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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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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 09:20 횃불/1995년

사람을 낚는 지혜로운 어부②

- 이 춘 원 -

진지한 전도자와 거스르는 구도자들

구도자가 못마땅한 자세로 전도자에게 따질 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선 우리 주님의 말씀에 입각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1:18). “너는 나로 기억이 나게 하고 서로 변론하자”( 43:26).

일찍이 미가 선지자도 증언하기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쟁변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6:2)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항상 자기 백성에게 의롭고 공정하게 행하셨기 때문에 완악하게 원망하는 이스라엘과 변론을 통하여 저들을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변론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볼 때 유익한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와 잘못을 통회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섬들과 바다와 민족들과 죄인들이 모두 여호와께 가까이 나와 서로 변론하는 일은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전도자에게 나와서 무엇을 따져 질문하든지 간에 그를 거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과 권위로써 그의 의심하는 바를 해결해 주도록 힘을 것입니다.

비록 사마리아 수가성에 사는 더러운 일개 아녀자가 물을 즘 달라고 하시는 주님께 거만하고 냉정한 말투로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합니까?” 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거기에 대하여 화를 내시거나 아무런 육신적인 변색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민족적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상종을 안 했기에 그 여자의 말은 옳았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이 구원을 받아야 될 죄인인 것을 아시고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영생의 문제에 대화의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필자는 전도하다가 견딜 수 없는 모욕이나 핍박을 받았을 때 화를 내고 그 자리를 급히 떠난 경험이 있습니다마는, 전도자가 조심할 것은 구도자 앞에서 경솔하게 화를 내거나 육신적인 불성실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전도인이 무례하고 경박하고 무정하게 구도자와 육신적으로 다투는 것은 그 영혼을 지옥의 문으로 떠미는 것이요 교회의 복음의 문을 닫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는 전도자 자신의 언행과 일상 생활의 모습과 일치해야 합니다. 전도자의 입의 복음과 그의 생활의 복음이 동일해야 합니다. 그의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누가 그가 전하는 복음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단이 즐기는 취미는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특히 전도인들이 세상 정욕에 빠지거나 육신의 열매를 많이 맺히도록 하여 힘과 능력을 상실케 하고 무기력 증세에 걸려 전도를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도인들이 쉽게 화를 내고 다투고 서로 비판하고 분쟁케 하여 구도자들이 복음 집회에 나왔다가도 그런 육신의 일들을 보고는 다시는 교회에 나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전도의 효과 곧 복음 전파의 열매는 전도인의 믿음과 심령과 인격과 생활의 상태가 어떠하냐 하는 것과 정비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혼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현저히 줄어들고 교회 성도들이 영적인 기쁨과 평강이 없이 침체되어 있고 말씀과 간증과 찬양에 은혜와 능력이 없고 부흥의 불길이 없는 것은 모임을 인도하는 장로 형제들이나 성도들 가운데 어떤 정욕적인 죄가 있거나 교만이나 원망이나 불일치와 같은 죄악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영적인 거룩한 삶을 살아가지 않거나 진리의 말씀을 순종치 않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의 기도와 간구가 없고 처음 믿음과 사랑을 버렸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구원과 교회의 부흥은 저절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영적인 성장과 부흥은 물론이려니와 죄인들이 주님께 돌아와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역사의 이면에는 반드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원리와 희생이 따랐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더러운 사마리아 여인의 교만한 태도에 진노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그의 구원 문제는 거기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구원 곧 영생의 문제와 관계없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상종 문제를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설명하거나 토론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으시고 곧바로 여인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즘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함과 같이 가장 중요한 영생의 문제를 물과 비교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밤에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가 찾아와서 주님을 추켜세우며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했을 때도 거기에 휘말려 기뻐하시거나, 다른 말을 꺼내지 않으시고 곧바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직언해 주셨습니다.

사실 전도를 할 때에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려 돌아가셨으며 부활하셨는가? 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시인하므로 모든 죄를 다 사함을 받고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복음의 진리만을 중심으로 대화를 하고 토론을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직접적인 관계도 없는 세상 이야기나 다른 종교나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학식과 상식 등을 장황하게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는 필요한 성경말씀을 직접 찾아서 보여 주고 읽히면서 죄인이 어떻게 속죄함 받는가를 중점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나쁜 뜻으로 변론을 일삼고 전도인을 궁지에 몰아 넣으며 분쟁을 일으키려고 이상한 문제만을 제기하는 사람에게는 부드럽고 정둥하게 다른 시간에 토론하기로 하고 우선 제일 급하고 중요한 죄사함의 문제를 대화의 주제로 삼을 것입니다. 전도인이 토론의 주제와 대화의 흐름을 슬기롭게 이끌어 갈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곧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리고 니고데모에게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문제를 강조하셨습니다. 모두 구원의 도리 곧 영생을 얻는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큽니까?”라고 외람되게 물었고, 같은 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늙은 사람이 어떻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라고 무지하게 반문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개의치 않고 열심히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의 사역자들은 모든 일에 충성스럽게 여겨질 때 전도자의 일을 할 수 있고 양들을 돌보는 목자의 직분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적은 일에서부터 충성된 일꾼이 바로 선하고 지혜로운 종입니다. 우리 주님은 아주 충성된 종이십니다(고전 4:1,2, 딤전 1:12, 3:11, 25:21, 1:5).

열심있는 구령자가 사람들을 얻습니다. 영혼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구원시키고자 하는 불같은 열정이 불신자들의 닫혀진 문을 태워 열 수 있습니다. 절망적인 죄인들이 뜨거운 사랑과 타오르는 열성과 꾸준한 관심을 전도인들을 통하여 볼 때 살아계신 하나님과 역사하는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구도자들이 전도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깨닫게 되면 그가 전하는 복음의 도리도 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람을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입게 된 영혼들은 빨리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감등이 되면 그의 인격과 생애 전체가 감화를 받아 새롭게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종들이 받아 쓴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 말씀을 전하는 일꾼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열심히 증거할 때 죄인들이 구원을 받아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수많은 대중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파하실 때를 제외하고서는 항상 구도자들이나 병자들을 한 사람씩 만나서 대화를 나누셨고 그 불쌍한 영혼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중생의 도리를 가르치셨고, 사마리아 여인과 단 둘이서 야곱의 우물에서 진지한 대화를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먹을 것을 사러 동리에 들어갔다가 온 제자들이 주님께서 여자와 열심히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길 정도였습니다( 4:8,27) 그렇게 우리 주님께서는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운 더럽고 왈가닥 같은 여인의 구원을 위하여 아주 열심히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결국에 그 여인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고 그 믿음의 복된 소식을 온 동리에 전파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에도 일대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효과가 있습니다. 대중 전도나 설교가 아닌 이상 할 수 있는 대로 구도자 한 사람씩 책임을 지고 개인 교제를 하면 그 사람 속의 고민과 문제를 알기 쉽고 그 사람 자신도 자기 자신과 죄를 내어놓고 솔직한 대화를 서로 나누기 쉽습니다. 아니, 단 둘이 교제한다고 하지만 자신의 자존심이 걸린 속에 있는 문제들을 내어놓기 어려운데 여러 사람이 듣고 있는데 서야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 시냇가에서 많은 고기를 보고 전부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헛수고만 한 일이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지혜 있고 경험 있는 어른은 조용히 그물을 대고 조금씩 조금씩 잡아 나아갔습니다. 결국에는 거의 다잡아가지고 철없는 어린 나에게도 몇 마리의 고기를 주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동심 세계야 순수하고 아름답지만 벌거벗은 알몸으로 욕심껏 다 잡으려고 뛰어다닌 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부끄러운 일인지요.

일시에 모든 고기를 다 잡으려고 욕심을 부리면 한 마리의 고기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도자에게는 항상 어디서나 선량함과 지혜와 총명이 필요합니다. 세상 용어를 쓴다면 전도자는 꾀와 재치와 민첩함과 사리 판단과 분별력이 강한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두 사람이 부부지간이라 해도 한 사람씩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전도자가 남의 부인과 단 둘이서, 개방된 공적인 장소도 아닌 곳에서 오해를 살 우둔한 교제를 나누라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경우에는 아내 앞에서 자기를 털어놓고 얘기 안 하는 경우가 많고, 동생들이나 자식들이 보고 있는 데서 형이나 부모들이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입니다.

구도자와의 교제는, 조용하고 진지하고 솔직한 분위기 속에서 한 사람씩 만나 교제하는 것이 유익이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교제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부모님 뻘이 되는 구도자들은 나이가 든 전도인이 좋고, 한 사람의 여자를 만날 때에는 두 명의 전도인들이 같이 가는 것이 좋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오해의 소지가 없는 교회에서나 공적인 장소에서 교제하는 것이 좋고, 어떤 경우에는 남편이나 윗 사람에게 알리고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허나 물론, 이런 경우에 사람의 영혼 구원의 문제를 어떤 사람에게 허락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열심히 전도하고 쉬지 않고 봉사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모든 일에 조심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실수할 때도 없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 사람은 오늘이 마지막 기회인데 전도자가 그걸 모르고 복음의 교제를 간단히 쉽게 끝내버리는 경우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고나 병으로 곧 죽을 수도 있고 전도자가 다시 또 만날 기회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정말 그렇게 분별되고 그런 인도하심이 있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장시간 교제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상황 분별로 볼 때 간단히 교제하고 끝내고 또 내일 다시 만나도 될 경우인데 계속 장황스런 설교조의 강요로 인하여 다시는 주님을 찾지 않고 지옥으로 가는 죄인들도 있습니다. 구도자의 심령과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아주 답답하고 지루하게 한없이 교제하는 것은 소에게 경을 밤새껏 읽어주는 경우와 흡사하다고 보겠습니다.

게으른 전도자와 지나친 전도자로 인하여 영혼들이 지옥으로 가는 역설적인 불상사가 있을 수 있음은 가습 아픈 일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 자신이 다 지혜로운 것이 아니니 나 자신의 부족함과 무지함을 깨닫고 더욱 더 성령님께 의자하고 믿음과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며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는 영적인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필자의 경험으로, 몹시 부담스럽게 생각되었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특별 전도집회 시 영혼들의 구원의 마지막 문제들을 다루고 있을 때 아이들이 떠들거나 성도들이 집회 후 다과 준비 등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도자들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빼앗아가려는 마귀의 술책에 우리가 부채질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음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영혼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말씀 시간에 사진을 찍고 비디오 카메라를 돌리고 심지어 어떤 성도는 자기가 데리고 온 구도자를 공적인 복음 시간에서 빼내서 골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자기가 구원시키려고 애쓰는 것도 본 일이 있습니다. 복음전도 집회시에 어떤 성도는 성경을 넘기면서 자기성경 공부를 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양서를 펴놓고 독서를 즐기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또 어떤 전도자는 어떤 성도가 구도자와 교제하는데 끼어들어 간섭하면서 열성 아닌 분열과 불일치를 만들어내고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방해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전도의 은사가 있다는 자매 한 분을 여러 남자들이 모인 곳에서 복음을 전케하는 광경도 있었습니다. 어떤 부인 자매는 불신 남편 옆에 앉아서 종용한 자세를 안보이고 전도자의 말씀에 장단을 치면서 남편의 무지와 잘못을 지적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처음부터 다른 종파와 교파를 내리 비판하고 우리가 믿고 행하는 교회 진리들을 자랑 삼아 길게 강론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이 고의적인 범죄(?)는 아닐지라도 구도자가 단순하게 주님의 순수한 복음의 말씀만을 듣고 구원받아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을 방해하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도리어 복음의 사역에 지장을 주는 일이 때때로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극히 조심할 일입니다.

요는 내가 주님보다 앞장을 서서 무엇인가를 자꾸 하려 할 때 이린 실수가 계속됩니다 내 몸과 혼과 영,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내 의지와 계획과 열심까지다 주님께 맡기게 되핀 그때 성령님께서 자기 뜻대로 우리를 말씀대로 질서있게 선히 사용해 가십니다. “성령께 맡기기만 하면 되느냐, 내가 행해야지?” 이렇게 외치는 이들이 있지만 그 양면을 이해하지 못할 때 생기는 것이지 참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겸손하게 받고자 믿음으로 순전하게 기다리며 기도 드리고 있으면 틀림없이 성령께서 진리 가운데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우리가 교회 안에서 사랑으로 봉사할 일들과 또 구도자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교제할 일들을 질서 있고 덕이 되도록 선히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 전도인들과 우리 성도들이 힘써 기도하고 간구하고 노력하고 순종할 것은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마음과 인격을 배우고 본받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은 사람이 될 때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성품을 많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고 또 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복음과 교회와 구도자들에게까지도 지장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구원을 받도록 교제하고 아울러 주님의 몸되신 교회를 잘 섬기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모신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이요,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은 성도가 지혜롭고 능력있게 구도자를 주님의 말씀으로 구원시킬 수 있고 주님의 교회를 잘 섬길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되리라”( 1:8).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5:18).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면 주님의 크신 은혜와 진리의 말씀으로 넘치게 됩니다. 성령의 지혜로써 복음을 전파케 되고 성령으로 감사 찬양하고 성령으로 기도하게 되고 성령으로 예배 드리게 되고 성령으로 사랑의 봉사를 나누게 되고 성령으로 고난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은 성도가 주님의 일을 능력있게 충만히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정말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았습니까?

만일 성령님의 충만하심이 없는 상태라면 속히 재충전을 받으십시오. 과거의 모든 사도들과 성도들이 성령님의 충만하심과 그 능력과 기쁨이 약화되었을 때 다시 종종 성령의 충만하심을 거듭 받았기 때문에( 4:8,31, 6:5, 7:55, 9:17, 13:52) 우리도 이 긴급한 일을 위하여 기도와 간구를 드릴 것입니다. 왜 당신은 당신 자동차의 밧데리에 이상이 있으면 액을 넣거나 다시 충전을 한 후 엔진시동을 걸면서 어찌하여 정지된 심장에 성령님의 재충전을 시도하지 않고 있습니까? - 나는 내가 귀중히 여기는 자동차를 폐차시키기를 원치 않듯이 내 믿음과 심령과 생애를 무덤 속에 매장 시키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내 모든 죄와 불법과 실수와 마음속에 잘못된 생각까지도 다 내어 놓고 통회 자복합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 그리고 사역하는 일꾼으로서 마땅히 사랑하고 관용하고 섬기고 희생하지 못하고 육신적으로 생각하고 행했던 모든 잘못을 주님께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성도들에게,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국가와 사회에, 심지어 나 자신에게 잘못한 죄들을 고하자 내 심령에 큰 평안함과 시원함이 임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회개와 간구의 기도가 변하여 감사와 찬양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사라졌고, 형제 자매들을 참으로 사랑할 만 하고, 이 국가와 사회가 아름답게 보이고, 나 자신까지도 거룩하고 영광스런 궁전이 되어 있었고, 그 성전에 주님께서 자주 자주 오셔서 쉬시고 정다운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순전하고 아름다운 작은 하인을 발견했습니다. 죄인들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섬기는 지극히 작은 머슴입니다.

작은 일꾼은 오늘도 작은 정원에서 작은 개미와 약한 사반과 여러 마리의 메뚜기와 재치있는 도마뱀을 기르고 있습니다. 작은 소년은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울긋불긋 옷 입은 것들이 다 다르지만 나그네들은 작은 초원에서 뛰노는 아주 지혜스런 네 동물을 구경하려고 옵니다. 심부름 하는 소년은 오늘도 하나 밖에 없는 좁은 문으로 손님들이 들어오도록 도와주며 서 있습니다.

작은 소년은 오늘도 내일도 그런 행복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12:3). 아멘!

 

(1995 10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