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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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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5. 16:18 횃불/1995년

결혼과 가정 (5)

상처난 가정

A. J. 히긴즈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표현이 많은 책의 말미를 장식합니다만 이러한 특징을 지닌 결혼 생활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결혼생활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이상(理想)을 실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곧, 그리스도인의 결혼생활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다만 문제가 발생할 때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혼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관하여 침묵을 지키지 않습니다. 문제의 해결 방안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성경에 등장하는 실제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통하여 문제의 실체와 그 근원들을 몇 가지 고찰해 보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만일 이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어떤 일체감이나 기시감(旣視感) 같은 것이 든다면 여러분은 이미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을 내디디셨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여러분이 성경의 사례들 가운데서 자신의 모습을 꼭 찾으려고 애쓸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결혼생활의 함정과 위험을 예리하게 자각한 여러분은 문제들을 예방할 단계들을 벌써부터 밟기 시작하셨을 테니까요. 하지만 불완전한 두 사람의 연합이 결혼임을 감안할 때 여하튼 우리 모두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나발과 아비가일

필자는 다윗의 생애 가운데서 별로 주목 받지 못하는 사건을 먼저 살펴보고 싶습니다. 필자가 믿기로는, 이것이 결혼생활의 균열을 야기시키는 근본적이고도 궁극적인 문제점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이 균열은 자칫하면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커질 수 있습니다.

위의 문제점을 간파하는 열쇠는 한 하인이 나발과 다윗의 사람들 간에 주고받은 말을 아비가일에게 전달한 다음의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삼상 25:17), 이제 어떤 아내에게라도(자기 아내이면 더욱 좋습니다) 남편에게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냐고 질문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녀는 의사소통의 결여나 그 결핍을 즉시 지적할 것입니다. 나발에게는 자기 아내나 하인이나 다윗의 사람들이나 어떤 사람과도 더불어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의사소통에 있어서 왜 이런 문제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저 추측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행스럽게도 같은 장()을 통하여 그 원인에 대한 통찰력을 상당히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나발이 지녔던 첫번째 특성은 자기 존대의식을 지나치게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36절을 살펴보면 이 하잘것없는 목자는 자기 자신을 왕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고집스런 자기존대 외에도 우리는 10절에서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을 통하여 우리는 원만치 못한 의사소통의 몇 가지 원인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같은 장() 10절과 11절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 있는 또 한가지 원인은 그의 완고한 성격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항들이 의사소통의 실패 요인으로 지적해 볼 수 있는 심각한 성격이라고 여겨지기에 필자는 여러분에게 그것들을 심사 숙고해 보시라고 간청합니다. 의사소통이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일차적으로는 듣는 기술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하는 것을 여러분은 왜 귀 기울여 듣습니까? 그 까닭은,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말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나발의 자기존대 의식과 다른 사람에 대한 경멸은 그가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드러내 줍니다. 그의 완고한 성격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의사소통은 필수적 입니다. 결혼생활에서는 어떠한 우월감이나 어떠한 자기존대의식도 비성서적입니다. 머리됨이란 자기 아내를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편이 자기 아내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데 이르기까지 자기 아내에게 중요한 위치를 부여합니다.

자기존대란 오로지 육신적인 성도에게만 있는 죄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심지어 신령한 사람 속에서도 그것이 양의 옷을 입고 침투해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무척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때에 여러분의 아내가 사소한일에 관하여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귀찮아하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여러분이 가사(家事)와 자녀들로 인하여 무척 바빠 있는 까닭에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지친 모습으로 들어오는 남편을 쳐다보지 않았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이것들은 자기와 자기의 업무에 관하여 과장된 견해를 갖게 만드는”(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문제의 발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발은 완고한 성격을 극도로 표현했습니다. 3절에 완고한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는 그는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 돌과 같이 되어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완고한 사람이 돌과 같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의사소통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이것을 계속 고집할 수밖에 없는 요소를 자신 속에 가지고 다닙니다

의사소통이 이처럼 중요하다면 결혼생활 가운데서 이것을 어떻게 개발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밤에 그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이것은 개발될 수 있는 하나의 기술일까요? 아니면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일까요?

의사소통은 여러 수준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을 만났을 때 흔히 하는 안녕하십니까?”, “건강은 어떠십니까?” 따위의 인사는 의미심장한 의사소통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자기 생각이나 감정 또는 두려움 따위를 솔직히 털어놓는 형태의 의사소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사실상 나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며, 후자는 나를 전부 드러냅니다 바로 이 점이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전혀 모험성이 없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나를 전부 드러내는 일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모험성이 증대되기 마련이며,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은 후자 형태의 의사소통을 꺼리는 것입니다.

필자의 요지를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해 논제를 잠깐 벗어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남자라면 여러분의 근본적인 감정적 욕구는 무엇이며, 여자라면 여러분의 근본적인 필요는 무엇입니까? 통찰력을 지닌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기 존재의 중요성과 진가가 남자다움을 느끼게 해주는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여자들은 감정의 만족과 안정감, 또는 가족관계에 대한 필요성을 주희 지적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아(ego)와 감정(emotion)의 이분성(二分性)이며, 혹자가 잘 표현한대로 의미(significance)와 안정(security)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면 이 본질적인 차이를 의사소통의 문제와 연관시켜 보기로 하겠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만사가 다 남자들에게는 불리하고 여자들만 위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참된 자아를 드러내는 것은 배우자로 하여금 내 속에 있는 약점과 실패를 간파하도록 만드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나의 의미감을 철저히 부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감정을 나누는 것이 여자가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여자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결코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 여자는 자신의 자아(ego)를 지키는 일에 남편보다 덜 투자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외관상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이 문제를 위해 도움의 손길이 가까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결혼생활에 부과하는 완전한 사랑은, 남편과 아내로 하여금 자기 배우자에게 거부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의사소통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믿는 자의 사랑은, ()보다 질()에 있어서 세상 것을 능가합니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본을 따르는 사랑이며, 바로 이것이 열쇠입니다.

이미 제기되었던 문제를 다시 상기하여 보십시오. 의사소통의 위험성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과 이로 인하여자신의 약점들을 배우자에게 감지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남자들은 자신의 진면목을 자기 아내가 알면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불완전함과 결함들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진면목과 관계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앞으로도 계속 사랑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생활에 풍성해야 할 사랑은 상대방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을 지녀야 하며, 그럴 때에 비로소 남편과 아내양쪽 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의사소통 할 수 있도록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사소통의 위험성을 기꺼이 감수한다고 해서 이것이 곧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소통이란 단순히 말하거나 듣는 것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요한 열쇠는 상대방이 말하는 바의 참뜻을 서로 이해하는 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8:21에서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주목해 보시기바랍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주님이 자살할 것이라는 억측을 금새 야기시켰습니다. 이 오해는 주님에게 책임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의사소통을 시도함에 있어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문제들 중의 하나를 보여주는 것일까요? 리는 온갖 선입관과 마음 상태, 편견, 고정관념 등을 가지고 모든 대화와 생각의 교환에 임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에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다 들을 수도 있고, 상대방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진의를 파악할 수도 있으며, 또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을 가려서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필자의 말이 좀 복잡하게 들립니까? 하여간 이러한 사항들이 의사소통을 매우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흉금을 털어놓는 솔직한 의사소통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합니다. 각 배우자는 말과 뜻이 일치하도록 말을 해야 하며, 상대방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화를 하나 든다면 요지가 더 분명해질 것 같습니다. 가령 여러분의 아내가 최근에 말하기를, 무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집안에 있기가 몹시 힘들었다고 했다고 가정합시다.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들으시겠습니까? 어떤 남편은, 그녀가 거실에 에어컨이 없는 것을 불평한다고 해석할 것입니다. 또 어떤 남편은, 자기가 해변의 집을 사지 못할 정도로 변변치 못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내가 암시하고 있다고 해석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녀의 말은 단순히 무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집안에 있기가 몹시 힘들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녀의 말에 이어지는 시나리오는 전적으로 해석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의사소통은 그 본질상 여자에게 쉬운 일이긴 하지만 문제는 여자에게도 타고난 성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자는 감정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 뿐만 아니라 선천적으로 감수성이 더 예민하기 때문에 자기가 설령 암시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남편이 그 진의를 이해할 것이라고 추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감정적인 차원에서 의사소통을 하지 말고, 솔직하면서도 이성적인 차원에서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의사소통에 관하여 다소 장황하게 논하는 필자를 너그러이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상고해 보고자 하는 몇 가지 다른 사례들을 함께 살펴본다면 여러분은 이 기술의 가치를 측정하게 될 것입니다.

 

리브가와 이삭

결혼생활 가운데서 가장 중대한 시험이면서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 중 하나는 자녀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험에서 이삭과 리브가도 실패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27장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불행한 실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재의 주제가 자녀 양육은 아니지만 자녀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갈등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특히 십대의 자녀들은 부모 사이를 반목시켜서 부모를 가지고 노는 일에 도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세부사항을 살펴본다면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이 이삭과 리브가의 분열입니다. 각자의 다른 관심사에 기인한 이 분열은 곧바로 목표의 차이를 낳게 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고( 25:28)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는데 이 분열은 어디에서 생겨났습니까? 이삭은 에서가 요리해주는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고, 리브가는 장막에 거하는 조용한 야곱을 더 좋아했습니다(27).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소한 일같이 보이지만 의외로 많은 부모들이 용모이든 재능이든 자기를 닳은 자녀, 자기의 자존심을 세워줄 수 있는 자녀를 편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자녀에 대한 목표에 있어서 차이를 낳게 만드는 특별한 상황으로 금새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창세기 27장의 분열은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거리를 두게 했고, 자기가 좋아하는 자식이 축복을 받게 하려고 각기 궁리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부부는 서로 의논하지 않고 오히려 은밀하게 자기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배우자를 분리시키는 요소는 그 어떤 것이라도 결국에 가서는 결혼생활에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키고 말 따름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가 남편과 아내 사이에 갈등을 일으킨다면 반드시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부모가 각기 자기 방식대로만 한다면 문제만 더욱 악화시키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될 뿐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리브가는 속이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결국 또 다른 진실을 왜곡하여 자기 행동을 감추게 만들었습니다(46), 이삭이 리브가의 흑막있는 책략을 간파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만약 그랬다면 이것은 결혼생활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상호신뢰에 얼마나 큰 타격을 가했겠습니까! ,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리브가가 자기 남편을 속였다는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이겠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비극은 그 부부의, 각기 다른 생각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실망이었습니다. of삭은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던 계획을 실현하지 못했으며, 리브가는 야곱으로 축복을 받게 하기는 했을지라도 두 번 다시 그를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자기 동생을 향한 에서의 증오심과 살해 위험을 의식한 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스트레스는 결혼생활을 분열시킬 수도 있고, 연합시킬 수도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압박으로 짓누르는 이런 인본주의 사회에서 자녀를 올바로 양육한다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지만 그러나 이 도전이 부부 사이를 더욱 가깝게 해주고, 또 주님께 더욱 가깝게 해주어야 합니다. 자녀들 앞에서 부모가 연합된 모습을 지니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부모는 자기 배우자가 없을 때 자녀를 달리 대우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아무리 자녀의 마음을 얻어 용이하게 다루는 수단이 될지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되며, 연합전선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1995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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