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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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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26. 17:22 횃불/1994년

나실인의 서원(5)

-도날드 노비

이 글은 1994년 노량진교회에서 강연한 내용을 지면에 옮긴 것입니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3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4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5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6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7 그 부모 형제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

8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

( 6:1~8).

 

구별한다는 말씀은 얼핏 보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말씀 같습니다. 여기에 남자나 여자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리기 위해서 자기 몸을 구별할 경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것으로부터 구별될 것만 말씀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구별될 것에 관해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주님 앞에 드리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구별하는 대단히 적극적인 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각 사람이 주님 앞에 결정해야 될 문제이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와같은 선택을 여러분의 부모가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대신 결정해 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결정해야 될 문제입니다.

이것은 주로 주님 앞에 구별해서 드리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에게 우리 자신을 구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구속하신 분에게 우리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바치신 분에게 구별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이것을 결혼과 관련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세계 모든 민족으로부터 구별된 민족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가리켜 내가 너희를 택했노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그 백성이 주님께 구별된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 청년이 한 여자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 구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한여자는 한 남자를 자기만의 주인으로 모시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같이 이 구별이라는 낱말은 적극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별을 생각할 때 우리를 소외시키는, 고립시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자신을 구별할 때 여러분과 영원토록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고립일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한 형제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혼자 살고 있나?” 처음에는 그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저를 찾아와서는 제가 진실된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제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동안 주님은 전과 달리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계셨다고 정정해서 말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구별된 사실에 대해서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구별이라는 낱말은 소극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쾌락을 버리는 것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이 쾌락들 가운데는 죄악 된 것도 있습니다. 또한 정당한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구별된 사람은 주님 앞에 나는 최선의 것을 드리고 싶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여러분이 정당한 어떤 것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죄악된 것들은 반드시 구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아주 악한 세상입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도록 유혹합니다. 그는 우리 영혼의원수입니다. 이 마귀는 우리가 죄악 가운데 빠지기를 원합니다. 죄는 점점 우리를 지배하게 되고 주장하게 됩니다. 특별히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물론 다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 중독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부정직한 일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형무소에 가서 과거에는 아주 성공했던 사업가를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돈에 대한 욕심이 점점 자란 나머지 불법적인 방법으로 사업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사회에서 존경받던 그 사람이 이제 형무소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는 죄의 노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조금만 일찍 들었었다면 이와 같은 일은 없었을 텐데하며 후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과 세상의 유혹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독자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독자는 허영이라는 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허영의 시장에서는 여러가지 종류의 물건을 팔고 있었습니다. 어떤 곳에는 죄악된 쾌락을 팔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더 정당한 쾌락을 팔고 있었고 또한 종교도 팔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기 위해서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늘나라 가는 길을 떠나서 이 세상에 안착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죄악의 쾌락을 즐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기독도는 마음에 번민하면서 무엇을 살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사고 팔지 말아야 합니다. 이 허영의 시장에는 진실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면 마귀는 여러분이 그리스도로부터 떠나도록 유혹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전심으로 헌신하나 안하나를 마귀는 주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교를 가지면 마귀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저 교회다니는 것만으로는 마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또 교회의 의식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 앞에 구별될 때 마귀는 그것을 못하게 막습니다. 사단이 여러분을 공격하여 구별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것에 빠지는 것을 볼 때 대단히 슬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출발은 잘했는데 후에 믿음의 길에서 떠나는 것을 볼 때 슬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유용한 그릇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점점 표류하여 이 세상의 일에 안주하고 말게 됩니다.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갑니다. 나이가 든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면 인생이 참 짧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주님 앞에 인생을 드리고 주님을 위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구별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구별되었을 때 이것은 혼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혼자 있기 위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3 11절 말씀을 보십시오.”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요”( 16:27).

이것은 속죄일에 있을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 날은 매우 엄숙한 날입니다.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그는 먼저 자기를 위해서 피를 뿌리고 그 다음에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언약궤 앞에 피를 뿌립니다. 백성들을 위해서 죽임을 당한 양의 피를 대야에 담아 들어가서 언약궤 앞에 뿌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속죄제라고 합니다.

어린 양의 피는 언약궤의 속죄소 위에 뿌려지지만 그 속죄물은 죄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밖에 갖다 불살라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백성들로부터 분리되어서 영문 밖에서 불살랐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주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위해서 속죄제물로 삼으신바 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성문 밖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또한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빌라도와 그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영문 밖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가자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문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별할 것을 말씀합니다. 또한 세상과 그 종교로부터 떠날 것을 말씀합니다. 이 영문 안에서는 여전히 성전 예배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이 영문 안에 있는 종교에 의해서 버림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악한 원수가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진정으로 전하게 되면 여러분의 대적이 종교로부터 옵니다. 제가 처음 주 예수님을 믿었을 때 제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제일 분노하셨습니다. 그는 아주 당황해 했습니다. “지금까지 네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느냐? 네가 유아세레도 받았고 네가 착하게 살았고 또 우리 교회의 교인이 아니냐? 너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가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노했던 것입니다. 종교는 오늘날도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문 밖으로 나갈 때 우리는 홀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문밖으로 나가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구별됐을 때 우리는 동시에 주의 백성들에게 구별된 것을 의미합니다.

오순절날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거기에 많은 군중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2:41,42).

이날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했습니다. 또한 그분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또한 이 예수님을 통해서만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성령이 진정으로 역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들은 말씀을 믿었습니다. 구주 예수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을 영접했습니다. 또한 믿음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공중 앞에서 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회생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들이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을 영접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수일 전에 이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분입니다. 그들은 침례를 받음으로 성안에 있는 종교단체로부터 자신들을 격리시켰습니다. 그들은 침례를 받는 행동을 통해서 성문 밖으로 나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단체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홀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백성들과 함께 성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정기적이고 규칙적으로 모였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도 있고 성도의 교제도 있고 성찬도 있고 기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로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여러가지 묘사가 쓰였습니다. 이 묘사가운데 하나는 양무리라는 표현입니다. 양은 공격받기 쉬운 짐승입니다. 방어를 할 수 없어 항상 목자를 필요로 합니다.

저는 산에 올라가서 많은 무리의 양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목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양들은 항상 서로 모여있습니다. 왜냐하면 무리로부터 떠나게 되면 늑대나 큰 짐승에 의해 희생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에 대한 묘사가 양무리입니다. 우리는 양들과 같이 모여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강조해 드리고 싶습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별될 때 홀로 있기 위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기 위해서 구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무리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1994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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