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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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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9. 15:52 횃불/1995년

다아비의 성경 개요 - 마태복음

 

그러면 먼저 마태에 의해 기록된 복음서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이 복음서는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들과 관련하여 제시하는 한편, 임마누엘, 구원자 여호와로도 제시하는데 이는 그분께서 그러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영접되었다면 그 사랑하는 백성을 위하여 그 약속들을 마땅히 성취하셨을(장차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분이십니다. 이 복음서는 사실 그 백성에 의해 그분이 거절당하신 역사요, 그 결과 그들의 책임이 관계되는 한 그 백성들 스스로 정죄를 당한 역사요(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할 수 없으므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따라서 허락하실 것의 대체(substitution)입니다.

점차 왕과 왕국의 특성이 드러나고 백성의 지도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킴에 따라, 그들은 그것에 반대하고, 메시아의 임재와 관련된 모든 축복을, 그들을 좇는 백성들에게서는 물론 그들 자신에게서도 빼앗습니다. 주님은 그 결과를 그들에게 선포하고, 그분이 거절당한 후에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의 모습과, 그로 인해 그분 자신과 그분과 함께 한 그분의 백성에게 주어질 영광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위() 안에서, 또 그분의 사역과 관련하여, 교회의 기초가 계시됩니다. 교회는 그분 자신에 의해 세워질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스라엘에 의해 그분이 거절당한 결과로 먼저 현재 존재하는 왕국이 계시되고(13) 그 다음에는 교회가(16), 그 다음에는 영광 중의 왕국이(17) 계시됩니다.

끝으로, 그분의 부활 후에 모든 민족에게 전해진 새로운 명령이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 보내진 사도들에게 주어집니다.

 

1

이 복음서를 기록케 하신 하나님의 성령의 목적은 여호와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들과 메시아와 관련있는 예언들(이 예언들이 성취된 수를 보면 누구든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을 성취하신 분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그런 까닭에 성령께서는 주님의 계보를, 메시아 계보가 시작되고 또 약속들이 주어진 두 인물인 다윗과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합니다. 이 계보는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세 구분점에 맞추어 세 기간으로 나뉘는데, 아브라함에서 다윗에 의한 왕국의 설립까지, 왕국의 설립에서 바벨론 포로까지, 그리고 바벨론 포로에서 예수님까지가 그러합니다.

우리는 이 계보에서 성령께서 그 이름이 명명된 사람들이 범한 슬픈 죄들을 언급하심으로, 유다의 죄, 그분의 백성가운데 인도된 가련한 모압 여인, 다윗의 죄 등의 부끄러운 일과 관련하여 구원자를 허락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높이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주어진 계보는 법적인계보,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유대법을 따라서 그 합법적인 상속자이신 요셉의 계보입니다. 기자는 각 기간마다 14 세대를 맞추기 위해 아합 가문의 세 왕을 생략했습니다.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도 생략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략 때문에 이 계보의 목적이 영향을 받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여기서의 요지는 그 계보를 유대인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며, 기록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왕이 모든 백성에게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기자는 예수님의 출생에 대한 사실들-직접적인 관심이 있는 유대인들에게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무한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닌 사실들이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영광을 우리의 관심사와, 인간과 연결시키기 위해 예비해 놓으신 사실들-을 간략히 진술합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따라서 상속권에 대해 말하자면 그녀의 자손은 법적으로 요셉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잉태한 아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된 신적인 기원을 지녔습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그분의 뜻을 전하는 도구로 보냄을 받았는데, 이는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려줌으로써 요셉의 민감한 양심과 곧은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천사가 이 경우에 요셉을 다윗의 자손으로 칭한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로써 성령께서는 우리의 관심을 요셉(예수님의 부친으로 일컬어진 자)과 다윗(마리아가 그의 아내로 불리웠으므로)의 관계로 이끄십니다. 천사는 아울러 태어날 아이에게 예수(, 구원자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이 이름을 이스라엘을 죄에 얽매인 상태에서 구원하는 일에 적용시켰습니다. 이 모든 일은 여호와께서 3분의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부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짧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앞에 제시하신 사실들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된 다윗의 자손 예수: 이스라엘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구원자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 주 예수님만이 채워 넣을 수 있는 밑그림을 다소간 분명히 그린 그 놀라운 예언들을 성취하신 분.

요셉은 마음이 단순하고 유순한 의로운 사람으로서 여호와의 계시를 어렵지 않게 분별하고 그것에 순종했습니다. 이상의 이름들이 이 복음서의 특징, 즉 그리스도께서 제시된 방식의 특징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에 의해 여호와의 말씀과 약속들이 성취될 분에 대한 이 계시야말로 얼마나 놀라운지요! 그분에 대한 갈망을 일깨우고 그분이 주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혼동케 할 만큼 구약성경이 많은 말씀을 한 이 영광스럽고 신비로운 분의 어떠하심을 이해하기 위한 진리의 기초작업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요!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서 나시고 육체를 따라서는 다윗의 모든 권리를 이을 후사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 여호와요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과 함께 하심인 분, 이 모든 요소들이 그 안에서 결합된 그분의 속성의 신비를 누가 이해하거나 헤아릴 수 있으리요?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사실 그분의 삶은 완전한 인간의 순종과,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능력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방금 일컬은, 1 2023절에 나오는 이름을, 즉 다윗의 후사, 그분의 백성의 구원자 예수, 임마누엘 등은 이스라엘 중의 그분의 영광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분의 성령으로 인한 출생은 이 땅에 태어난 한 인간이신 그분에 관한 말씀인 시편 2 7절 말씀을 성취했습니다. 예수란 이름과 그분의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잉태는 분명 이러한 관계를 뛰어넘어 그분의 이스라엘 안에서의 위치와 특별한 방법으로 연결됩니다.

 

2

이와같이 출생하시고 천사에 의해 그 신분이 계시되고 임마누엘의 임하심(presence)을 선포한 예언들을 이루신 분이신 그분께서 그들의 박사들의 마음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뜻의 인도를 받는 이방인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공적으로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주 하나님이요 임마누엘이요 다윗의 자손이요 구원자 여호와요 하나님의 아들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시고 이방인의 우두머리들에 의해 인정받으시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증거요 마태복음에서 제시된 예수님의 특성입니다. 이후에, 그와같이 계시된 예수님을 목전에 두고, 한 외국인 왕을 시중드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분의 말씀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의 이론(a System)으로는 알면서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것을 보게 됩니다.

아울러 진정한 왕과 메시아되신 주님의 광포한 대적인 이 왕이 그분을 죽이려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이 이스라엘에게 태어난 아이를 보호하되, 그 책임을 이스라엘에게 전적으로 묻는 방법을 통해서, 또 동시에 이 유일한 이스라엘의 진정한 잔존자, 즉 이스라엘 민족의 소망의 유일한 참 근원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성취하는 방법을 통해서 보호하십니다. 그분이 없이는 모두가 멸망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연결된데 대한 댓가를 치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생명을 취하려는 헤롯의 잔인한 음모를 피하려고 애굽에 내려가셨던 그분께서 진정한 싹이 되십니다(예수님이 피신한 동네 나사렛은 이사야 11:1의 메시아를 가리키는 ”(, “네째르”)과 원어상 발음이 유사한데 이 사실에 근거한 해석인 듯함-역주). 그분은(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둘째 아담으로서의 인간의 역사는 물론, 그 자신의 위() 안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 도덕적으로) 시작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즉 모두를 위하고 분명코 축복을 위해서 그분은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요 다윗의 자손이셨습니다. 그러나 인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취하시기 위해 그분은 죽으셔야 했습니다( 12장 참조). 이 은혜 안에서의, 그리고 그분의 계획을 따른(이스라엘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따라서 이러한 계획이 없다면 하나님은 필경 그들을 제해버리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시작(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으로서)을 가리키는 대목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고 한 호세아의 예언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종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새 이스라엘 민족의 핵심이 된 신실한 잔존자(하나님께서 야곱의 집에는 얼굴을 숨기시는 대신 이들에게는 참 종을 허락하셨습니다)를 모으시는 참 종인 그리스도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49장은 이스라엘에서 그리스도에게로의 이러한 전환을 놀라운 방식으로 묘사해 줍니다. 더욱이 이것은 율법 아래서는 실패했으나 은혜 안에서 재건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의 근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도덕적으로 그들의 뿌리를 이루는 새로운 줄기입니다( 49:3,5 참조).

헤롯이 죽자 하나님은 꿈을 통해 그 소식을 요셉에게 알리시고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땅이 하나님에 의해 수여된 특권들을 상기시키는 이름으로 언급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유다나 갈릴리가 아니라 이스라엘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 그 땅에 들어감에 있어 그분의 조상의 위에 접근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분은 그분의 백성 중 멸시받는 자들 가운데서 한 낯선 자의 위치를 취하셔야 했습니다. 꿈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요셉은 그분을 모시고 갈릴리로 들어갔는데, 그곳 거민들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과 유다-다윗의 땅이요 하나님께 인정받은 왕들의 땅이요 성전이 있고 언어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바벨론에서 유다로 돌아온 귀환자들과 실질적으로 분리되었음을 드러낸 지역-와는 관례상 아무 관계도 없는 자들로 극도로 경멸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그 갈릴리에서도, 요셉은 그 이름 자체가 그 거민들에게 불명예와 비난거리가 되는 그런 곳에 정착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취하신 모습이 그러했으며, 다윗의 자손께서 은혜와 하나님의 계획으로 말미암아 그들 중에 신실 때 취하신 그분의 백성과의 관계가 그러했습니다. 그분은 한편으로는 임마누엘이요 그들의 구원자 여호와이셨고 한편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의 백성 가운데 거처를 취하시는 중에, 백성 중 가장 가난하고 가장 멸시받는 자들과 거처를 함께 하시고, 네번째 세계 제국인 이방 나라의 도움을 받아 유다를 다스리던, 그리고 백성의 제사장과 관원들이 유대를 가지던 거짓 왕의 악한 음모를 피해 갈릴리에 은둔하셨습니다. 백성의 관원과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신실치 않고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가 씌워준, 떨쳐버릴 수 없는 죄의 멍에를 오만스레도 혐오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로 순순히 받아들일 정도로 그들의 죄를 충분히 인식하지도 못했습니다. 메시아가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이 기자에 의해, 아니 그보다는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제시된 배경은 이러했습니다.

 

3

이제 그분의 실제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세례요한이 여호와의 길을 그분 앞에 예비하기 위해 나타나서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언하며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이 복음서에 의하면 세례요한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역은 다음 세가지 특징을 지닙니다. 첫째로 주 여호와 자신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구절(3: 40:3 참조) 하반부에서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흠정역에 의함-역주)란 문구를 생략하셨는데 이는 예수께서 여호와로 인정되긴 했지만 인간의 낮은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이며 또한 이스라엘이 우리의라는 호칭으로 불리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인데, 이븐 적절히 말한다면 여호와께서 이 땅에서 말씀하신 시내산에 속한 세대를 대신할 새 세대를 말합니다. 이 새 세대에서는 하늘이 다스리게 됩니다”. 그들이 그분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권위의 원천이요 또 그것을 특징지을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들이 현재 상태에서 축복을 받는 대신 이러한 왕국의 가까움을 예비하여 회개하라는 촉구를 받은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요한은 유대인을 떠나 광야를 거처로 삼았는데 그는 의의 길로 온 까닭에 유대인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습니다(21:32). 그의 음식은 그가 성령으로 충만한 채 광야에서 얻은 것들이었습니다(그의 선지자 복장조차도 그가 하나님 편에서 취한 위치를 증거해 주었습니다.

이와같이 그는 선자자였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께로서 와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지자 이상의 인물이었는데 이는 오랫동안 기대해온 새 세대의 개막과 여호와의 인격적인 출현을 곧바로 일어날 일로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는 이스라엘에게 오긴 했지만 그 백성을 인정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심판받을 운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타작마당이 정케 되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베임을 당할 운명이었습니다. 오직 남은 자가 있어서 어떤 모습으로 세워질지는 아직 밝혀지지 알았지만 왕국에서 여호와에 의해 새로운 위치를 부여받을 것이라고 그는 선언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분명코 모든 약속의 성취가 되심에도 불구하고 거절을 당하셨지만 불가불 백성 중에 존재하는 모든 악에 대한 심판자가 되시는 분의 위()로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다니 이 얼마나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인지요!

본문을 그 진정한 목적대로 적용시킬수록, 즉 본문을 이스라엘에게 적용시킬수록 우리는 그 진정한 위력을 절감케됩니다.

분명 회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영혼에게 영원한 필요조건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친히 개입하사 그분의 백성에게 이러한 회개를 촉수하시되, 그들이 그분과 관련하여 지닌 모든 조직을 버리게 하고(그들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새로운 세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만 속한 나라-를 세우고, 마침내 그분의 백성과 그분이 그토록 오랫동안 아끼시던 성에 심판을 퍼부으시는 모습을 볼 때 이 진리에 대해 어떤 빛이 던져지는지요!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이 진리는 여기에 그 결과에 있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리와의 관계하에 선언된, 그러나 이미 그 모든 결과를 그 자체에 포함한 또 하나의, 극히 중요한 진리가 드러나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사방에서 온 사람들이, 다른 구절에 의하면 특히 불경건하고 멸시받는 이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나아와 그들의 죄를 자복했습니다. 반면에 그들이 보기에 백성 가운데 높은 직위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사랑한 선지자가 보기에는 그가 선언한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진노가 임박했습니다. 누가 이들 비웃는 자들에게 그 진노에서 피하라고 경고한 적이 있었나요? 그들로 나머지 사람들처럼 자신을 낮추게 하라. 그들로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고 마음이 변화되었음을 입증하게 하라. 그들의 민족이나 조상의 특권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쓸모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속성과 그분의 진리가 요구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으셨기에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에 대해 행하신 것입니다. 실재가 요구되었습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고 선한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베임을 당할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 집행되는 중요한 도덕적인 원리입니다. 아직 그 날이 휘둘러지지는 않았지만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습니다. 요한은 그의 증거를 받는 자들을 새로운 위치로, 혹은 적어도 그러한 위치에 맞는 새로운 상태로 이끌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를 하자 요한은 침례를 통해서 그들을 나머지 사람들과 구별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 뒤에 오실 분-요한이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한 분-은 그분의 타작마당을 완전히 정하게 하실 것이요, 진정 도덕적으로 그분의 소유인 자들을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그분의 타작마당) 가운데서 분리시키시고 나머지에게 심판을 집행하실 것입니다. 요한 편에서는 미리 회개의 문을 열었으며 그 후에 심판이 임할 것이었습니다.

심판이 예수님께 속한 유일한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의 증거에 의하면 두가지 일이 그분께로 돌려집니다. 먼저 그분은 불로 세례를 주시는데 이는 모든 악한 것을 소멸하는 심판을 가리킵니다. 한편 그분은 성령으로도 세례를 주시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소생과 구속과 정결을 입은 사람 안에 주어져 거룩한 능력으로 역사하는 성령께서 그를 육신에 역사하는 모든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된 모든 것과, 그분께서 친히 부여하시는 생명 안에서 그분의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그 영광과의 유대 및 사귐 안에 그를 두시며, 그리고 이러한 특권의 향유와 반대되는 모든 세력을 우리 족에서 도덕적으로 멸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요한이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길로 인정한 유일한 선한 열매는 은혜로 말미암아 죄를 정직하게 자백하는 것임을 주목하십시오. 오직 이러한 자백을 하는 자들만 도끼를 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악한 나무임을 자백하는 자들 외에는 진실로 아무 선한 나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입은 자들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엄숙한 순간이었는지요! 여호와께서 친히 관계를 맺은 민족의 한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었는지요!

세례요한이 여기서 메시아를 은혜 안에 오실 구세주가 아니라 왕국의 머리로, 사람들이 회개치 않으면 심판을 집행할 여호와로 제시하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이후에 그분이 은혜 안에서 취한 위치를 볼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이제까지 메시아로, 혹은 여호와로 제시된 예수님이 친히 회개의 세례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한에게 나아오십니다. 우리는 이 세례를 받기 위해 나오는 것이 유대인이 이 당시의 상태 안에서 맺을 수 있는 유일한 선한 열매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한 행동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의 열매로, 성령의 유효한 역사의 열매로 입증되었습니다. 회개를 하는 자는 자신이 이전에 하나님을 떠나 행했음을 자백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움직임이요,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의 열매요, 새로운 생명, 곧 성령의 생명의 표증입니다. 요한의 사역으로 보면,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다른 아무 열매나 다른 아무 허락될만한 증거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성령께서 이미 그 안에서 역동적으로 역사하던 사람이 전혀 없었다고 추론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이러한 상태에서는, 그리고 그분의 종을 통한 하나님의 촉구에 의하면 그것(요한의 세례를 받기 위해 그에게로 나아오는 것-역주)이 이 생명, 즉 하나님께로의 심령의 돌이킴의 증거였습니다. 이렇게 그 앞에 나온 자들이 백성 중 진정한 잔존자였으며 그들을 하나님이 그런 자들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심판을 눈앞에 둔 무리에게서 분리되었습니다. 이들이 진정한 성도들, 곧 땅의 존귀한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회개의 낮은 자세만이 그들이 취할 유일한 참 위치였으며 그들은 그 위치에서 시작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와 공의를 베푸실 때, 그들은 전자(자비)는 감사히 선용하고 그것을 그들의 유일한 자원으로 고백하며, 후자(공의)는 하나님의 백성의 상태로 인한 응당한 결과로 겸허히 수용합니다.

이제 예수께서 그렇게 행하는 자들 가운데 자신을 제시하십니다. 그분은 진실로 여호와요, 그분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실 그분의 백성의 의로운 심판자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심판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신실한 잔존자 가운데 그분의 위치를 취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백성 중 가장 낮은 위치를 취하십니다. 시편 16편 말씀처럼 그분은 여호와를 그분의 주로 부르며 나의 선함(goodness)이 당신에게 미치지(extend) 못하나이다”(우리말 성경에는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되어 있음-역주)라고 아뢰는 반면 성도들, 곧 땅에 있는 존귀한 자들에게는 나의 모든 기쁨이 저희에게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의 완전한 증거 -구주께서 이 은혜를 좇아 친히 그분의 백성의 마음에 일어난 성령의 첫번째 활동에 동참하시고, 그들을 향한 은혜의 낮아지심으로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 진정한 위치에 처한 그들 중한 사람의 위치를 취하심으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는 그러한 인자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실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슬픔과 어려움을 체휼하시기 위함이며, 그들의 위치에 합당한 모든 감정(sentiment)의 모본과 근원과 그 온전한 표현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회개치 않는 악한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화합될 수 없었으나 무리 중 가난한 자들 중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첫번째 살아있는 역사와는 화합될 수 있었고 또 은혜 안에서 그렇게 되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그렇게 행하십니다. 진실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첫번째 오른 발자국과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발견되십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것과 같은 완전함에 의존하는 은총을 따라서, 그분의 백성의 모습을 위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키고, 그분의 모든 어떠하심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영화롭게 해드림으로 스스로를 선함으로 만족시킬 수 있게 한 그 사랑에서, 그분을 영접한 자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도하기 위해 오십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구주께서 자기 생명을 내놓으셔야 했음을 아는데 이는 유대인의 상태가 모든 사람의 상태처럼 진리의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전에 그러한 희생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도 예수님의 사랑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분은 그들을 그분의 위() 안에서 표현된 축복의 향유로 이끌고 계신데, 그 축복은 그 희생 위에 안전히 놓여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통해 들어간 회개의 길로 도달해야 하는 축복이요, 그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모든 선한 것의 소유를 향해 함께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받으신 축복입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온 분의 위엄과 존귀를 느끼고 주님의 의사에 반대합니다. 이로써 성령께서는 주님의 행동의 진정한 성격을 드러내십니다 그분에게 있어서는 그곳으로 이끈 것이 죄가 아니라 의-그분이 사랑 안에서 이루신 의-였습니다. 세례요한뿐 아니라 그분도 하나님에 의해 그분께 정해진 위치에 속한 것을 이루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분은 지극한 낮아짐으로 자신을 요한과 연결시키십니다-”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그분은 겸손하고 순종하는 종이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늘 그런 모습으로 행하셨습니다. 게다가 그분의 신분에 있어서는, 주님께서 그분의 양을 위해 여신 문을 통해 들어온 우리를 죄가 이끄는 곳으로 은혜가 예수님을 이끌었습니다. 죄를 실상대로 고백할 때,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자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 사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성령의 열매입니다. 요한에게 나아온 가련한 죄인들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예수께서 사람들 가운데, 보다 정확히 말해서 회개한 유대인 가운데 의와 순종의 위치를 취하신 배경은 그러했습니다 그분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이 그분을 온전히 인정하시고 인치시고 이 땅에서 그분을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은 한 사람-의롭고 순종적이고 또 시편 40편에 따르면 온전한 자기부인 가운데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드리사 온전한 겸손 가운데 그 일을 이 땅에서 이루신 분-의 이러한 신분 안에서입니다.

그분이 침례를 받자-그분이 그분의 백성과 위치를 함께 하신 가장 두드러진 증표-하늘이 그분께 열렸고 그분은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분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러나 이러한 상황들은 우리의 주의를 요구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그곳에 계시기 전에는 하늘이 땅이나 땅 위의 사람에게 열린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오래참으심과 섭리 안에서 그분의 모든 피조물을 축복하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그분의 지상 통치의 법칙을 따라서 그분의 택한 백성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외에 그분이 신실하심 가운데 보존하신 택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하늘이 열린적은 없었습니다. 그분의 지상통치와 관련하여 증거가 하나님에 의해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죄없고 순종적인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되신 예수께서 그곳에 서실 때까지는 하나님의 눈이 편히 머물만한 대상이 이 땅에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척 보배롭게도, 그분께서 은혜 안에서 이 이스라엘, 즉 신실한 잔존자와 함께 하는 겸비한 위치를 공적으로 취하심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나타내고 그분의 뜻을 이루시자마자 하늘이 그 주목하기에 합당한 대상에게 열렸습니다. 물론 그분은 세상이 있기 전부터 항상 하늘이 우러러 보기에 합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방금 이러한 위치를 취하셨으며 이에 하나님의 지상에 대한 전관심의 대상이신 예수님께 하늘이 열렸습니다. 성령께서 그분에게 가시적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한 지상의 인간이며 백성 중 회개를 한 겸손한 자들과 위치를 함께 하신 한 인간이신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을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성령께서 그분에게 내려오심-그분에 대한 아버지의 인침-을 인식하셨습니다. 여기서 그것은 분명히 아버지의 영원하신 아들의 속성 안에 있는 그분의 거룩한 본질이 아닙니다. 이 인은 그러한 속성과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위()를 나타냈는데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분은 열두살 때 자신의 위()를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할 때에도 한 인간, 즉 지상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한 인간으로 인침을 받았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분은 성령께서 그분에게 임하시는 것을 인식하셨습니다. 이러한 임재는 주임께서 그 안에서 이 땅에 나타나신 겸손함과 온유함과 순종함의 특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비둘기 같이성령께서 그분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오순절날은 성령께서 불의 혀 같은 모양으로 제자들의 머리에 내려오셨는데, 이는 각인에게 각각의 언어로 전한 은혜를 따라서 이 세상에서 권능 있게 증거를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995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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