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과 선택에 대하여
1. 예정에 대하여
“성경은 예정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우리가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아니야, 다만 우리는 신자들을 가르칠 뿐이지” 라는 식의 말은 옳은 말인지요?”
질문 중 후자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진리에 대한 매우 위험한 왜곡이라고 믿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장),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막 16장)고 말씀하셨으며, 다시 “너희가 내 증인이 될지니라(분명 복음전도를 의미함)”(행 1장)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복음전도자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일까요? 모든 신자들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그들의 방법대로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문제가 복음을 변질시키도록 허락할 때 그 즉시로 우리의 복음은 파괴되고 더 이상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아니며, 그리고 우리의 선택은 숙명론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든 죄인들에게 필요한 구주로 전파합니다. “누구든지”란 말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와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적인 은혜를 믿습니다. 우리는 믿기 위해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으며, 그러기에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 은 그 자체가 사실일 뿐 아니라 “예정”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이로 볼 때 선택과 예정의 차이는, 선택은 그 대상들에게 영원한 축복을 결정해주는데 비해 예정은 그 축복의 독특한 특성을 결정해주는데 있는 듯 합니다. 모든 선택받은 사람들은 거룩하도록 택함을 받지만 그러나 그들의 축복의 독특한 특성은 그들이 속한 선택된 사람들의 부류에 따라서 다양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천사들이, 비록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리우기는 하지만 창조의 의미를 제외하면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상의 권속에 속하고 교회는 천상의 권속에 속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 시대의 성도들은 에베소서 1장 뒷부분에 의하면 기업(천상적인 기업)을 얻도록 예정되었으며, 로마서 8장에 의하면 모든 시대의 구속받은 자들의 기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 선택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 친지(親知)들을 생각하며 선택의 교리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란 문제는 어떻게 조화를 이률 수 있는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굳이 어떤 신학적인 계파에 속하게 하여 인간의 의지의 책임있는 자유를 주장하는 아르미니안주의 편을 들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주권을 확고하게 믿는 칼빈주의자의 편을 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둘을 단순한 혼합형태로가 아니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의 복음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견해들로 인해 제한되거나 훼방을 받는다면 그 즉시 우리는 그 복음을 잘못 주장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마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는 듯이 기도하거나, 모든 것이 인간의 믿음에 달려있는 듯이 전파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 문제로 곤란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문제는 잘만 생각하면 우리의 삶의 모든 행동 속에서 조화를 이룹니다. 확실히 하나님은 주권적이십니다.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니라”(행
간단한 실례를 들어봅시다. 우리의 친구들이 멀리 타국에서 배를 타고 귀국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육지를 저만치 눈 앞에 두고 배에 화재가 발생하여 모든 승객이 큰 위험에 처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아신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도움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할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철저한 칼빈주의자로 하여금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고자 늦지 않게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모든 노력을 멈추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우리의 친구들이 무사히 육지로 구출될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만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 뒤에 숨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면 아마도 십중팔구 위험에 처한 사람들은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속적인 사건에서 그와같이 행동하려 하지 않을진대 왜 영적인 일에서는 그렇게 행동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교리서를 검토해 보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기도와 수고를 통해서 우리의 이웃을 복음 메시지 앞으로 인도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모든 족속에게 선택교리를 전파하거나 모든 택함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우리는 누가 택함받은 사람인지 알지 못합니다),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일반적으로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가성경의 같은 페이지에서 언급될 때는 전자(前者)가 먼저 나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그리고 사도행전
우리는 복음메시지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됨과 부활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오직 믿음으로만!”(bona fide)이란 전제에만, 즉 인간의 책임의 측면에서만 제한시켜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며”, 그리고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대한 성경의 마지막 메시지는 “목마른 자도 을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믿고,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들에 포함되어 있다는 겸손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고자 힘씁니다. 아마도, 바울과 같이 있던 승객들에게 주신 다음과 같은 안전의 약속보다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하나님으로부터의 안전 약속은 없다고 봅니다: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으리라.” 이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내게 주셨다”고 말하고는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고 덧붙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였습니다(행 27:22~25). 그러나 31절에 보면, 사공들이 배에서 도망치려 하자 바울이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경고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성도와 죄인이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인간의 책임의 측면을 보여줍니다.
끝으로, 이상의 답변은 우리 앞에 놓인 문제에만 국한되며, 신자의 관점에서 본영원한 계획들이란 중대한 주제를 이해하는 데는 거의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
(199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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