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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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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 17:02 횃불/1995년

결혼과 가정 (4)

첫째는 첫째다

A. J. 히긴즈

몇 줄 밖에 나와 있지 않는 말씀이나 주목받지 않는 말씀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귀중한 사실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우면서도 기쁜 일입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는 것을 다 마신다고 주 예수님이 말씀하셨음을 감안할 때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어떠한 관심과 배려를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혹자는 하나님이 모든 참새의 장례식에 일일이 참석하신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경의 단 한 구절에서도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생각을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은 다섯 개의 물 맷돌 중 한 개를 사용하여 그 거인을 죽였으며, 주님은 모세 5경 중 1경을 사용하여 사단을 침묵시켰음을 여러분은 상기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역시 단 한 구절을 사용하여 결혼에 관한 많은 오류들을 침묵시키고 제거할 수 있습니다.

명기 24:5의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바랍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장차 전쟁을 일으켜 성부(聖父)의 일을 마무리하시기 전에 자신의 천상(天上)신부의 기쁨과 행복을 먼저 배려해 주실 것이라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을 예견해볼 수 있지만 사실이지만 현재 우리의 초점은 결혼에 관한 원칙들을 위의 말씀 안에서 찾아보는 데에 있으며, 그 중에서 첫째가면서도 명백한 교훈은 결혼의 우선순위 입니다.

 

결혼의 우선순위

위의 한 구절에 관계된 모든 유우머들을 배제한 후 위의 구절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주목할만한 결론을 몇 가지 얻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과거나 현재나 자국의 안녕을 위해 군대를 의존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건 국가의 예산 중 50% 이상을 방위비로 사용하고 있다면 이는 틀림없이 국방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는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국방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경을 지키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고 더욱 우선적인 문제는 결혼의 유대를 강화하고 안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고 계신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요? 새 신랑이 병역 의무로부터 일년 동안 쉴 수 있을 정도로 결혼의 유대가 우선권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장래가 좋은 군대장비보다 좋은 결혼에 달려 있음을 가르치고 계시는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하지만 또 있습니다. 새 신랑은 모든 군대 의무로부터 면제받았을 뿐만 아니라 무슨 직무도 맡지 말아야 했습니다. 여기에서의 직무라는 말은 약간 다른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직무라는 단어는 사고 파는 따위의 직업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약성경에는 왕이나 국가를 위해 일하는 공적(公的)인 직무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며, 그 예로 사무엘상 21:2에서 다윗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우리말 성경에는직무로 표현되어 있음-역주). 아내를 위한 직무가 일국의 왕을 위한 직무보다 더 우선순위를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새 신랑은 나라보다 자기 아내를 더 생각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보다도 자기 아내를 더 생각해야 했습니다.

역할이 전도(顚倒)되었거나 부부가 함께 직업을 갖는 경우가 많은 현대에 들어와서는 남편이나 아내가 좋은 결혼생활보다 직업을 더 우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성이 더욱 대두되고 있습니다. 승진할 목적으로 자기배우자를 희생하거나 혹은 가족을 잘 부양하고자 한다는 고상한 목적으로 자기배우자를 희생하는 것도 성경적인 순서가 아닙니다.

혹자는 영적인 관계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우선순위를 지녀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말이 분명히 사실입니다만 그 영적인 우선순위를 지킨다는 뜻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영적인(신령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결혼관계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잘 살펴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골로새서 3장에서도 필자가 배우는 바는, 저의 생애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을 실제로 표현하는 방법이 곧, 저의 아내를 우선순위에 두고 비이기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공급하는 것입니다(19)

 

결혼의 책임

하나님은 현실주의자이십니다. 시인들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결혼을 주제로 하여 낭만적인 시를 지을는지 모르지만 정작 그 하늘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결혼을 위해 많은 노고가 요청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자기 아내를 격려할”(cheer up, 우리말 성경의 신 24:5에는 즐겁게 할로 나와 있음-역주) 책임이 주어져 있는데 마치 이 중요성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남편에게는 이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만 일년의 기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떤 아내를 위해서는 위의 기간이 너무 짧은 게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아내를 격려한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아내에게는 왜 이런 격려가 필요할까요? 결혼하면 모든 게 다 끝난 게 아닐까요?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 대해 가졌던 자신의 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여자들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현실주의자라는 사실에 대하여 다시 한번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신명기 24:5그 취()한 아내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다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혼인하다, 붙잡다, 쥐다, 잡아채가다로도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명기 24:5취하다라는 단어를 혼인하다로 해석하고 싶을지라도 이 단어는 여전히, 그 아내를 과거에 유지하고 알던 모든 것으로부터 잡아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녀의 안정감과 소속감, 또는 교우관계까지도 분단(分斷)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혼 때에는 그녀가 결혼하기 전에 받아왔던 여러 종류의 사랑들을 추구할지도 모르기에 남편은 이 점에 대하여 많은 책임을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불행하게도 사랑에 대한 영어는 헬라어가 지니는 많은 뉴앙스를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경험할 수 있는 사랑에는 적어도 4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것을 분석하고 해부하기 전에 우리는 어떤 한 종류의 사랑이 다른 한 종류의 사랑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인 가치를 적용할 목적으로 우열을 구별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각 종류는 고유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결혼의 유대 안에서 다른 종류의 사랑을 고양(高場)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에로스-결혼의 불꽃

이것은 단지 저열한욕망을 만족시키는, 본능적인 사랑이요 가장 낮은 수준의 사랑이 아니냐고 혹자는 즉각 반격을 개시할지 모르지만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열애(熱愛, infatuation)와 연애(戀愛, romance)를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공상에 의거하므로 이 종류 저 종류의 공상적인 것으로 계속 강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신기한 것과 모험적인 것을 먹고 살아갑니다. 반면에 연애는 그 대상을 소중히 생각해 줍니다. 그리고 이 수준에서 않은 부부들이 결혼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전진하지 않고 멈춘다면 그 결혼생활은 실패하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물론 에로스(eros)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의 원어에 사용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경전서에도 전혀 나오지 않을까요? 우리는 아가서를 읽을 때 영적인 적용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읽으며 이러한 자세는 올바르고 적절합니다. 하지만 그 배경을 보면 그것은 신부와 신랑 사이의 순결하고도 열정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현대의 세상 사람들이 로맨스(연애)를 저질적으로 만들어버린 까닭에 이 영향을 너무나 오랫동안 받은 우리도 역시 로맨스(연애)에 대하여 좋지 않은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열정을 가질 수 있으며, 이것은 결혼생활을 고무시키는 짜릿한요소라고 일컬어져 왔습니다. 잠언 5:15~20을 펴서 솔로몬이 젊은이에게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와 더불어 로맨틱한 사랑을 즐길 수 있는지 조언하는 것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다만 중요한 점은, 로맨틱한 사랑이 결혼생활 속에서 합당한 자리를 점유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긴 하면서도 이것이 사랑의 개념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로맨틱한 사랑을 유지하려면 어떤 사항을 더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로맨스에 의거하여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얼마 못 가서 한계를 드러내고 말 것입니다. 로맨스가 결혼생활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부는 사랑의 느낌이 사라지고 짜릿한 감정이 끝났을 때 결국 자기들은 참된 사랑 가운데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될 것입니다.

 

스토르게-무조건적인 사랑

로마서 12:10에는 다른 종류의 사랑이 언급되어 있는데 우리의 성경에는 서로 우애하고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31과 디모데후서 3:13에서 그것은 또 “()정한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가족의 사랑, 소속감이며, 그 속에 서로를 위한 헌신과 무조건적인 포용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관계에 입각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공적이나 성과에 입각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혼 안에서 이상화(理想化)된 아가페 사랑의 실제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되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은 관점과 목표에 있어서 하나됨을 표현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배우자 간의 경쟁의식을 철폐합니다. 그것은 연합만 아니라 무조건적인 충절까지 창조해 냅니다. 부부는 자기 배우자를 세상 앞에 (더욱 중요한 것은 인척들 앞에) 들어올립니다. 자기 아내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잠언 31:11,28에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수년 전 대학에 있을 당시 필자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고용인의 죽음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가정에 대한 그의 정의(定義)를 접하고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가정이란 당신을 안으로 맞아들이는 곳입니다. “ 이것은 소속이며, 바로 이것이 스토르게 사랑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결혼식 때 주례 앞에서 ,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말과 더불어 시작되지 않습니다. 각각의 가족들은 가족관계 안에서 그것을 간절히 원하며, 또 그것이 개발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결혼 안에서의 사랑의 목표 내지 전부는 아닙니다. 신약성경에 사용된 단어는 두 가지가 더 있습니다.

 

필레오-결혼의 우정

우정은 에로스나 스토르게와는 또 다른 사항입니다. 에로스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사로잡혀 있고, 필레오 안에서 두 사람은 어떤 제3의 사항에 함께 관심을 가지며, 필레오 안에서 두 사람은 상대방의 관심사를 발견하거나 개발해 주고자 서로를 받아들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에 있어서는 나눔이 그 열쇠입니다. 필레오는 소중히 품어주는 사랑이며, 남편에게 그 책임이 부과되어 있습니다. 혹시 이 사랑을 결함이 있거나 아가페보다 못한 것으로 오해할 사람이 있을까 봐 필자는 요한복음 5:20에 제시된 아버지의 사랑을 살펴볼 것을 권합니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이러한 사랑을 개발해야 합니다. 연애기간 중의 상호 관심사는 대부분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기쁘게 해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결혼을 한 후에는 이것이 변하여 대부분 어떻게 하면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배우자가 기뻐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필레오의 사랑은 반드시 개발되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관심이 동일하기 때문에 그 시작이 훌륭하며, 합당하고 필요하기만 하다면 다른 관심도 물론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열쇠는 그것들을 함께 나누고 의사를 소통하는 일입니다.

혹자는 이런 사랑이 다음과 같은 세가지 필수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요약했습니다. 친구관계, 동반관계, 의사소통, 결혼생활을 이처럼 복되게 하는 우정을 모든 사람은 신중히 개발해야 마땅합니다.

 

아가페-결혼의 바탕

아가페 사랑에 관해서는 전장(前章)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이미 언급한 다른 종류의 사랑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가페는 다른 모든 사랑들 이상의 것이며, 감정이라기보다 자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가페 사랑이 다른 사랑들보다 꼭 우월하다거나 더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랑들을 통제하고 개발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겠다는 것과 다 나누겠다는 것과 자기 배우자에게 항상 헌신하겠다는 것을 결심합니다. 이 사랑은 혹자가 말한 대로 ““그것(에로스)이 신()이 되어 자멸하지 않도록에로스를 통제합니다. 이 사랑은 우정으로 하여금 자기 배후자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내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사랑은 배우자의 결점을 보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이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을 결혼 안으로 이끌어 들입니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인 저술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말(아가페 사랑의 필요성)은 선천적인 사랑들의 가치를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참다운 영광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를 알려 줍니다. “ 이 사랑을 개발하고 육성할 책임은남편에게 있습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격려해야 하며, 그 개념은 기쁘고 즐겁게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아내의 변덕에 영합하거나 물질에 대한 욕심을 채워 준다는 뜻이 아니라 감정적인 만족을 채워준다는 뜻입니다. 새 신랑은 반드시 자기 아내를 연구하고 그녀의 감정적인 필요를 모두 충족시켜 주어야 합니다. 물론 비현실적인 요구나 영적인 책임에 위배된 요구는 열외(列外)입니다.

 

결혼의 접촉

신명기 20:7 24:5을 읽으면 결혼 안에서 갖는 육체의 접촉과 즐거움에 관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뜻을 가지고 해신지를 누구든 깨닫기 마련입니다. 이 것은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하나님의 용인(容認)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즐거움이 인간의 저질적이고 저열한 필요를 채우는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십니다. 신명기 24:5에는 그는····집에 한가히 거하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표현은 깨끗한 양심, 죄 없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현 사회는 혼외(婚外)의 성적인 부도덕을 어찌나 지저분하게 왜곡시켜 버렸는지 우리도 결혼 안에서의 성생활이 지니는 그 고유한 순수성을 보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위의 표현도 결혼한 첫 해의 책임 중 일부에 해당됩니다. 결혼의 접촉에는 육체의 접촉이 물론 포함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사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감정의 접촉도 포함됩니다. 결혼 안에서 감정의 접촉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육체의 즐거움도 커지는 것입니다. 젊은 부부들은 자신들의 로맨스가 얼마나 멋진가에 따라 사랑을 가늠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한하신 지혜로 일정 기간의 조절과 상호교육의 필요성을 미리 내다보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이미 상술한 세 가지 원칙들은 모두가 다 서로를 기초로 하여 세워집니다. 오직 결혼의 우선순위 대로 해야만 새 신랑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부과된 자기책임을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사랑의 4가지 면을 개발해 가야만 그는 결혼의 참다운 접촉을 차례대로 경험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결혼의 첫 해를 망가뜨리고, 그래서 그 다음의 결혼생활까지 망가뜨리고 마는 잠재적 요소들은 많이 있습니다. 이 말이 주제를 벗어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신혼부부들은 필히 고려해야 할 사항이기에 덧붙이겠습니다.

분을 품지 말고 서로의 견해 차이를 해결하도록 노력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은 결혼생활에서도 타당합니다( 4:26). 너무 감정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부부 사이에 대화를 기피하게 되는 그런 영역이 없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함께 앉아 참을성 있게 풀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문제를 두 사람만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고 잊어버린 지 오랜 후에도 다른 사람은 그 문제를 계속 기억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빚은 가능한한 지지 마십시오. 미국의 이혼 중 75% 이상이 주로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하기를 배우시고, 다른 부부들이 가졌다고 해서 우리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접대는 마음의 넓이의 문제이지 집의 넓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혼을 50 50의 상호 기여라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필자는 결혼하고자 하는 한 쌍의 젊은이들에게 국가에서 요구하는 설문조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어야만 할 때가 종종 있는데, 결혼한 후 이혼을 하지 않으려고 각 배우자는 현재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느냐고 질문하면 필자는 그들의 답변에 놀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 어떤 젊은 신랑은 말하기를, 자기들 두 사람은 그것이 50 50의 상호 기여라고 알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90 10의 상호기여라는 필자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배우자에게 90%를 기여하고 10% 정도만 기여 받을 생각을 했어야 마땅합니다. 아니, 좀 더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남편은 100%의 기여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여 받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결혼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남편은 기여하는 사랑을 소유하라고 명령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별거나 이혼에 대해서 혹시라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노파심에서 강조합니다. 이것이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임의 선택사항이 아니냐라고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결혼생활 가운데서 문제가 발생할 때 성경의 원칙들을 적용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오로지 서로에게 무조건적인 헌신만 있어야 하며, 이렇게 할 때에만 하나님의 원칙들을 사용하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하여 신혼 부부들에게 결혼의 우선순위를 지키라고 간청합니다. 결혼식이 결혼생활을 이루어 주는 것은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그것은 단지결혼생활로 들어가는 기회를 제공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훌륭한 결혼 생활을 위하여 부지런히 노력해야 하며, 그 첫해는 오직 시작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모든 축복을 경험하려면 우리는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원칙들을 일생 동안 온전히 실천해야 합니다.

 

(1995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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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