간 도구를 통하여 직접 일으키신 마지막 기적이 A.D. 58년에 있었습니다( 28:8). 그 때부터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완성한 96년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의 기적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약의 기적 시기는 예수님과 그 사도들이 하신 말씀, 곧 이스라엘에게 천국을 제시하고 그 맛과 견본을 제공하는 말씀을 확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와 그 나라에 대하여 등을 돌리자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게되었고( 6:6) 복음은 그 때부터 이방인에게 제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은 이미 표적(表蹟)들과 기사(奇事)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빛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이스라엘에게 증거되었었습니다( 2:3,4. 흥미로운 점은 히브리서가 비록 67년 혹은 68년에 일찍 기록되었는데도 그 기자(記者)는 그 증거(ebebaiothe)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그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마치 이미 중지한 것처럼 과거 시제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은사들은 오로지 사도들에 게만 국한되었습니다.

방언의 은사가 사도들과 더불어 끝났음을 증거하는 두 번째 증거는 그 목적, 곧 이스라엘의 심판에 관한 사법적 표적(表蹟)으로서의 목적이 그 당시에 중지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켰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고전 14:21, 28:11,12참조).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명백한 언어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듣고 믿기를 거부하자 하나님이 자기를 배척한 것에 대한 항의의 교시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표적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 특히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표적이었습니다(고전 14:22). A.D. 70년에 로마 장군 타이터스에 의해 성전이 파괴될 때 유대교도 함께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으며, 오직 그 흔적만 남게 되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그 제사 제도도 파괴되었으며, 유대인 제사장들에 대한 필요도 파괴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구약의 요구사항들은 더 이상 성취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 서신서를 기록한지 15년이 경과하여 이상과 같은 파괴가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에게 하나의 사법적 표적으로 주어졌던 방언의 필요성은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이동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표적은 오늘날에도 필요 없습니다.

방언이 중지된 세 번째 이유는, 그것이 덕을 세우는 하위(下位) 수단이었다는 것입니다. 방언은 올바로 해석될 때에만 제한적으로 덕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고전 14:5,12,13,27,28).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의 일차목표는 방언이 의사소통의 하위 수단이라는 것(1~12)과 찬양의 하위수단이라는 것(13~19)과 복음전도의 하위 수단이라는 것(20~25)을 보이고자 함이었습니다. 방언은 제한적이고 하위 적으로 덕을 세웠음에 반해 예언은 모든 점에서 훨씬 우월 합니다(1,3~6,24,29,31,39).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언어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습니다”(19).

넷째로, 사도들의 권위와 교훈을 확증할 목적으로 주어졌던 방언은 신약성경의 완성과 더불어 그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방언의 은사는 중지되었습니다. 비록 방언이 때로는 이것을 말하는 사람 자신에게조차 베일에 가려진 계시였으므로 번역이나 통역을 항상 필요로 했을지라도(고전 14:27,28) 진짜 방언은 이것을 말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완성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되었을 때 이 말씀에다 아무 것도 더하거나 빼지 말아야 합니다( 22:18,19). 방언의 확증하는 목적은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로, 방언의 사용이 신약성경의 초반부에만 언급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도 방언이 중지되었다고 보는 것은 합당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신약성경에는 방언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오직 그 한 서신서에만 방언을 언급하고 있을 따름이고, 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는 그것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19 6절 이후부터는 그것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분명 히 방언은 사도시대의 종결 이전에 더 이상 쟁점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사용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떠한 서신서도 방언을, 믿는 자들의 책임으로나 영적인 활동으로 명령하거나 부과시키지 않았습니다.

방언의 은사가 분명히 중지되었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사도시대 이후로 그것은 19세기 동안의 교회 역사 전체에 걸쳐 단지 발작적으로 수상적 게 재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교부(敎父)들의 기록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또 암시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는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지 겨우 40년쯤 지난 A.D. 95년에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보냈는데 그 교회의 문제를 논하면서 클레멘트는 방언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방언을 사용하는 일이나 잘못 사용하는 일이 둘 다 이미 중지되었음이 분명합니다. 2세기의 위대한 교부였던 져스틴 마터(Justin Martys)는 당시의 많은 교회들을 방문했는데도 그의 많은 기록들 가운데에는 방언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그가 언급한 몇 가지 영적 은사목록 중에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3세기에 살았던 훌륭한 교회 학자 오리겐(Origen)도 방언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셀서스(Celsus)에 대한 논박 가운데서 명백히 피력하기를, 사도 시대의 표적 은사들은 일시적인 것들이었고, 자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표적의 은사들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신약성경 이후의 저술가로서는 가장 위대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크리소스톰(Chrysostom) 347년부터 407년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고린도친서 12장을 언급하면서 방언 빛 다른 기적적인 은사들은 이미 중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조차 없다고 기록했습니다. 어거스턴(Augustine)은 사도행전 2 4절에 관한 강해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초기에 성령님께서는 믿는 자들 위에 임하셨고, 그들은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이 방언은 그때에 맞도록 주어진 표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그와 같은 성령님의 표징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표징으로 사용되다가 사라졌습니다.”

초기 교회의 역사가들과 성경학자들은 방언이 사도시대 이후부터 중지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합니다. 우리에 게 알려진 유일한 예외는 몽타누스(Montanus)에 의해 주도된 운동권 내부에 있었는데 2세기의 이단자였던 그는 신약성경 이후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자기를 통해서 계속 주어진다고 믿었습니다.

17~18세기에 들어설 때까지는 분명히 어떤 다른 방언도 사용되지 않다가 이 때 비로소 방언이 유럽의 몇 로마 카톨릭 그룹(Cevenols and Jansenists)과 뉴우-잉글랜드의 쉐이커 교도들(Shakers) 사이에서 출현했습니다. 19세기 런던의 어빙파(Irvingites)는 비성경적 계시와 방언을 주장했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다른 기적적인 은사들과 더불어 무려 1800년이 넘도록 정통 기독교의 생활과 교훈 가운데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를 고비로 방언은 성화운동(聖化運動, the holiness movement)권 내부에서 주로 강조되기 시작했고, 그 중 많은 분량이 현대의 오순절주의로 발전되었습니다. 1960년에 시작된 소위 은사운동은 방언의 사용을 전통적 오순절주의로부터 구교(舊敎), 신교(新敎)를 막론하고 다른 많은 교파들, 교회들, 단체들 속으로 침투시켜, 참된 영적 생활의 공백을 거짓된 체험으로 메꾸고 있습니다.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현대의 방언을, 요엘이 말했고( 2:28~32)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에서 인용했던( 2:17~21) 말세의 표적의 일부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옹호합니다. 하지만 그 문단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예언이 오순절에도, 현대에도 적용되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엘 2장의 일찍부터 제시되고 있는 것은 그 때가 그리스도의 재림(오순절은 이것의 견본이었음), 곧 천년왕국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선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있기 직전(21~27, 36:23~38 참조) 주님께서 북편 군대를 너희(이스라엘)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실때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20). 하늘과 땅에서 기적적인 징조들이 발생하는 것은 그 후입니다(28).

어떤 피나 연기 기둥, 또는 해의 어두워 짐이나 달의 햇빛 같이 변하는 현상은 오순절과 전혀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현상은 현대에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오순절에 요엘의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분명히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은 자신의 설교 직전에 제 한적으로 일어났던 기적적인 징조들은 말세에있을 훨씬 더 크고 광범위한 징조들과 기사(奇事)들의 일별(一瞥)에 불과하다는 의미였습니다( 2:17). 따라서 현대판 방언의 재등장이나 또는 어떤 다른 기적적 은사들에 관해서도 성경적인 설명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또 요엘 223절의 이른 비와 늦은 비 가 오순절과 현대에 성령님이 각각 부어지신바 될 것을 예언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이른 비는 문자 그대로 가을에 내리는 비였으며, 늦은 비는 봄에 내린 비였습니다. 요엘의 요지는 단지 그 다음 구절들이 충분하고도 명백하게 보여주는 바대로(24~27) 하나님이 그 왕국에서 곡식을 풍성하게 자라게 하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세기의 성경 학자였던 죠오지 N. H. 피터즈(George N. H. Peter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순절의 그 침례(성령의 침례를 일컬음-역주)는 미래에 성취될 일에 대한 서약이며, 성령님이 다가오는 시대에 행하실 일에 대한 보증입니다. “당대의 성경학자였던 헬무트 띠엘리케(Helmut Thielicke)는 방언이 포함된 1세기의 기적에 관하여 하나님 나라의 지평선상에서 일어났던 번개였다고 묘사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1992 7,8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