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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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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6. 09:18 횃불/1993년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윤 영 성(서울북부교회)

89 9 24일 일요일이었으나 전직원에게 특근 명령이 내려져 있어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사무실을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서류함에 편지가 꽂혀 있었다. 다정한 친구 남표에게서 온 것이었다. 나의 마음은 반갑고 떨렸다. 8개월 만에 온 그의 편지는 1월에 온 편지와는 전혀 색다른 내용이었다.

내 마음 속으로 사랑하는 친구 영성, 그동안 편지 못하고 안한 것, 내 구실 하나 들어 주었으면, 마음은 급하고 시간은 없는 지금 이 모습이 안타깝다. 하지만 드디어 내 마음에 참 소망을 갖게 된 나로서는 더 이상의 지체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 수 있기에 이제나마 편지를 쓰게 됐다. ····중략····

예수님이 곧 오신다고 한다. 20년 가까이를 예수님만 보고 온 나로서도 잘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태복음 24장의 무화과 나무의 비유와 성경 구석구석의 예언이 현실로 드러난 것을 보고 난 나의 의심을 제하여 버릴 수 있었다. 살전 5:3에는 저희가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흘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이렇게 시작된 나의 확신은 내가 이 종이 위에 옮기기에는 너무 벅차 쓰기에 부적당하다고 느꼈다. 친구 영성이는 과연 예수님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을까? 위대한 인물, 좋은 사람, 하나의 종교 지도자? 아니면 참으로 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할 분으로 믿고 있는가? 친구 영성이를 이제는 하나님, 예수님 안에서 형제 영성이로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략····

 

편지를 읽은 후 내 마음은 편지를 받은 즐거움과 편지 내용이 뒤섞여져 잠시 동안 아연해졌다. 그런 가운데 나는 그가 이번에는 뭔가 분명한 것을 찾은 것이 아닐까, 그래 아마도 이 친구가 거듭난 모양이야 이렇게 생각하며 한없이 이 친구가 부럽고 나 자신은 비참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 친구의 편지를 받기 훨씬 전부터 나는 고모님으로부터 귀가 닳도록 예수 믿으라는 소리를 들어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두려움 같은 게 있었으나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어느 날 성남에 사시는 고모님 댁을 방문하였다가 굉장히 심하게 다툰 일이 있다. 주일 아침이었는데 교회를 같이 가자고 조르시는 고모님의 말씀에 짜증을 부렸다.

싫어요. 다음에 가지요.” “싫다니까 자꾸 왜 그래요.” “제발 좀 내버려 두세요. 내 인생의 문제니까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내버려 두세요.”

우리는 서로 힘들었다. 고모님은 얼굴이 빨개지시고 울상이 되셨다. 그때는 사단이 나의 마음을 한 손에 움켜쥐고 놔주려고 하지 않던 때여서 나로 하여금 어떻게든 복음을 들을 수 없도록 교회에 가지 않을 핑계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그 당시 내가 교회에 쉽게 갈 수 없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현실 속에서 만나는 기독교인들의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점들이 그랬고, 주님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오해는 에덴에서 출발하였는데, 왜 사람을 지으셨는가? 왜 죄를 짓도록 방관하셨는가? 왜 선악과를 범한 것이 죄인가? 나는 로보트에 지나지 않는가? 그리고 에덴에서 시작된 오해는 주님의 사역에서도 계속되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떠들어대듯 하나님은 선하지도 사랑이 풍성하지도 않았으며, 그는 철저히 이기적이고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피조물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희롱하는 독선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의 사춘기적 방황은 참으로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나의 생의 의문으로부터 확실한 답을 얻지 않고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은 집착이 강한 성격의 탓도 있었고 한가지 어줍잖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그것은 인류에 대한 일종의 봉사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우리 시대의 현실을 지켜 보면서 세계를 지도할만한 새로운 지도 이념 -가치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의 가치관이 확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생의 의문을 움켜쥐고 씨름을 계속하였다. 나는 생명의 본질을 알아야만 했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했다.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난 사육되는 동물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은 동물을 사육하는 농장 주인으로만 생각되었다. 그는 전지전능함을 이용해서 사람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것 같았고 나는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가룟 유다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그가 신의 희생양으로 느껴져 눈물이 났다. “그래 그는 이용 당했어. 유다는 잘못이 없어.”

그러나 그러한 오해를 하면서도 나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불안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후가 두려웠다. 사후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주님을 원망했다. “왜 사람에게 자살할 정당한 권리를 주지 않았는가? 생의 좌절감과 허무감으로 수도 없이 자살의 유혹을 느꼈지만 신은 나에게 죽을 자유를 주시지 않았고 나는 나의 죽음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89 12월 초, 어느 날 남표에게서 또다시 편지가 왔다.

성경은 절대 하나의 얘기거리가 아니며 단순히 인간을 선하고 올바르게 살도록 하는 좋은 말들로 채워져 있는 그런 책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의 생명이며 그 생명이 살아서 움직이고 역사 속에서 그 일을 거의 마쳐가고 있으며 곧이 말씀이 떠나게 될 때가 오는데 그때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버릴 것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구체적 증거들, 즉 성경이 급격히 이루어지고 있는 증거들이 존재하고 있다. 영성아 예수님은 병자, 즉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 사람이 아플 때 의사를 찾듯이 네가 죄를 깨닫고 네 죄의 해결을 받고 싶어할 때 참으로 예수님은 그 죄를 낫게 해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 편지의 끝에는 어느 교회의 주소를 소개해 주면서 도움을 필요로 할 때 편지해 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나의 안중에도 없었다. 89 12월쯤 나는 새로운 씨름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나름대로 신을 찾아보겠다고 나선 길이었다. 세계 종교사와 비교종교학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며 동양과 서양의 모든 종교들을 종교의 발생, 성장(전파), 사멸에 관심을 갖고 또 제 종교들의 유시법과 차이점을 관심깊게 살펴보았다. 그런데 결과는 신의 모습을 찾은 것이 아니고 신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나의 마음은 참으로 비참해졌다. 신이란 것은 사람들이 위안을 얻고자 또는 통치의 이데올로기로 이용하고자 한 인간 문화의 하나에 지나지 않다니···· 신이 사람을 만든게 아니고 사람이 신을 만들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음에는 생명과 영혼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폴 데이비스가 쓴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 이차크 베토프가 쓴 우주심과 정신 물리학등의 책을 접하였는데 그 책들은 물리학의 방대한 영역을 다루고 있었으며, 상대성이론, 양자이론, 열역학, 불확정성원리 등이 가지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책을 읽은 나의 마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좌절감과 허무감에 사로잡혔다. 생의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생명은 에너지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의 의식(영혼)도 물질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 앞에 나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내가 그전까지 가지고 있던 신 중심의 사고는 완전히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이젠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내겐 목숨을 유지할 실오라기 같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실로 생명을 연장한 유일한 이유였다. 당시 나는 어떤 여인을 굉장히 사랑하고 있었는데 나의 마음은 완전히 사로잡혀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많은 갈등이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기독교적인 바탕 위에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녀는 윤회론적이고 상대론적인 가치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개성이 강하였고, 자기의 신념에 투철한 사람들이어서 상대방이 양보하기를 기다리며 팽팽히 맞서기 일쑤였다. 우리가 1년여의 사귐 가운데 겪은 갈등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89년 겨울과 90년 봄의 종교적 방황이 극에 달했을 때,-신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인간이 만든 문화에 불과하며 사람의 의식은 물질운동의 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즈음-극도의 박탈감 가운데에서도 이상하리만치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변할 줄 몰랐다. 나의 생각들은 찢어져 바람에 불려가는 비닐조각처럼 펄렁거리고 의식은 가눌 수 없이 파괴되었는데도 언젠가는 나의 좋은 짝이 되어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전화를 통하여 뜻밖의 이별을 선언하였다.

90 5 23 밤이 내게는 몇 년처럼 느껴졌다. 숨쉬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끝났다. 이젠 이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질 때가 되었다. 존재의 유일한 이유조차 사라진 지금···· 방법을 떠올리다가 부산의 바다를 생각했다. 되도록 먼 곳으로 택할 마음이었다. 그리고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5 24일 아침 직장을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서울역까지 가는 버스에서 이 생각 저 생각 떠올리다가 남표의 편지가 생각났다···· 남표가 말한 그곳에나 들렀다 갈까? 그 교회····

어떻게 오셨습니까?”,

목사님과 신앙상담을 하고 싶은데요?”

오늘은 다른 약속이 있어서 안되겠는데 다음에 하면 어떨까요?”

, 책을 드릴테니 한번 읽어보세요.”

손바닥만한 책 두 권이 쥐어졌다. ‘영혼 구원’, ‘단번에 얻는 죄사함이라는 책이었다.

부산에 도착해보니 자정이 가까왔다. 난생 처음인 그곳,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하니까 머물 곳을 정해야 했다. 눈에 들어오는 대로 허름한 여인숙의 문을 열었다. 돈을 치르고 문을 잠갔다. 그리고 낮에 받은 책을 열었다. 그 책에서 나는 놀라운 말씀을 보았다. 그 말씀은 영혼이 있다는 것과, 심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자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9:27).

이 말씀을 읽을 때 이 말씀은 살아있었다. 살아서 나를 찔렀다 어떻게 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 말씀은 나를 공포에 몰아 넣었다. 심판이라는 말이, 죽음을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말이···· 그밤 나는 마음의 치열한 싸움을 겪었다. 끝내야 해, 아니야 나는 심판을 감당할 수 없어, 끝내야 한다니까, 아니야를 반복하며 그 밤이 지났고 이틀간을 더 고통 속에 지낸 후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올 마음을 먹었다.

좀더 시간을 갖고 하나님을 찾아보자. 마음 한편에서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주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90 6월 나는 남표를 만났고 그가 다니는 교회도 다니게 되었다. 나는 복음에 충실한 설교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집에서 또 직장에서 틈이 생기는 대로 성경을 읽었다.

어느 날 고린도전서 1장을 읽는 중에 내 삶에 있어 아주 중요한 말씀을 보게 되었는데 기록된 바 내가 지혜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 말씀 속에서 내가 나의 지혜로 하나님을 찾으려 한 어리석음과 죄악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요한복음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감명을 받은 요한복음 3:16 말씀이 내게도 구원의 말씀이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기는커녕 과거에 내가 비웃던 부분이었다. “아니, 그렇게 시시한 말씀을 가지고 왜들 그러지라고 생각해 왔던 그 말씀이었는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위의 고린도전서 말씀 외에도 로마서 1:24,28, 골로새서 2:8, 데살로니가후서 2:11, 베드로후서 3:3,4 말씀들은 내가 무엇에 속고 있었으며, 나의 불의가 무엇이었는지 더욱 분명히 알게 된 말씀들이었다 또한 요한복음 8:43~46 말씀은 주님의 안타까이 죄인을 부르시는 말씀으로 다가왔으며(“너희가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로마서 5:7,8 말씀은 죄사함을 확실하게 믿도록 하여준 말씀이었다.

 

이렇게 구원간증이랍시고 장황하게 늘어놓고 보니 읽는 분들께 유익이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 간증 속에서 주님의 능력과 그분의 사랑의 어떠하심이 나타나야하는데 말이다. 간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기도가 필요했다. 나의 들춰내기 두려운 부분이 있었으나 진실한 간증이 되기 위해서는 소상히 밝히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 글을 쓰는 시간 속에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느꼈다.

어리석을 뿐 아니라 죄로 가득한 인간이 하나님을 욕한 것도 다 감싸주시고, 오히려 상실한 영혼을 긍휼히 생각하셔서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또 지금은 매일의 삶을 보살피시고 잘 자라도록 돌보아 주심을 감사드린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제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님의 아름다움을 머리숙여 생각합니다.”

 

(1993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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