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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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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6. 09:18 횃불/1993년

제단을 쌓으라(1)

O.J. 깁슨

 

이 글은 1992 8 8~ 10일까지 동대문 교회에서 강연한 내용을 지면에 옮긴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늘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섬세한 것이며 또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여러분이 아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의 하나님은, 예를 들면 석가와는 아주 다른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석가의 상징적인 상()이 어떤 것인지를 아실 것입니다. 완전히 무표정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일본을 방문하여 불교사원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부처의 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큰 줄을 잡아당기면서, 또는 종소리를 울리면서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만, 사람들이 잠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그와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문화에 있어서는 여러분의 감정을 액면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여러분의 감정이 들어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감정을 지닌 모습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은 어떤 강력한 무엇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인격적인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노하기도 하십니다. 이것은 감정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울기도하셨습니다. 이것도 감정입니다. 또한 성경은 말씀하기를 성령님은 근심하신다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영향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민감하시기 때문에 근심하시기도 하십니다. 여러분은 매일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태도에 대해서 우리 주님은 민감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 시간을 가지기를 원하는지에 대해서 주님은 관심이 많으십니다.

저는 이 사실을 제 아내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제 아내는 정말 제게 훌륭한 아내입니다. 저는 제 아내에게, 나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얘기해 주면 내가 그 기대대로 하겠노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때 제 아내의 대답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없는데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형제, 자매님들도 그 얘기가 무슨 뜻인지 다 이해하실 것입니다. 제 아내는 제가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원하는지의 문제를 통해서 자기에 대한 나의 사랑을 확인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미련하게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 내가 당신하고 결혼했잖아. 내가 그래서 월급봉투도 가져다 주고, 또 내가 쓰레기도 버려주잖아.” 그러나 제 아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 이상을 아내는 바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그저 하나의 도구와 같이 사용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사람들이 아내에 대해서 사용하는 표현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쓰는 표현에다 제가 사용하는 표현을 추가하여 표현해 보았습니다. 이 때 사역자중에 한 분이 그렇게 표현하시면 안 된다고 저에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집에 있는 사물을 가리키는 낱말이라고 그분은 이야기하셨습니다. 많은 부인들은 자기를 이렇게 사물처럼 취급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여자들이, 특히 제 아내가 제가 자기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다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같은 여인과 더불어 44년 동안 결혼생활을 해오고 있습니다. 44년 동안 제 아내는 제가 제 아내에 대해서 하는 이 한 마디 말을 싫어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아내들이 자기 남편에게서 듣기를 원하는 말입니다. 그 말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입니다. 한국 부인들도 그런가요? 아마 여러분들도 다 똑같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도 여러분에게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듣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제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씀하는지요? 만일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이러한 고백을 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 청혼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함께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전화를 해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합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머리 속에서 환상을 그리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능한 자주 만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첫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1년이 되면 그러한 사랑의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 때에 우리는 신혼이 다 지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 아내들은 민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여러분들이 자신과 얼마나 시간을 가지기를 원하는지에 대해서 민감하시다는 점을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주님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시간을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과 개인적으로 얼마나 시간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이 강건한 그리스도인이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규칙적으로, 개인적으로, 또한 효과적으로 지켜지지 않을 때 여러분은 연약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물이 땅바닥에 엎질러지듯이 연약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이들과 1 1로 많은 교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과 규칙적으로 시간을 가지지 않는 청년과는 만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낭비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8 30~31절을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본문은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발람의 선지자들과 대결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갈멜산에 가보면 엘리야가 수축해 놓은 돌무더기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이 한 사람이 수백 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상대를 했습니다. 그는 또한 단순히 대결하기만을 원치 않았습니다. “너희는 너희 신을 불러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내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텐데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서 이 제물을 태우는 그 신이 참 신, 곧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되리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이 제안에 대해서 피차 동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바알의 선지자들이 먼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펄펄 뛰면서 기도했습니다. 또한 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피를 흘리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이 때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했습니다. “너희 신이 못 듣나 보다, 좀 큰 목소리로 외쳐봐라. 아마 집에 없는 것 같은데. 아마 여행 갔는지도 모르지. 아마 지금 잠자고 있는지도 몰라.” 어떤 번역에 보면 아마 그가 화장실에 갔는지도 몰라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조롱했습니다. 왜냐하면 존재하지도 않은 신을 찾아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겠다. 나의 하나님은 내게 응답하실 것이다. 그분이 어떻게 반응하실지를 보라.”

거기에는 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용하던 단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땅에서 줏은 돌들로 장인 단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연장을 가지고 다듬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또 모양을 내서도 안되었습니다 다만 주어온 돌 그대로 쌓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대로 가져다 사용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영적인 교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인간적인 방법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제단에는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 계단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것은 이교도들이 사용하는 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위에 있는 조그만 돌을 모아서 단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것을 수축했습니다. 그것은 전부 허물어졌기 때문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그런 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단을 쌓았습니다(32). 그는 그 단 위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로부터 그 제물 위에 내려왔습니다. 그 제물을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부어진 물을 다 말렸습니다. 또한 그 돌마저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한 결과로서,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한 사람도 살려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제단을 수축하는 것으로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제단이 왜 필요했겠습니까? 이것은 예배의 장소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살펴보면 우리의 조상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모든 조상들이 단을 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단을 쌓은 다음에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단을 수축함으로써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 그들은 이 단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너무 분주해서 그랬는지 모릅니다. 사업이 바빠서 그랬는지 모릅니다. 돈버는데 바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에 관해 말씀하시되 먹고 마신다고 하셨습니다.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하셨습니다. “집을 짓고 사고 판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그 자체에 있어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일에만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에 관한 일에는 시간을 가지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모습을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그 후 이 단은 이교도들에 의해 다른 단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우리 각인은 하나님 앞에서 저마다 단을 쌓고 있습니다. 이 제단을 쌓기 위해서는 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을 설치할 공간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과 장소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제단입니다.

여러분의 제단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매일 하나님과 만나는 정해진 시간이 있습니까? 또 하나님을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또한 기도하고 있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또한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과대화를 나누고 있습니까? 다시 질문하건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까? 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 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구약시대를 보면 만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사람들이 날마다 그 만나를 먹었습니다. 영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이 만나는 영적인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날마다 먹어야 되는 영적인 음식입니다. 예레미야는 고백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말씀이 자신의 영적인 삶의 한 부분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이와 관련된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할 때 너희는 과실을 많이 맺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가지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포도나무로부터 양분을 흡수하는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양분을 섭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약 1개월 전에 소련의 시베리아에 가보았습니다. 거기에 한 아름다운 꽃이 있었습니다. 아주 향기로운 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단 가지를 잘라버리자 수시간 후에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제가 지금까지 보아온 그런 꽃으로 남아 있지 못했습니다. 여기 이 단상 곁의 꽃은 물에 두면 며칠간 살아 있지만, 그러나 시베리아의 꽃은 여러분이 물 속에 집어 넣어도 곧 죽어버립니다. 왜냐하면 그 생명을 공급하는 양분을 빨아들이는 몸체로부터 떨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하나님과 교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양분을 주는 그 생명선으로부터 여러분 자신을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 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과 많은 교제를 해보았습니다. 그들의 삶에 능력이 없는 그런 사람들과 얘기해보았습니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예외없이 제가 당신은 당신의 주님과 시간을 어떻게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아무 시간도 가지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의 단이 허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단이 허물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위험한 일임을 여러분에게 일깨워주고 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와 회복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의 배우자의 어떤 행동으로부터 우리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면, 만일 우리의 배우자가 간음을 했다면, 그 때 우리는 그것을 한시라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잘못된 관계를 끊지 않는다면, 교회에서 즉각적으로 출교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한다면, 그러한 관계를 청산하고 우리의 권면과 훈계를 따른다면 우리는 그가 주님과 더불어 교제를 회복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이처럼 부부간에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어렵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도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쪽 배우자가 용서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내(남편)는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내 남편(아내)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 관계를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입니다. 몇 주, 몇 달 정도로는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될 경우, 즉각적인 자백을 통해서 그 교제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근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여러분 마음 속에서 진지한 회개를 보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그 죄를 미워하는 증거를 보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게 한 그것을 미워하는 증거를 보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그것을 증명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지 오래되었음에도 그것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것도 나쁜 일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더 나쁜 일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사울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때는 사울왕의 삶 속에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셨습니다. 그 때 그는 주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후로 점차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그에 대해서 슬픈 이야기가 기록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신이 이미 떠난 줄을 알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공포에 싸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소리를 지르면서 내 음성을 들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점쟁이를 찾아 가서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죽은 지 수년이 된 사무엘을 불러내어 당신의 지시가 필요하다고 얘기했습니다. 사무엘이 그 때 말하기를, 왜 나를 불러내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셨는데 내가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나를 불렀냐고 했습니다. 그는 큰 번민에 빠졌습니다. 그는 성령이 그를 떠났을 때 그 사실을 알았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에게 역사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다음 호에 계속)

 

(1993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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