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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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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9. 16:13 횃불/1993년

인간의 상태에 대하여(2)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과 부활 사이에 어디에 계셨는지요?

 

그분의 몸은 사복음서가 한가지로 제시하듯이 요셉의 새 무덤 안에 있었던데 비해 그분의 영혼은 사도행전 2:37,31(시편 16:10과 함께)에 따르면 음부(Hell: 헬라어로 하데스”, 히브리어로 스올”)에 있었습니다. 이곳은 하나의 장소 내지 혹은 어떤 상태로서 그 성경상의 의미는 오늘날의 용례보다 훨씬 넓습니다. 개역 성경(the Revised Version)의 역자들은 구약 성경 서문에서 그것이 떨어져나간(departed) 영들의 장소를 뜻한다고 설명한 다음 흠정역에 의하면 창세기 37:35등의 구절에 무덤”(grave)이라고 표현되어 있으나 그것은 매장지를 의미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독자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죽어서 그곳에 가기를 기대했고( 37:35:42’38), 욥은 하나님께서 부활의 때가 올 때까지 자기를 그곳에 숨겨 달라고 요청했으나( 14:13-15), 그러나 다른 구절들에서( 9:17, 24:19 ) 그것은 악인이 죽을 때 얻는 분깃으로 간주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옥을, 누가복음 16:26에 따르면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에 의해 의인의 영혼이 있는 곳과 악인의 영혼이 있는 곳으로 나눠지는, 두개의 구분된 영역 내지 상태로 구성된 곳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마도 명기 32:22와 시편 86:13에서 음부 깊은 곳으로 언급된 곳은 후자인듯 하며, 우리 주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하실 때의 그 낙원은 의문의 여지없이 전자를 가리킵니다( 23:43).

사도행전 2:27에 비추어 볼 때 위의 마지막 인용문은, 그분의 영혼에 관한한 주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먼저 죽은 모든 성도들의 영혼이 있는 낙원으로 불리우는 음부의 영역에 있었다는 것이 위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임을 보여줍니다.

 

2. 성도들의 부활체는 그들이 이 땅에서 살던 몸과 동일할까요?

 

우리 주님의 부활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활의 모형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체가 그분이 죽음을 당하실 때까지 지녔던 몸과 동일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동일한 몸이었습니다. “무덤 안에는 수의(壽衣)밖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우리 주님은 갈보리에서의 자신의 잔인한 죽음의 흔적을 지닌 자신의 손과 발을 내 보임으로써, 자신의 몸이 죽음을 맛본 바로 그 몸이었음을 보여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와같이 동일한 몸이긴 했지만 동일한 상태의 몸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과 동일한 법칙에 복종하지 않는 영적인 몸이었습니다. 그것은 임의로 사라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닫힌 문을 그대로 통과할 수 있었으며 보고도 알아 보지 못할 수 있었는가 하면 그런 다음 감자기 알아보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그것은 만지고 느낄 수 있었으며 먹을 수 있었으며 살과 뼈가 있는 실제 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께 영광을 주셨으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본 것처럼 그분의 몸 또한 영화롭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동일한 몸이었으나 새로운 상태 아래 있었습니다( 24:36~43, 20:5,7,13,19,25,27, 3:20,21)

실로 땅 속에 묻힌 몸은 뿌려진 씨앗이며 영화롭게 된 몸은 꽃이로되 그 둘은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씨앗에게 몸을 주십니다. 그러나 꽃을 피우는데 사용되는 모든 요소들은 전에 그 씨앗 속에 있던 것들입니다. 정원사는 씨앗으로 꽃을 알아낼 수 있으며 반대로 꽃으로 씨앗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성도들은 뜰에 뿌려진 그 특별한 씨앗으로부터 나오는, 알아볼 수 있는 영화롭게 된 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 혼란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며우리는 모두 그분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고전 15:37,38,44,49)

 

3. 이 세상의 친구들과 친척들은 하늘에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성도들 가운데 이런 질문이 종종 제기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덕을 세우기보다는 호기심을 만족시키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세가지 성경구절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13:28).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나사로를 보내어····”( 16:24).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사를 위하여 하리이다”( 17:4).

유대인들은 족장들과 모든 선지자들을 알았을 것이며, 부자는 나사로를 알아보고 아브라함을 알았으며, 그리고 사도들은 모세와 엘리야를 알았습니다. 만일 미래 상태에서, 혹은 신령한 상태 아래 이 땅에서조차, 전에 알지 못하던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다면, 이미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얼마나 더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상황이 완전히 바뀌고 새로운 관계가 정립되면 옛 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조차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성도들의 모임에서 일시적으로 적용됩니다.

, 그들이 교회 안에 있을 때 지상적인 관계가 일시적으로 중지되는 가운데 그들의 실체는 존속하게 되는데, 제가 믿기에 미래의 상태가 아마 그러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지상적인 대인 관계(relations and affections)가 천상적인 것으로 영원히 대치될 것이나 인간의 실체(personality)는 결코 그 동질성(identity)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4. 누가복음 12:47,48, 계시록 20:12 등과 같은 구절들은 악인이 죽은 후에 당할 형벌에는 차등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지요?

 

그 구절들은 확실히 그렇게 가르칩니다. 특히 앞의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일반적인 원칙임이 분명한 것, 즉 형벌은 그 행위 자체에 내재한 악의 양에 따라서가 아니라 죄인에 의해 소유된 선악을 아는 지식의 양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인의 뜻을 안 종은 단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부작위(不作爲)의 죄 때문에 많은 매를 맞는데 비해,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한 종은 그에 의해 행해진 악한 일들 때문에, 작위(作爲)”의 죄 때문에 적은 매를 맞습니다.

이와 동일한 원칙이 크게 강조된 또 다른 구절로 마태복음 11:20~24를 들 수 있는데, 거기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가장 많이 복음을 전한 도시들에 대해 저주를 선포하시면서,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과 심지어 소돔이 그 도시들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93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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