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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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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9. 15:50 횃불/1995년

결혼과 가정(2) -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

 

조상들의 본

인근 기독교 서점에 들러서 잠깐 살펴보기만 해도 결혼에 관한 서적들이 불티나게 팔린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혼에 관한 서적들은 각 분야에 걸쳐서 풍성히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완전한 배우자를 선택하는 법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생활을 시작하는 법을 마치 보증수표를 얻는 것처럼 배우고 그래서 시들해지는 여러분의 관계를 다시 불타게 할 수 있습니다.

작금의 인기있는 기독교 저자들은 결혼에 관하여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신중을 기하여 자신의 완전한 저술 속에 포함시켜 놓으신 것들을 재발견했을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그 저술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성경입니다.

혹자는 지금쯤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결혼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오늘날 결혼에 대한 공격과 사회의 압박은 우리 세대에게 실로 새롭고 독특하다고···· 그러나 창세기를 대충 공부해보기만 해도 실상은 그 반대임을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결혼 서약이 교환되기가 무섭게 사단은 결혼을 훼방하고, 모조하고, 파괴시키려고 암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매우 그럴듯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고, 꽤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에는 라멕이 일부다체제의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모습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는 에덴동산의 결합이 상징하는 모든 상황과 정반대였습니다. 9장은 함의 볼꼴사나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으며, 16장에는 간음이 등장합니다. 소돔은 동성연애의 동의어처럼 되어 버렸고, 38장에는 근친상간이 유다 왕족에 출현하며 38:24에는 매춘이, 39장에는 유혹하는 장면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라 해서 결혼에 대한 압박이나 비정상적인 결혼이 더욱 증가되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죄악들을 최소로 억제하던 억제력이 사라진 것과 그런 죄악들의 발생 빈도나 사회적 관용도가 증가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런 죄악들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뜻입니다.

혹시 독자 중에, 자기는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제외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바울의 말을 앙심에 새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보호를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5). 그리고 만일 이 글을 읽으면서도 우리 마음에 아무런 감동이 없다면 우리 모두는 각성하여, 사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손상시키고 파괴시킨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 속에는 여러분의 결혼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모범들을 창세기에서 탐구해 보면 언제나 유익을 얻는데 결혼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결혼들은 완전한 것들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결혼이 어떠한 모습을 지녀야 하는지 그분의 의도를 계시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원칙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 원칙들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여러분에게로 하달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이브-떠남과 연합

하나님은 위대하신 선생님입니다. 그분은 천천히 참을성 있게 가르치십니다. 때때로 그분은 교훈을 가르치실 때 한번에 한가지씩 가르치십니다. 아담과 이브를 통해 가르치시는 교훈은 결혼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연합에 관여하시며, 이것을 여러 각도로 우리에게 깊이 교훈하십니다. 다른 사항은 접어두고 창세기 5:2의 말씀으로도 충분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그들의 이름을 아담이라 일컬으셨더라”(우리말 성경에는 아담사람으로 나와 있음-역주). 이것을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습니다. “하늘의 산수에 있어서는 ‘1’ 더하기 ‘1’‘1’입니다.”

그들의 연합(하나됨)은 무엇보다도 여타의 유일무이한 기원을 통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은 흙으로 지어졌음에 반해(2:19) 이브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유일한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최초부터 다른 모든 것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이 동종(同種)의 한 쪽에 대한 중요성을 아담이 모를리 없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맨 처음 발했던 말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기원을 사용하여 이 하나됨을 그에게 가르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유일무이한 적합성을 사용하여 그 하나됨을 우리에게도 역시 가르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하여 모든 것이 좋았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평가를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담을 보셨을 때에는 이상하게도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좋지 못하다고 지적하신 점은 바로 아담의 독처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아담에게로 이끌려 나왔지만(2:19) 그를 돕는 배필이나 혹은 그에게 적합한 존재는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돕는다는 개념은 아담의 종 내지 조력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단어는 이런 용도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것과 동일한 단어가 시편 10:14 22:19, 30:10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에 관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속히 나를 도우소서”, “여호와여 나을 돕는 자가 되소서.”

우리는 돕는다는 단어의 원래 개념에다 열등(劣等)이나 굴종의 의미를 첨가해서는 안됩니다. 여자는 남자의 적합한 동반자요 보충자가 되도록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타락 이전부터도 아담은 머리였고, 여자는 그 아래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이 그들의 완전한 적합성보다 더 강조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이 완전한 적합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계획하신 연합(하나됨 )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가지 요소만 더 살펴보고 하나님이 우리의 첫 선조를 통해 가르치시고자 하는 교훈을 마무리짓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생각에, 필자가 지금 대강 말씀드리고 있는 사항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도는 좀 달랐을 것이다라고 여겨진다면 창세기 2:24을 한번 살펴보시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우리가 이 말씀에 너무 익숙해 있다 보니 한가지 놀라운 사실 하나를 간과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아담에게는 떠나야 할 부친이나 모친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분은 아담과 하와를 겨냥하여 말씀하지 않으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과 목적을 교훈하셨습니다.

떠나라는 단어는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되돌이키는 것을 결로 용납하지 않으며, 이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떠남이 없이는 하나님이 하나됨을 위하여 계획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우리는 결코 파악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남자에게 해당되지만 여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여자도 자기 부친이라는, 하나의 머리에서 자기 남편이라는, 다른 머리로 복종의 자세를 옮겨야 합니다. 자기 부친의 집에 있을 때 가졌던 부친에 대한 복종의 자세를 포기하고 새로운 머리됨을 확립하는 것 역시 남편의 중대한 책임입니다.

부모를 떠나는 것은 그저 육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단어는 배우자의 흠을 자기 부모에게 이야기할 때 신중을 기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원칙적으로 자기 배우자에게 더 충실해야 합니다. 요리법이나 집수리에 관하여는 부모에게 문의할 수 있으나, 자기 배우자의 결점을 어떻게 하면 모두 뜯어고칠 수 있을까에 대하여서는 부모에게 조언을 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연합하라는 단어 역시 강한 의미와 요구사항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아교로 붙인 자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는 이제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좋지 못할 때 자기 배우자를 떠나 부모한테로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기준에 허리를 굽혀야만 그 원칙들을 실천해 나가면서 결혼생활의 풍성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떠남과 연합의 결과는 한 육체가 되는 것인데 이것은, 결혼의 결합이 단지 육체의 결합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영적인 하나됨은 아니지만, 육체적인 것을 초월하여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면까지 포함하는 연합입니다. 필자가 이 하나됨에 관계된 사항들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하나됨 안에서 결혼의 궁극적이고 가장 중대한 목적은 볼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혹자는, 하나님이 원래 인구를 증가시킬 목적으로 결혼을 제정하셨다고 반론을 제기할지 모르나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식없는 부부는 실패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며, 혹은 노년에 결혼한 부수는 하나님의 계획을 결코 실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5:31,32에서 말한 이 비밀이 크도다라는 말은 결혼에 관계된 비밀이었다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서 계시하시기 전까지는, 어떤 것을 그분의 크신 가슴 속에 감추어 두셨습니다. 그 큰 비밀은 교회가 아니라 결혼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남편을 주()로 인정함

아브라함과 사라의 결혼은 남편이 아내의 주인이라는 재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주석입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사라가 어떻게 불신하고 있는지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녀의 영성(靈性)은 슬럼프에 빠져 있었는데 이것에 관하여 베드로가 뭐라고 언급하는지 주목해 보셨습니까? 베드로전서 3:6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녀는 언제 아브라함을 주라고 불렀습니까?

필자가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구절은 그녀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기록된 곳입니다. 이 부분을 주목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아픈 심정으로 제공하시는 교훈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패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서 칭찬할만한 점을 발견하셨는데 그것은, 그녀가 아브라함을 주라고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혹자는 그녀가 창세기 16장에서 순복하는 아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가지 긁고 불평하는 아내로 나타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녀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아마도 아브라함이 주로서의 역량을 잘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18장에서도 그를 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순복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만 젊은 부부들이 깨달아야 할 점은, 순복이 어떤 것의 본질 내지 성질 또는 가치를 다루는 단어가 아니라 자세를 다루는 단어라는 사실이며, 이 단어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사용된 용도를 살펴보면 우리는 위의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제시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우열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순복은 남편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원하는 바를 하도록 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순복이 남편을 변화시키는 수단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자기가 해야 할 도리를 다 한다고 해서 남편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순복은 그 자체가 명령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5:22) 순복할 때 바울은 주께 하듯 하라고 권하고 있는데 이것은 원념(怨念)이나 불평을 품은 채로 복종하는 태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디도서에서 권면하기를, 늙은 여자들은 젊은 여자들에게 순복하기를 가르쳐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순복이 남편에게 최대의 조력과 영향을 줄 수 있는 수단이라고 제안했습니다(벧전 3).

순복에 관해서는 앞으로 자세히 다루게 될 테지만 이 시점에서는, 그것이 창세기에 제시된 결혼의 필수 요소이자 하나님께 칭찬받는 요소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사랑

이제 우리는 좀 기이하게 생각되는 사항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만일 필자나 혹은 여러분이 창세기를 기록했다면 아담과 하와가 나누었던 깊은 사랑에 관한 묘사를 에덴동산에 관한 기록에 포함시켰을 것입니다. 혹 이것을 거기에서는 빠뜨릴지라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감동적인 이야기 속에는 포함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삭과 리브가에 이를 때까지는 남편과 아내의 사랑에 관해서 어떠한 언급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삭과 리브가를 제외한 이전의 부부들은 다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어떤 교훈을 우리에게 점진적으로 가르치고 계시는 것일까요?

필자가 어떤 진리 하나를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좀 과장해서 표현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진리는 아마도 서양인들의 견문과 생활방식에 몹시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그것은 사랑이 결혼의 기초가 아니라 결혼이 사랑의 기초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24:67에 제시된 순서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또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을 상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약혼한 남자가 아낀) 남편들아 (약혼한 여자가 아닌) 자기 아내를 사랑하라.” 사랑에 대한 강조는 언제나 결혼 뒤에 오고 있습니다. 물론 필자는 결혼을 결정함에 있어서 사랑이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 제시된 사랑은 정욕과 열애 사이를 오가는 연속극의 감정 따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기있는 성악가나 시인의 서정시를 가득 메우는 주제도 아닙니다. 세상이 이런 종류의 사랑을 노래하고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이혼율은 더욱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사랑은 결혼을 밀착시켜주는 시멘트가 분명히 아닙니다.

결혼을 밀착시켜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헌신, 다시 말해서 자기 배우자를 남편과 아내로서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서 서로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부단히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부부는 사랑이 사라졌음을 발견할 때에도이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변명으로도 나는 그녀(그이)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어요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결혼의 헌신 안에서만 풍성해질 수 있으며, 오직 내가 배우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 나는 나의 마음을 배우자에게 알릴 수 있습니다. 이런 확신이 없으면 나는 감히 나 자신을 배우자에게 알리려고 모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만일 내가 이런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다면 나는 창세기 2장이 말하는 그 하나됨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혹 어떤 부부가 나중에 비극적인 발견을 하고 생각하기를 우리들이 차라리 결혼하지 말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구나라고 한다면 이런 때는 어찌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남편보고 자기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령하셨다면 그것은 가능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랑하기를 배우라바로 이것이 성경의 조언입니다.

때때로 필자는 결혼을 앞둔 짝들과 더불어 관계서류에다 서명을 해야 할 때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 필자는 그런 기회를 사용하여 결혼에 관한 그들의 개념을 진단해 보곤 합니다. 그러나 자기들은 사랑에 빠져있기 때문에 만사가 다 잘 될거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필자는 기가 막힙니다. 이런 짝들이 별거와 이혼의 격동에 시달리며 필자에게로 다시 올 때 필자는 슬픔을 금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는 속세에는 사랑만 있으면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는 개념이 널리 유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결혼이 문제를 확대시킵니다.

 

야곱과 라헬-주도권

야곱과 라헬의 본을 한가지 더 살펴보고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야곱도 역시 자기 아내를 사랑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주도권을 잡도록 해준 근거였습니다. 그로 하여금 그녀와 자기 가족을 주도(인도)하도록 만든 것은 어떤 독불장군식의, 광적이고 왜곡된 개념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이었습니다.

창세기 30:25 31:414에서 필자는 야곱이 자기 계획을 아내(불행하게도 아내들)와 더불어 의논하고 시간을 내어 자기 아내의 말을 들어주는 모습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냉혹하게 몰아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32:2123에서는 그가 아내의 보호와 안전을 보살피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35:14에서는 영적인 일에 주도권을 잡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혼에 있어서 야곱의 실패점들도 열거할 수 있지만 당면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고, 필자는 다만 위에서 말씀드린 조상들의 결혼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위하여 얼마나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를 나타내 보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 부모를 떠나 연합하는 것, 남편을 주()로 인정하는 것, 사랑, 주도권을 잡는 것은 성서적으로 결혼의 근본요소들입니다.

필자는 결혼에 관한 정의를 잘 내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창세기에서 함께 상고해 본 사항들을 요약해 본다면, 결혼이란 두 사람의 일생 동안 서로에게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것, 즉 서로 품어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위해 자신의 영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95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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