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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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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9. 16:05 횃불/1993년

요한계시록 강해(7)

- 3 11~18 -

 

-어거스트 반린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3)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3:11).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만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는 이 보배로운 약속이 밝고도 격려에 찬 어조로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반응할 수 있다면!

두아디라, 사데, 그리고 빌라델비아의 신실한 잔존자들에게는 굳게 잡으라는 이 권면이 주어져 있습니다. 두아디라에 있는, 즉 로마카톨릭 하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주님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에게 짐지우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데에있는 자들, 즉 무사안일한 개신교도들에게는 굳게 잡고 회개하라는 명령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형식주의의 무감각한 상태를 회개하라! 그리고, 빌라델비아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그들의 면류관(상급)을 잃지 말라는 경고가 덧붙어져 있습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에게는 붙잡으라는 권면의 말씀이 전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은 굳게 붙잡을 것이 없는데 이는 그들이 진리를 완전히 버리고 배도에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말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빌라델비아의 경우에는 주님께서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시지 그들 스스로 그렇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뭔가 선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큰 축복인 반면, 우리 스스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슬프고도 무가치한 일인 것입니다.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예레미야 7:29에서 머리털로 옮겨진 단어가 바로 이 면류관이란 단어입니다. 민수기에서는 이 동일한 단어가 분리와 성별로 옮겨져 있습니다. 삼손의 힘은 그의 머리카락에 있었는데, 그 머리카락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분리와 성별을 말해주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면류관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 계시록 3:11에 경계되어 있는대로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면류관을 빼앗아 간다면 그것은 그들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분리된 삶을 빼앗아가려는 것을 의미란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제가 믿기에 이 말쯤은 신자가 세상과 그 종교 속에 빠져들어 그의 영광과 면류관인 것을 상실할 위험에 대해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삼손의 경우에 그의 분리된 삶을 상징하는 머리카락이 잘림과 동시에 그의 육체적인 능력이 상실되었듯이, 주변의 악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지 못할 경우신자는 그러한 분리된 삶에 따르는 영적인 능력을 상실케 되는 것입니다.

면류관은 물론 장래의 상급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충성의 댓가로 주어지는 상급만큼은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3:12).

 

자신의 군대장관의 지휘 아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항상 승리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힘으로 나아가면 그는 곧 싸움에서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 요한일서 5:4,5은 이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는데, 신자는 거듭남으로써 원리적으로 세상을 이깁니다.” 그것은 그가 거듭나는 즉시로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그 위로부터의 출생에 의해, 거룩한 성품과 목적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삶의 실전 속에서 그는 그의 구주되신 예수님이, 모든 능력이 속해 있고, 은혜 안에서 충성된 봉사와 거룩한 삶을 위한 자극제를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지식 가운데 행함으로써 승리를 거둡니다.

승리하는 신자는 그곳에서 기둥이 될 것입니다. 만일 이 땅에서 그분의 이름의 존귀를 높인다면 그는 저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기쁨을 영원히 누럴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나가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것입니다. 계시록은 땅에 거하는 자들에 관해 많은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게도, 신자는 이 땅의 거주자가 아니라 나그네였기 때문에 저 금빛 찬란한 궁전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거주자일뿐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전의기둥으로서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승리자는 이 땅에서는 자주 나갔으나 저 위에서는 더 이상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믿음으로써 이 세상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그의 주님과 따로 행하기 위해 이 세상의 종교적인, 때로는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가증스런 무리로부터 나간 것입니다. 이곳에 서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의 어두운 곳으로 나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더 이상 분리되기 위해,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쉬 변하고 요동하지만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안정되고 확실합니다 더 이상 안팎으로 드나드는 일이 없을 것이며, 기쁨의 충만함이 있는 그분의 임재 안에, 그리고 영원한 희락이 있는 그분의 우편에 영원토록 거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3:12)

 

우리 주님은 여기서 네 차례나 아버지를 내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이 땅에 계실 때의 그분의 인성을 암시해 주는 표현인데 왜냐하면 그때에만 그분께서, 친히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하나님(a God)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인자로서만 아버지를 내 하나님으로 표현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와같이 본절에서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서의 자신의 삶을 언급하되 사중적인 반복으로 강조하신 것은 숫자 4가 의미상 세상을 가리키는 숫자인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행하신 것처럼 행하는 자들은 그분께서 누리신 것과 같은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는 자들은 그분의 영예 또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그분께서 거하시는 내 하나님의 전에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셨을 때 항상 아버지와의 사귐 가운데 사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임재 가운데 거하셨던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거하는 것, 그분의 얼굴을 뵈옵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은혜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 이것이 승리자의 영원한 기업이 될 것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 위에 기록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 계실 때 주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이 이름은 신자 위에 기록될 것인데, 이는 아버지의 은혜와 영광이 우리 위에, 즉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영원히 새겨질 것을 말해 줍니다.

그분은 그분의 하나님의 성의 이름을 기록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하늘에 속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항상 하늘을 가리키셨습니다. 그들의 땅에 속한 성은 죄 가운데 침몰했으며 저 멀리 제쳐질 것입니다. 그대신 시온성, 그 새 예루살렘이 우리의 복스런 거처가 될 것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새 이름을 우리에게 기록하십니다. 과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 자신과 그분이 이루시는 모든 행사처럼 이것은 우리 마음에 계시된 지혜와 사랑과 능력에 대한 영원히 새로운 경이감을 의미 합니다. 주 예수님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 주어져 있는지!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1)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3:14)

 

이제 우리는 일곱 교회의 마지막에 이르렀으며,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는 메시지는 진정 지상에서의 교회의 역사의 마지막 때의 상황을 묘사해 줍니다. 인간에게 맡겨진 모든 시대가 그러하듯이 이 시대 역시 슬픔과 실패로 마감됩니다. 그러나 그 기간 중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자신의 피로 산 자들을 소유하고 계시며, 그 수많은 성도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위해 오실 때 영광가운데 끌어올려 질 것입니다.

이 기독교계의 마지막 국면에서 우리는 책망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빌라델비아의 경우와 정반대됩니다. 여기에는 그분의 오심 또한 언급되어 있지 않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소망에 대해 그들이 전혀 관심이 없음을 암시해줍니다.

이것은 일곱 편지 가운데 개개인에게 보내진 유일한 편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한 몸으로서의 교회(the Church)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개개의 라오디게아인들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이는 한 몸으로서 교회가 절망적인 상태에 처해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이제는 개개인들만이 그분의 음성을 듣도록 기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일곱 교회가운데 주님이 개개인의 마음에 들어가시기 위해 문을 두드리시면서 분명히 문밖에 서 계신 모습으로 나타난 유일한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백성의 권리를 의미합니다. 일반인이 아무 권리도 소유하지 않은 두아디라 교회(로마 카톨릭교)로부터 우리는 사람마다 모든 권리를 지닌,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것을 생각하고 행동에 옮길 권리를 지닌 다른 극단-황폐해진 개신교-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 제국주의적인 카톨릭교와 대조되는 공산주의적인 기독교가 있습니다. 즉 불법의 여자와 대조되는 불법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살후 2:3과 계 17:3~5 비교). 이 두 교회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서 실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한편, 그 둘 사이에 위치한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는 올바른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데, 그 교회는 카톨릭교의 맹종이나 영적인 배도의 고의적인 반항을 보이지 않은 채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주님은 자신을 아멘으로 묘사하십니다. 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지요! 그분은 진실로 모든 것에 있어서 마지막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분 안에서 예이며 그분 안에서 아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매우 슬프게도 인간은 실패로 입증될 것이나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지혜의 목적들을 실행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약 시대에 그러했듯이 교회는 이곳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참 증인으로서 실패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아버지를 계시하실 때 그러하셨는데, 그분은 항상 하나님과 분의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며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는 말씀에 합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 다음하나님과 사람에게 온전히 충성되게도, 하나님의 구원을 가련한 죄인들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십니다. 물론 이것은 새로운 창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창조를 마치셨을 때 이루니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안식하셨는데, 주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새 창조를 마치신 다음 안식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인간의 실패와 사단의 악의와 궤계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이 땅과 하늘에서, 영원하고 빼앗길 수 없는 축복을 지닌 새로운 창조를 온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권능 가운데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 찬성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 날,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그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위()와 사역의 영광 안에 계신 우리 주님을 뵈오니

이 땅에서의 온전한 삶으로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미래의 영광스런 통치로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자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불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3:15,16).

 

이것은 라오디게아가 가리키는 기간인 오늘날의 기독교 세계의 상황을 얼마나 잘 묘사해 주는지요! 오늘날에 만연된 한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영적인 냉담과 무관심입니다. 몇몇 지역 외에는 아무런 특별한 반감이나 반대가 없는 반면에 복음이 오랜 세월 동안 전해진 지역들의 사람들은 대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입니다. “마음을 넓게 가지라, 무엇을 믿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이 소위 문명화된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의 모든 종들은 당혹스럽게도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상태에 관해 사람들이 극도로 무관심한 모습을 직면해 왔습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심지어 참 신자들 가운데서도, 그들에 대한 주님의 요청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너무도 흔한 실정입니다. 이 시대의 많은 놀라운 발명들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간증을 독려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미지근함은 속에서 거부감을 일으키며, 주님은 그러한 교회를 입에서 토하여 내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기에 이 일은 참 신자들이 영광 중으로 휴거된 후에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메시지의 끝 부분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방법에 주의하라고 권면하시는 것은 그러한 참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게도, 그분의 진실한 백성으로서 그들 주위와 그들 가운데 있는 가증스런 모습들로 인해 탄식하며 부르짖는 많은 사람들이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있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3:17).

 

네가 말하기를 ····하나 ····알지 못하도다.” 그들 가운데는 풍성한 물질적인 번영과 외적인 성공이 있지만 그러나 그분이 보시기에 영적인 상태는 실로 가련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그 위세를 과시하고 있으며 자연인들이 볼 때는 그럴만한 이유를 지닌 듯 합니다. 큰 건물들과 날로 증가하는 청중의 수, 왕성한 활동 등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러한 면들이 겉 모양만 보고 판단하는 자들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것들을 뛰어넘어 영적으로 눈이 멀고 벌거벗은 파산한 상태를 바라보십니다. “부족한 것이 없다”-혹은 부족한 사람이 없다” -는 것은 하나님조차도 필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그들이 그만큼 종교적인 형식에 취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부르면서 마음은 그분에게서 멀어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랑은 결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다만 겸손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직 우리는 주님 안에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신자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데,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세상과 연합한 까닭에 그것이 밖에 버리워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도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3:18).

 

네가 그렇게 부유할진대 그러면 내게서 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귀중한 물건을 파는 상인으로 자신을 제시하십니다. 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위해 소유하고 계신, 우리를 위해 사셨고 갈보리의 고통의 십자가의 불 속에서 연단하신 모든 것의 영원한 가치를 말해 줍니다. 어떻게 파산한 죄인이 그러한 보물을 살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너는 가련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금이나 은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복스런 주님께서 우리를 사신 동일한 방법으로 이 금을 사야만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은이나 금으로 사지지 않고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사셨습니다. 즉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사신 것처럼, 우리도 거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와 유사하게, 자신을 굴복시킴으로써,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다음 우리의 합당한 예배로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귀한 것들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팔 물건으로 금을 가지고 계십니다. 자기 의라는 종이조각으로 만들어진 지폐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불 속에서 연단된 금을 가지고 계십니다.

횐 옷을 사서 입으라.” 옷은 성경에서 상징적으로 사용될 때는 항상 하나님의 의를 가리킵니다. 신자는 매일의 삶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습니다. 우리는 17절의 묘사와 같이 교만과 자존심의 누더기를 입고 거리를 활보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에게서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그분의 완전하심으로 옷 입고 그리스도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복스런 주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우리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야 합니다. 교만한 종교가는 눈이 먼 까닭에 종종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신자는 새로운 출생에 의해 볼 수 있게 되었으며( 3:3), 우리의 시간과 소유를 그분께 드림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에 대한 보다 나은 깨달음을 사고, 그분을 보다 영광스럽게 하는 삶을 살아가고, 그리고 다가올 영광의 날을 위해 예비된 영적인 부요를 얻게 될 것입니다.

가련한 자들을 위해서는 그분께서 팔 물건으로 금을 가지고 계시며, 눈 먼 자들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완전하심을 볼 수 있는 안약이 있으며, 벌거벗은 자들을 위해서는 찬양과 예배의 옷이 있습니다. 모쪼록 우리 각인이 이 상인의 조언에 주의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시험을 견뎌낼 부()를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993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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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