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3. 7. 12. 12:52 횃불/1993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신 혜 영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23:3).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왔던 나에게 있어서의 신앙생활은 나 자신의 생활철학과 맞는 것이었다. 남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도와주고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고 겸손자로 다른 사람을 존중해 주는 것이었다. 또한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나의 목표에 다가서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된다면 기꺼이 버리는 것이 나의 철학이었다.

그런데 그 철학이 나의 삶 속에서 서서히 침몰되어가기 시작했다. 그 첫번째 일이 나의 가장 가까운 남편에게서 시작되었다. 나의 모든 것을 전부 희생하고 남편에게 진정으로 맞추어서 살아가던 나에게 남편이 반기를 든 것이다. “당신은 나를 위하여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어.”

이 말이 나오기 전까지의 그는 모든 것을 침묵으로 일관해 왔었다. 남편은 본래 말이 없고 표현이 없던 사람이라 그가 나를 사랑했었다는 사실과 우리의 만남의 햇수가 더할수록 죽었던 고목이 회생하듯이 그의 모습에서 기쁨과 슬픔이 표현되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었고 행복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와의 결혼 후 말수 없고 내게 자상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그가 바뀌어지기를 바라면서도 그가 점점 더 말이 없어지고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 대한 무관심이 모두 다 그의 탓이며 내가 그를 위해 사는 것이 굉장한 봉사이며 희생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상의 삶을 살아간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허물투성이며 나는 완벽한 아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이 나에게 감사하며 미안해 하며 살고 있다고 착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한 나에게 던져진 이 한마디의 말은-당신은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어- 청천 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잘못되거나 후회할 일을 전혀 하지 않았고 남편에게 대들거나 싸움을 걸거나 출세를 재촉한적도 없이 항상 조심스럽게 남편을 섬겨왔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의 말은 나의 인생 전부를 허물어트리기 시작했고 내가 살아온 것에 대한 최종 판결문과 같은 것이 되었다 몸으로는 열심히 일을 해도, 남편에 게 열심히 봉사해도 마음의 평안이 없었던 것이다. 말이 없어서라고 더 이상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의 마음속은 냉랭한 겨울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겨울 바람과 마주하고 사니 어찌 내 마음이 평안했겠는가! 남편의 마음 속 사람을 알지 못하고 밖에 보이는 다른 것으로 그를 채우려 했던 것이다.

그 즈음의 나에게는 또 하나의 두번째 고통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남편은 교회를 다니지는 않아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아내의 교회생활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교회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로라는 지침까지 정해주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든지 계시므로 나의 생활권 내에 교회를 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의 교회생활은 어언 8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2년간의 외국생활을 하고 돌아온 1991년 새해부터 난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그것은 이사를 온 후 교회를 정하지 못했고 앞서 말한 평안이 없는 생활의 연속으로 하루하루 인간적인 계획으로 살아가느라 하나님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해 6월 어느 날 일요일 밤 예배 시간에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의 절망 가운데 교회를 찾아 나섰다. 어느 한 교회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그 평안함과 작고 아담한 교회의 정겨운 모습에 나는 푹 젖어 들었다. 남편에게서 채워지지 않았던 허전함이 사람들로 가득찬 교회 안의 온기로 꽉 차 오르고 있었다. 그날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사랑이 넘치는 교회에 대한 것이었고 주제는 행복론이었다. 난 그때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몸이 따뜻해짐을 느낄 만큼 사랑에 목말라 있었다. 그래서 난 사랑이 넘치는교회를 다니기로 했다. 내 마음을 따뜻하게 녹이고 슬픔을 위로해 주는 곳이라고 믿으며····

그런데 여기서부터 나의 신앙 갈등은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어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하여 다녔던 곳에서 인생의 자랑과 신앙의 연수 자랑과 질투와 시기가 가득한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사를 다니면서 다닌 몇 군데 교회에서는 그런 갈등이 없었던 터라 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직 어리게만 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구역장님들의 보호와 사랑으로 새싹처럼 자랐던 것이다. 경쟁심으로 가득 찬 사회의 축소판인 그 곳에서 내가 떠날 것인가? 하나님이 주신 고난으로 알아 고난을 끝까지 참고 버티어 선으로 악을 이기는 일을 감당할 것인가로 마음의 번복을 몇 번이나 하면서 어두움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에 한번 다녀오기만 하면 정죄할 일이 생기고 마음에 상처를 받는 것이었다. 이제 남편에게 상처받고 교회에서 상처받고 나의 영혼이 쉴 곳이 없었다. 나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시인하며 주님께 부르짖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주여 도와주소서-.”(난 이때부터 신앙 메모를 시작했다.)

8월 한달 큰 딸 아이의 여름 방학 내내 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아파트 내에서 칩거생활을 했다. 결국 나의 이란 무엇이 되었는가? 악에게 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문밖에 나가기가 싫었고 두려웠고 다 의미가 없어졌다.

그러던 중 8월 말 어느 날, 난 이 모든 것이 내가 할 일이 없기 때문에 투철한 직업의식이 없기 때문에 남편에게 의지심이 생기고 그래서 그의 사랑의 표현에 애착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직업을 가져 남편에게서 해방되어 서로 인격적으로 독립되어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그건 2개월만의 집 밖 외출이었다. 처음으로 세상에 나섰다. 남편에게서 독립되어 내 삶을 찾기 위해서····내가 여성직업인으로 성공해서 남편이 나를 바라보며 존중해 주기를 바라며···· 그래서 남편을 위해 해 주는 것이. 많은 여성이 되어 사랑을 듬뿍 받으며 이젠 사랑 때문에는 교회를 찾지 않으며 나만의 하나님을 섬기리라는 마음으로····

그런데 그 날의 외출은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발걸음이 되었다. 두 아이들 점심을 햄버거로 사주고 함께 서점에 들러 책을 고르던 중 옆에서 딸 아이의 책을 고르던 어떤 분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게 되었고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난 그분에게 어떤 교회이건 간에 한번 간 곳에서 옮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해서는 안되는 일이 아닌가 하고 물어보게 되었다. 한곳에서 적응하지 못하면 어디에서고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옮기는 사람이 문제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며 난 여전히 나 자신의 의와 선을 내세우고 있었다.(나는 문제 있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교회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난 이 말을 잠깐 정리해 보아야 했다 그렇다면 교회를 옮기라는 말인가 옮기지 말라는 말인가?’ 그리고 난 계속해서 물었다 성경 1권을 통틀어서 내게 주는 가장 중요한 말은 무엇인가? 하고, 난 그의 대답이 사랑일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런데 그가 구원이라고 말하였을 때 난 머리를 망치로 맞는 듯하게 정신이 들며 처음 듣는 생소한 말인 듯 그 말을 입으로 되뇌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낮에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다는 기쁨을 딸 아이의 말에서 확인했다. 회사에서 돌아오신 아빠에게 자기와 엄마가 오늘 예수님을 만나고 왔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난 딸 아이가 먼저 예수님이란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직업을 향해서 떠났던 내 걸음은 구원과 나의 생각으로 일단락되어 집으로 향해지게 되고 말았다(또한 그분과의 대화에서 여성의 직업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도 배우 되었다). 그렇다. 나는 사람들의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서구원받는다고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성경 말씀(계명)대로 선하게 살면 그 사랑의 자연스런 결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처럼 의로운 자처럼 살려는 내 노력이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의롭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나쁜 길로 가지 말라고 이 길로 가라고 가르쳐 주고 난 후 그 사람들이 나를 대적할 때 상처를 입곤 했다. 나는 그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는데 나를 대적하다니 나의 자존심이 한없이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나의 껍질은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다 며칠 전 서점에서 만난 분의 소개로 서대문 교회를 방문하고 동대문 교회를 다녀와서 내가 사이비 그리스도인이라는 느낌을 전해 받았을 때 난 한없이 절망하며 울었다. 그때 주님은 성경 한 귀절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말씀은 내가 성경에서 발견한 살아있는 첫번째 말씀이었다.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인도하심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 난 교회 예배가 끝난 후 서점에서 선 채로 책 한 권을 읽게 되었다. ‘현대의 바리새인이 책 속에서 바리새인의 정의를 보니 그 시대에 바리새인은 백성으로부터 존경받는 가장 덕망있는 인사였다고 씌어 있었다. 도덕적으로도 학식적으로도 훌륭하여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난 둘 중의 누구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세리처럼 죄를 지은 것도 없으니 회개할 것도 없고 바리새인처럼 난 무엇을 했네하고 내세우는 것도 없으니 이만하면 깨끗하고 이만하면 겸손하다고 스스로 평가했던 내게 이 책은 도전으로 다가왔다. 난 두번째 망치로 맞았다. 첫번째는 인간의 사랑의 형식으로 의를 이루려 했으나 구원은 하늘에서 오는 것임을 안 것이고, 두번째는 가장 의로운 것으로 보이던 나의 선과 의가 결국은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임이 판명되었으므로 난 죄인임을 안 것이다. 나의 선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했던 교만 죄를 알았다. 그러나 내 속의 다른 죄들은 아직 죄로 다가오지 않은 채 난 계속 죄인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1993년 새해가 밝았다. 신정 연휴를 보내고 난 다음날 새벽 유난히 일찍 눈이 뜨여진 나는 주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나의 과거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은혜로 살아온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 흘리며 나의 현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얼마나 감사를 했는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선물로 알지 못한채 불평불만을 했던 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학창시절부터 대학입시, 남편을 만난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이며 사랑임을 알았다. 불쌍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그토록 오래 깨닫지 못하던 나. 이때 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가 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 해도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자

그러나 난 아직 내가 어떠한 죄인이며 십자가의 보혈이 나를 위한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내가 남편에게 했던 과거의 내 모습이, 하나하나 어리석은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남편에게 내가 상처받고 산 것이 아니었다. 10년간 그가 내게 상처받고 산 것이었다. 아내 앞에서 느끼는 무기력감, 모든 것을 다 해치우고 난 이런 일을 했으니 알아 달라는 아내. 내가 원하는 대로 집에서는 산뜻이, 휴일에는 산책을, 가족과의 대화를 등등의 슬로우건을 내세운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면 남편이 하기에 싫은 것일지라도 난 그것이 진리인양 끝까지 해 내었던 것이다. 한가지 예로 집을 쓸고 닦는 것을 남편은 부담스러워 했었다. 그는 양복에서 먼지가 떨어질까봐 걱정 할 정도였다. 그에게서 10년 만에 나온 말, ‘제발 청소하지 마.’ 지금 이 글을 쓸 때 내 가슴은 떨린다. 남편이 이런 일로 느꼈을 중압감 때문에 오는 떨림이 내게 전해 오는 듯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무게 있는 남편으로서 아무 대답 없이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것이다. 부인을 무시하는 듯이 보이며(나는 이로 인해 한없는 절망감에 빠졌었다.)

1 12일 신촌 어느 자매님 댁에서 교제가 있다는 전화를 받고 그날 상황이 다른 약속이 있었던 터라 갈 수가 없었는데 강권적인 하나님의 인도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날의 모임은 구원받지 못한 남편을 가진 자매님들의 모임인데 나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모른 상태에서 남편의 구원을 갈망하는 그 모임에 가야 되는지 망설이기도 했었다.

나는 그 모임에서 솔직하고 담담한 심정으로 그동안 느끼고 있었던 부부간의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그 모든 원인이 남편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내인 나의 무지와 아내인 나의 잘못된 헌신에 있었다고 시인했다 그날의 교제를 통해 나는 나의 모습을 낱낱이 고백하며 나의 율법적인 삶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나의 목표가 되어 강한 방해막으로 남편과 나 사이를 가로막았던 힘이 나의 허물 많은 모습을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축복 속에 난 하루하루를 보냈으며 먼 곳에서 오는 남편과의 전화로 남편의 달라짐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남편은 2개월 전 외국현지지사에 먼저 가 있고 나는 나갈 준비 중이다).

이런 상태에서도 아직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구정을 앞두고 난 두려움 속에 싸이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과 사단의 싸움으로 하나님이 이긴 것이란 말을 듣고 사단이 하나님의 경쟁자라는 것이 너무 무서워졌다. “어찌 하나님이 사단과 싸운다는 말인가? 그럼 그는 전능자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던 중 집을 방문해 주신 ㅇㅇㅇ 님의 도우심으로 의심이 사라지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사단의 역할이 악의 역이며 선과 악이 공존할 때 선을 알 수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사단의 존재가 두렵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지만 이 때의 두려움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예비하신 것이었다.

1 23일 구정을 시댁에서 보내고 온 일요일. 난 그날부터 만 3일을 고통 속에 보냈다. 죄의 찌꺼기가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어두움과 거짓과 더러움, 인생무상과 덧없음. 온갖 추악이 아름다운 감상으로 되어 내게 다가왔다. 시인의 마음이 되어 인생을 노래하고 사의 찬미를 하며 남녀간의 불륜도 아름다움으로 느껴지게 되기까지 하였다.

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나의 주가 되시며 영혼을 소생시키는 하나님, 나의 영혼을 온전히 주께 의탁하나이다. 기생 라합의 신앙고백처럼 나도 신앙고백하기를 원합니다.

1 27. 오랜 만의 겨울 잠에서 깨어난 짐승처럼 난 깨어났다. 내 마음 속에 숨어있던 죄가 다 나타났을 때 난 진정 죄인의 자리에 와 있었고 그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어야 함을 알았다( 9:22, 벧전 1:19).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이 다가왔다. 나의 죄가 다 드러난 일이 은혜의 날이었다. 나의 마음속에 그런 더러운 죄가 숨어있었다는 것이 과거의 나의 의로운 성격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으나 오호라 곤고한 몸이로다하며 작은 실수와 죄에도 괴로워했던 나에게 하나님은 나는 결국 죄인일 수 밖에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한없이 사랑하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를 구원해 주심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나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과 같은 죄인일 수 밖에 없었다. 남편으로부터의 상처, 교회에서 받은 상처, 이 모든 것이 내가 만든 율법의 덫이었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20).나의 율법적인 삶이(나의 선으로 하나님께 이르려는) 남편에게 끼쳤던 부담감과 무기력증, 교회생활에서 원하며 바라던 완벽주의 때문에 당하는 실망감이 다 나의 죄성을 시인하기 전의 나의 모습에서 온 것이었다.

2 3일 새벽 네 죄가 다 탕감되었느니라.” 나의 머리에 맴도는 말로 잠에서 깨어났다. 난 이 말이 성경 어느 부분에서 내가 잃고 외운 것인지 기억하려고 해보고 이건 내 생각으로 만든 말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이건 주님이 주신 은혜였다.

찬송가 473( 16:22, 너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내 마음 속에 참된 평화 있네.

주 예수가 주신 평화

시험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아.

아 귀하다 이 평안함.

주가 항상 계셔 내 맘속에

주가 항상 계셔 아 기쁘다.

주 나의 맘에 계셔 위로하시네

어제 내가 주를 떠나 살까.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느니라”( 9:22).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9).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

나의 신앙 고백이 된 것이다.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주님, 주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을 깨닫게 하시며 내가 죄인임과 그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사함받은 사실이 깨달아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영광 돌립니다. 아멘.

 

(1993 7,8월호)

 

'횃불 > 1993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임 있는 자유  (0) 2013.07.12
밧줄  (0) 2013.07.12
횃불칼럼 - 만물이 다 너희 것  (0) 2013.07.12
대령님의 말씀은 틀림없어!  (0) 2013.07.12
교육보험증서  (0) 2013.07.12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1)  (0) 2013.07.12
인간의 상태에 대하여(2)  (0) 2013.07.09
고뇌하는 사역자  (0) 2013.07.09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