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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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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 17:01 횃불/1995년

요 나(3)

W.W. 페러데이

넘어진 자에게 주어진 은혜

넘어진 자들에게 주님은

얼마나 인자하신지

구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얼마나 선하신지.”

 

위의 시는 확실히 사실이며, 우리는 종종 진정한 기쁨으로 그렇게 노래합니다. 그에 대한 증거는 신구약 성경 모두에서 발견됩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제 위치에서 피신했을 때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를 위해 불과 조반을 준비했습니다(왕상 19). 그가 순종의 길을 걷는 동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릿 시냇가에서는 까마귀들이 그것도 상당 기간 그의 필요를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 관계가 좋지 않을 때는 천사의 특별한 섬김을 받았습니다. 이 하늘로부터 온 사자는 그가 먹고 마시고 잠자는 동안 그의 곁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한번 그에게 먹을 것을 권하면서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고 부드럽게 일러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사역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잊지 않으셨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이 도피중인 선지자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지!

신약으로 와서, 베드로가 몹시 마음 아프게도(엄숙한 경고를 들은 후에) 주님을 부인했을 때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고 누가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22:61). 그 부드러운 눈길이 그의 마음을 부서뜨렸으며 이에 베드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한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하라고 했습니다( 16:7). 여기에 베드로의 이름이 별도로 언급된 것은 그의 주님이 그의 큰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에게 확신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일 후에 주님은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나셨고( 24:34) 그로써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따라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자 베드로는 담대히 서서 그의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많은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2:41).

요나는 물고기 속에 갇혔을 때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 났다고 말했습니다( 2:4). 그는 여호와 앞에서 피하기 위해 다시스로 스스로 달아났으므로 그런 면에서 아무 불평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선원들에게 그 자신이 그런 목적으로 배를 탔노라고 얘기했습니다(1:3,10), 아마 요나는 시편에 친숙했을 것이고 31 22절의 내가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는 다윗의 고백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나, 그러나 다윗은 경겁한 중에 그렇게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그 전후 문맥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 “하였사오나라는 소중한 표현을 보십시오! 아무리 그들이 큰 죄를 범할지라도 그분의 성도들을 버리는 것은 우리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들이 부르짖을 때는 언제든지 그 간구소리를 기꺼이 들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겁한 중에(서둘러) 아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한 고백은 현명치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거룩한 산에서 자기의 하는 말을 알지 못한 채말했습니다( 9:33). “말할 때가 있는가 하면 잠잠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3:7). 우리의 형제들은 우리를 대하는데 있어 우리의 은혜로운 하나님처럼 항상 인자하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인구조사를 실시한 오만한 죄악을 범한 후에 그 징계로 세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는 요구를 받고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대상 21:13). “세 내어 온 삭도는 매우 잔인할 수 있습니다( 7:20). 다윗이 암몬 자손에게 톱질과 써레질과 도끼질을 하게 하고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했다는 것은 지나치게 잔인한 처사였습니다(대상 20:3).

오순절 후에, 하나님의 교회가 태어나고 성령께서 그 가운데 계셨을 때,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함이 역사상 유례를 볼 수 없이 놀랍게 선포되었을 때, 바울은 고린도의 형제들에게 심각한 죄로 인해 부득불 쫓아내야 했던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와 위로를 베풀라고 권면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악에 대해 부주의하고 무관심했으나 바울의 책망을 들은 후에는 그 사람을 치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뉘우쳤으며 이제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기게해서는 안되었습니다(고후 2:6,7).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언제 우리는 범죄한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일깨워 주는 이러한 교훈을 배우게 될까요? 마태복음 18 28~34절에 나오는 자비를 모르는 관원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들에 대한 경고로 주어진 것입니다.

요나는 낮춰지고 유순해진 상태로 깊은 물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사실이 후에(4) 드러난 것으로 보아 그는 마음이 부서졌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분의 뜻을 거스려 높아진 자들을 능히 낮추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으며, 아울러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요나는 그 글이 우리에게 전해진 초기 선지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짧은 책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문제된 백성뿐만 아니라 그들에 게 보내시는 그분의 사자들도 징벌하시되 오직 그들의 축복을 바라는 풍부한 자비가운데 징벌하신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모쪼록 이 복음 시대의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분 앞에서 겸손히 행하되 불순종의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그릇되이 나타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다른 이들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먼저 스스로 순종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그의 아들에게 할례 행하는 것을 소홀히 한 까닭에 여호와의 엄히 다루심을 맛보았습니다( 4:24,25). 그는 아마 그 문제를 아내에게 맡겼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바로 처리될 때까지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라고 일관성 있게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할례가 육체에 대한 심판을 상징한다는 점을 기억할 때 이 교훈은 한결 중요합니다. 땅에 있는 그들의 지체를 죽이는 법을 배운 사람들만이 ( 3:5) 거룩한 하나님을 위한 증인으로 나설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귀 기울입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알리라”( 7:17).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6:38,39).

 

두번째 명령

우리는 그 큰 물고기가 요나가 그 속에 갇혀있던 그 밤낮 사흘 동안 조용히 있었다고 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이동했든 간에 창조주의 눈길이 그 위에 있었으며 그 물고기는 여호와께서 그가 가기 원하시는 바로 그곳에 선지자를 토해 내도록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물고기는 그를 이탈리아나 그리이스로 데려갔을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이스라엘 땅을 밟도록 했을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가장 겸손한 피조물의 순종은 매우 교훈적입니다. 주 예수님은 한 세겔을 소유한 물고기를 원하셨으며 다른 물고기가 아닌 바로 그 물고기가 베드로의 낚시에 걸렸습니다( 17:27). 사람이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 -아직 일을 위해 길들여지지 않은 어린 것- 는 유순히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거리를 걸어갔습니다( 21:7). 만일 필자나 독자가 그런 나귀새끼에 올라탔다면 그것은 현명치 못한 일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중해의 존 물고기가 요나가 배에서 던져진 바로 그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 물고기는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 동안 요나를 보호한 후에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 그를 토해내었습니다. , 모든 피조물 가운데가장 재능이 뛰어난 자가 반역의 우두머리가 되다니! 그의 반역은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탄식과 고통 중에 지내게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때 비로소 마감될 것입니다( 8:19~22).

다시 한번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았습니다(3:1),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연약에서 회복된 후 하나님의 위대한 멧세지를 전파하는 사명을 위임 받았습니다( 2) 요나는 자신이 전할 멧세지를 알지 못한 채 보냄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봉인된 명령을 가지고 나아간 것입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순종의 마음이 (적어도 어느 정도) 회복된 요나는 그의 주님과 감히 변론하려 하지 않고 다소의 사울을 찾아가라는 명령을 받은 저 다메섹의 아나니아의 자세를 따라( 9:13,14)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갔습니다.” 이것은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으라는 명령을 듣고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그릿 시냇가에 머무른 엘리야의 본을 생각나게 합니다(왕상 17:5).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교훈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거취이동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찬양을 발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그는 개선 행진(로마인들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장군을 위해 개선 행진식을 갖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중에 끌려오는 포로처럼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널리 퍼지는 한 하나님께서 그를 어디로 인도하시느냐-드로아, 고린도, 그밖에 다른 어디든-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삶을 영적인 성공이 되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 역시 우리에게 아름다운 본을 보여줍니다( 24). 그는 그의 주인의 아들을 위한 신부를 구하러 기도하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찾던 사람을 발견하자 그는 머리 숙여 여호와께 경배드리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유일한 온전한 종이자 사자는 주 예수님이었습니다. 근심 중에 있던 두 자매가 베다니에서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아뢰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복음서 기자는 기록했습니다. 왜 지체하셨을까요? 아버지께로부터 아직 말씀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말씀이 임하자 유대에서 환란이 기다린다는 제자들의 경고도 그분을 만류하지 못했습니다( 11).

여호와의 말씀대로니느웨로 떠났을 때 요나의 마음에는 자신의 임무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 다소 불안했을 것입니다. 요나의 새로운 임무는 모호했습니다.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는 명령이 주어졌었습니다. 그것은 그 후에 심판이 따를 것으로 예상되는, 순전히 심판을 통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임무에는 그런 뜻이 암시되지 않았으며, 니느웨에 도착하자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치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3:4).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의 은혜를 감지하게 됩니다. 그분은 회개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죽는 자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가 언제나 배울 수 있을는지! ( 18:32)

 

(1995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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