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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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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28. 16:16 횃불/1993년

요한계시록 강해(5)

3 1-7

-어거스트 반린

사데교회에 보내는 편지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3:1,2).

 

역사상의 위치와 관련하여 사데(“잔존자라는 뜻)는 두아디라 교회가 보여주는 로마카톨릭의 통치에 이은 시대를 제시해 줍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한 잔존자 무리가 카톨릭교에서 나왔습니다. 슬프게도 그 무리는 곧 일종의 생명 없는 형식주의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이에 주님께서는 그것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라고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물론 이들 잔존자들 가운데는 참된 영적인 생명을 소유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2절에서 깨어 일어나 그 남은 진리를 굳게 하고 그리고 분명히 죽게 된 것들을 위해서 싸우라는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2절에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참된 신자들 속에 있는 생명의 불씨가 있으며, 그들은 이 불씨를 돋우어서 불꽃을 피우라는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서도 도전을 받아 마땅합니다! 종종 우리는 심히 부끄럽게도 그러한 영적인 나태에 빠지곤 합니다. 우리는 동료 신자들의 영혼을 각성시켜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각성해야 합니다( 13:17), 또한 우리의 행위는 종종 하나님 앞에서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행위가 그분의 인정을 받는 것이 되려면 사랑으로 역사되는 믿음의 열매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 특히 사랑이 종종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매우 결핍되어있습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주일 집회에는 백여명이 운집하던 것이, 주중의 기도모임에는 25명뿐이니 이것이 자고 있는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남은 것을 굳게 하십시오. 큰 부흥을 기다리 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시작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영혼 속에서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3.3)

 

제가 보기에 1절과 이 3절은 기독교계의 전체 무리를 가리켜 하시는 말씀인 반면에, 2절과 4절은 오늘날 우리가 명목상의 기독교계에서 보듯이 엄청난 무리의 죄인들 가운데 섞여있는 진정한 신자들만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우리 주님께서 도적 같이 임하신다고 한 데살로니가전서 5:2,4 말씀은 분명 불신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하십시오.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라는 순서는 의미심장합니다. 여기서 받았다는 것은 한 영혼이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 이는 그 경우에는 들음이 먼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종종 아무런 개인적인 깨달음이나 믿음을 통한 그 어떤 개인적인 확신도 없이 그들의 부모들이 발설하는 고백을 따라 그저 입술로만 신앙을 고백하듯이,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서 전해진 중대한 진리들을 우리가 마음의 깊은 자각이나 인식 없이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 주위에는 많은 받아들임들음이 있으나 종종 그것은 아무런 회개도,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돌이킴도 없이 행해지곤 합니다.

본절에서는 회개가 맨 마지막에 언급되어 있는 반면 참된 구원에 있어서는 회개가 가장 먼지 오게 됩니다. 여기에서 받아들여진 진리는 간접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러나 간접적이라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사실 어떤 것이 간접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그 만큼 그것이 큰 가치를 지니기 때문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연필이나 볼펜 따위는 간접적으로 구입하지 않으나 자동차나 피아노와 같은 물건은 간접적으로 구입합니다. 값이 나가는 물건일수록 간접적으로 구입하는 경향이 높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도 그와 같이 그 가치가 무한하기에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그 일을 위해 엄청난 댓가를 지불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들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받았습니다. 그 극히 소중한 진리를 한결같이 고수하도록 합시다. 그것을 단단히 부여잡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헌신에서 멀어져 가는 일체의 실패의 경험들을 회개하도록 합시다. 많은 사람들이 유의하지 않으나, 주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우리들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산 진리를 우리가 파는 일이 없기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3:4)

 

여기에 소수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잔존자 안의 잔존자입니다 이 넓디넓은 기독교계 안에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헌신된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그러한 자들을 아십니다. 그분은 그 시대의 영적인 부패상과 동떨어져 행하는, 즉 그들의 옷을 더럽히지 않는 모든 신자들을 아십니다.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했듯이 그들 또한 알지 못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그들은 가난하고 멸시받고 무명한 자들이나 그러나 그분께는 소중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그분과 동행하고 있으며 저곳에서도 그분과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나와 함께 다닐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즐거운 소망이요 성도의 영원한 축복입니다. 종교인들은 이세상과 손잡고 행합니다. 그들은 구원받지 않은 자들과 한 무리를 이루고는 세속인들이 행하는 동일한 방법으로, 동일한 장소에서 그들의 기쁨과 명예를 찾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서 분리되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그분과 동행한다는 것은 현재에도,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겁게 합니다( 24:32).

사데교회의 특별한 실패는 세상, 즉 여기에 옷을 더럽힌 것으로 표현된 것과의 연합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은 성경에서 우리가 사람들 가운데 거하는 삶을 말해줍니다. 디모데후서 3장을 살펴보면 단순한 종교-능력이 결여된 형식 -의 열매는 불경건한 삶임을 알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3장의 심각한 죄들(부패한 기독교계를 묘사해주는)과 로마서 1장의 죄들(음란한 이방세계를 묘사해주는)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의 복스런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신 한편 온전히 거룩하고 악이 없고 죄인들에게서 떠나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사귀고 불신자들에게서 분리되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더럽혀질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불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3:5,6).

 

하나님을 찬양하게도 거룩한 삶에는 유용한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 능력의 절정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영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일곱 영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칠중적인 온전함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영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분께서 여러분을 소유하고 계시느냐입니다. 그분께서 여러분 속의 단순한 거주자에 불과합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십니까?

그분을 통해서 신자는 이김을 당하는 대신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그분께서 이곳 세상에서 사신 순결한 삶을 상기시키는 흰 옷을 입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 곳 세상의 명부(名簿)에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그러한 이름을 가진 자들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반면에 참 성도의 이름은 생명책에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아버지 앞에서 그 이름을 부르실 것이며, 영광스런 천군천사들 앞에서 그의 충성과 헌신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

어떤 이들은, 어떤 이름들은 생명 책에서 지워질 수도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부정형을 긍정형으로 바꿔놓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진실로 그분에게 속한 자들의 이름을 흐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이 복스런 약속의 말씀 안에서 안심하십시오. 겸손한 신자는 그의 이름을 이 세상 어디에든 중요한 의미로 기록되게 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름을 실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하늘에 등록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전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열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가 가라사대”(3:7)

 

사데는 우리가 살펴본 대로 종교개혁기간 동안에 그 초기의 매력을 곧 상실했으며, 극소수만 하나님과 동행한 채 대부분이 생명없는 형식주의, 즉 죽은 정통주의에 빠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심으로 인해 여러 시대에 영적인 각성을 허락하는 것을 적합하게 여기셨는데 특히 웨슬리, 휫트필드 등의 인물들을 통해서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어서 19세기 초의 하나님의 운동이 뒤따랐습니다. 이 운동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진리의 으뜸되는 원칙들로 되돌아 가도록 함으로써 잠시 오순절 시대의 열기와 열정을 경험토록 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교회(the Church)의 경험에 있어서 이러한 복스런 기간을 나타내 줍니다. 그 용어가 의미하듯이 형제사랑이 이 강력한 영적인 부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습니다. 개신교는 이미 형식적인 죽은 조직에 빠져버렸으며 기성교회는 종종 극심한 적대양상을 보이며 분열과 파벌 속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주님께서 그분의 진실한 성도들에게, 모든 참 신자들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며, 모두가 그리스도안에서 연합된 까닭에 형제사랑이 그들 모두를 한데 연합시키는 복스런 결속의 끈이 되어야 한다는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를 일깨워주신 것은 바로 이러한 때였습니다. 교파와 인간이 생각해낸 장벽들이 무시되었고, 신자들은 다시금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에 전혀 힘쓰던 그러한 초대교회에 의해 행해진 본을 좇아 성경적인 단순함 속에서 함께 모였습니다( 2:42). 이러한 최초의 복스런 성도의 교제의 중심특징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제자들이 오래 전 그 밀월과 같은 시절에 정규적으로 실행했던 대로( 20:7) 주 예수님의 그 보배로운 죽음을 기념하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2:44). 이것은 모든 이들이 모든 문제에 대해 같은 의견을 가졌다거나 모든 이들이 동일한 방법으로 주님의 일을 행했다거나 모든 이들이 침례를 믿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의미일 뿐이었습니다. 믿는 자들만이, 그리고 믿는 모든 사람이 함께 모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에 이러한 복스런 거룩한 원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 아래서 되살아났으며 주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돌이킴을 심히 칭찬하고 높이셨습니다. 분열을 말해주는 인위적인 명칭들은 땅에 떨어졌으며 신자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의 형제로서 모였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속했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속했느냐였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러한 성경적인 번성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곧 분열이 일어났으며 성도들은 각기 적은 무리로 찢어지고는 저마다 옳은 무리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낮추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1백 년 이상 전에 발생한, 그리고 오늘날 우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분열로 인해, 또는 사소한 방법 상의 차이나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로 인해 성도들이 여러 모임들에서 교제를 거절당하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기를 고집하고 있으며, 그들 자신의 앞에서 교만과 죄악을 단절시키는 데보다 그들 가운데서 참 신자들을 단절시키는데 훨씬 더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이 빌라델비아”, 즉 형제사랑으로 알려진 기간이라는 것을. 형제사랑을 계속하도록 합시다. 어떤 신자가 여러분의 모임에 오거든 그가 형제들을 알고 있는지, 그가 이러저러한 세부적인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지 말고 그가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로 알고 있는지를 물으십시오. 형제사랑은 그들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에 상관없이 모든 하나님의 참된 성도들을 받아들입니다. 다만 어느 개인에 의해 주장된 그릇된 교리나 어떤 부도덕한 생활만이 그 사람을 성도의 교제로부터 단절시킬 수 있을 뿐입니다. 교만함으로 인해 진실한 신자들을 여러분 가운데서 단절시킨 이들이여, 그 날에 가서 여러분이 거절한 이들을 받으신 그분께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겠는지요?

이제 본문 말씀을 잠시 살펴봅시다.

형제사랑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려면 우리는 그 사랑이 온전하신 그분께 가까이 갈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의 삶 속에는 얼마나 중요한 사랑이 있는지요?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은 신약성경에 25회 가량 발견되는데 이는 다른 어떤 단일어구보다 많은 횟수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복스런 주님 자신의 삶에서 나타난 대로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 말씀을 하신 분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사랑은 거룩하고 순결한 삶으로부터 흘러나올 때 진실로 실제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를 만족시키지 않고 타인에게로 나아갑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먼저 인격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인격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은 또한 진실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진실하셨으며 사람에게 진실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죄악가운데서 거룩하셨으며 세상의 거짓됨 가운데서 진실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참 빛, 참 포도나무, (혹은 진실된”) 증인으로 말씀하십니다. , 거짓과 속임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모든 면에서 진실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격려가 되는지요? 그분은 결코 자신의 약속을 철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결코 자신이 위해서 온 그 길을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으나 그분은 영원히 진실하신데 이는 그분께서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신 까닭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죄나 실패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며 항상 자신을 희생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 안에 형제사랑을 샘솟게 하는 원천입니다.

이사야 22:15~25을 찾아 읽어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왕의 국고를 맡은 셉나가 그의 직위에서 폐해질 운명이었고 대신 엘리아김에게 그 직위가 주어질 예정이었습니다. 이사야 22장에서 엘리아김에게 주어진 말씀은 계시록에서 우리의 복스런 주님에 의해 주님 자신에게 적용됩니다. 다시 말해서 주 예수님은 여기에서 만왕의 왕의 국고를 맡은 분이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모든 부()가 그분의 관리 아래 있습니다. 그분은 여기서 다윗의 열쇠라고 불리우는 하나님의 보고(寶庫)를 여는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언젠가 그분은 1900년 전에 그분을 거절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모든 보화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그러한 장래의 축복이 오늘날 교회에게 적용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충만의 무한한 자원으로 향하는 문을 여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의 복스런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부요의 곳간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여셨으며 이에 아무 닫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들어와서 마음껏 누리십시오! 여러분은 알리바바처럼 열려라 참깨!”라고 외칠 필요가 없습니다. 문이 지금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진주나 다이어몬드나 금붙이 따위를 취하라고 초청하시는 대신 그보다 무한히 가치있는 것,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든 충만함으로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마음껏 누리십시오! ,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을 취하는데 그토록 실패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께서 모든 영적인 부요를 취하는 열쇠를 쥐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이 세상의 부와 명예를 위해 다 주고 있습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됩니다.

 

(1993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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