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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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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 09:22 횃불/1995년

J. N. 다비의 성경 개요

 

마태복음 16장

주님께서 세우실 이 교회의 주제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주제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것은 설립될 왕국입니다. 그것은 천국의 형태를 지닐 운명이되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세워질 예정이었는데 이는 왕께서 땅에서 거절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거절당하셨지만 왕국의 열쇠는 주님 손에 있었고 그 권위는 주님께 속해 있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가고 난 후 먼저는 유대인에게, 그 후 이방인에게 왕국의 문을 열어 줄 베드로에게 그 권위를 부여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친위를 왕국 안에서 행사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비록 하늘로 가셨지만 참 왕이신)의 이름으로 그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그의 행동이 인준될 것입니다. 요컨대 그는 지상의 하나님 나라에서 명령권을 소유했습니다. 그 나라는 현재 천국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그 왕이 하늘에 계시고 하늘이 그 권위로 그의 행동을 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이 그의 지상 행동을 인준하는 것이지 그가 하늘을 위해 매거나 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특성과 연결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하늘에 속해 있으나 왕국은 비록 하늘의 지배를 받기는 하지만 땅에 속해 있습니다. 즉 땅에 위치하며 땅에서 경영됩니다.

본문에는 다음 네 가지 사실이 주님에 의해 선포되어 있습니다:

1) 아버지에 의해 시몬에게 주어진 계시,

2) 아버지께서 시몬에게 알게 하신 것 안에 계시된 기초 위에 그분의 교회를 세우실 예수님에 의해 이 시몬에게 주어진 이름,

3)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예수님의 위()의 기초 위에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세워진 교회,

4) 베드로에게 주어진 왕국의 열쇠, 즉 그리스도 편에서 그것을 경영하고, 그분의 뜻이며 하늘에서 마땅히 인준될 것을 그 안에서 명령하는 왕국의 권위. 그 모든 것이 아버지(그분의 지혜 안에서 그를 선택하여 그 계시를 받게 하신)의 선택에 의해서, 그리스도(그러한 특권을 개인적으로 누리는 그를 구분짓는 이름을 그에게 수여하신)의 권위로 인해 시몬과 개인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주님께서 미래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들-교회 안에서와 왕국 안에서 성취될 목적들-을 알리신 까닭에 그분이 유대인에게 메시아로 제시될 여지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사역기간 내내 보여오신, 백성들을 향한 은혜와 인내로 가득한 증거를 포기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 증거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을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것이 더 이상 그들의 사역이 아님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또한 그분은 이 때부터 자신이 고난과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비록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계시로 인해 축복과 존귀를 받았지만 그 마음은 여전히 그의 주인의 인간적인 영광(실은 그 자신의 그것)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붙잡았으며 여전히 하나님의 생각의 높이에 훨씬 미치지 못했습니다. 슬프게도, 베드로만이 그러한 과오를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뛰어난 진리를 확신하는 것, 심지어 그것을 진리로 진지하게 누리는 것과 그러한 진리들에 부합하는, 감정과 이 땅에서의 삶에 맞게 형성된 마음을 소유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부족한 것은 진리를 누리는데 있어서의 진지함이 아닙니다. 정작 부족한 것은 육신과 자아를 죽이는 것-세상에 대해 죽는 것 -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대로 진지하게 누리면서도 육신을 죽이 시나 마음을 그 진리에 부합하는 상태로 보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계시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영예를 입었고 아들에게 주어진 왕국-유대인에 의한 예수님의 거절당하심에 뒤따르기로 되어 있는 것 안에서 구별된 위치를 지닌-에서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경영 담당자가 된)는 그러한 영광을 가져오고 왕국을 특징지우게 될 고난과 수치에 예수께서 온전히 복종하신 일과 관련하여 현재 대적의 사역을 행하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문제는 단순했는데, 그는 사람의 일을 구하고 하나님의 일은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진실하게도 이 점에 있어 베드로를 거절하시고, 유일한 길, 미리 정해진 필수적인 길은 십자가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만일 누군가 그분을 좇고자 한다면 그것(십자가)이 그분이 취하신 길입니다. 게다가 사람이 자기 목숨을 구하고 모든 것을 잃는다면-세상을 얻고 자기 영혼을 잃는다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이것이 문제였고, 왕국의 외적인 영광은 이제 문제가 아닙니다.

메시아 체제에서 그리스도의 위()에 대한 계시 위에 기초한 교회의 설립에로의 변화를 묘사하고 있는 본장을 상고해보는데 있어 한가지 더 상기시키고 싶은 것은 유대인 가운데와 제자들의 마음에서 발전되는 불신앙의 특성들입니다. 그러한 불신앙의 형태들을 관찰하는 것도 유익을 줄 것입니다.

먼저 그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대범한 형태를 취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에 대해 한결같이 무관심을 보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자연적인 생각들, 즉 그들의 불신앙에 합하는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든 그분의 사역을 목도할 때든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음도 하나님의 역사도 아닌 그들의 고집스런 마음을 만족시키셔야 합니다. 그들은 한결 덜 분명히 증명된 인간적인 일은 이해했으나 하나님의 일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구주께서 지상의 유대인인 그들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표적이어야 합니다. 그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들이 보인 불신앙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왕국이 그들에게서 취해져야 합니다. 주님이 그들을 떠나십니다. 요나의 표적은 이 장 전체의 주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나타난 능력에 대한 동일한 무관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의지의 반대가 아닙니다. 마음이 현재 일로 가득차 있을 때는 이미 주어진 표적들의 영향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연약이지 악의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부르지 않고 믿음이 적은 자들로 부르십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불신앙이 안일한 견해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견해인즉 마음과 양심이 그들에게 마땅히 명하는 사실-만일 마음이 진정 그 참된 중요성을 직면한다면 그것에 관해서 확실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쉬지 못한다는 사실-에 관심이 없음을 입증해 주는 그런 견해입니다. 영혼은 여기서 아무 필요에 대한 인식이 없으며 결과적으로 아무 분별력이 없습니다. 영혼이 그러한 필요를 느낄 때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은 한가지뿐입니다 또 그것이 발견될 때까지는 아무 쉼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필요를 생성시킨 하나님의 계시가 그것을 일깨운 것을 소유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영혼으로 평안히 쉬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러한 필요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의 자연적인 성품과 교육 및 환경을 따라서 그럴 것이라는 개연성(蓋然性, probabilities) 안에서 쉴 수 있습니다. 주위에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것이 많으며 마음은 그러한 호기심에 사로잡힌 가운데 판단을 내립니다. 믿음은 부족이 있으며, 원리상으로, 그러한 부족을 채우는 대상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영혼은 그 필요한 것을 발견하기까지 연단을 받습니다. 사실인즉 하나님이 거기에 계십니다.

베드로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그에게 계시하십니다. 비록 약하지만 살아있는 믿음이 그에게서 발전되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그가 말할 때 우리는 그의 영혼의 상태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진리를 계시하시고 그 안에서 그러한 부족을 일깨우시는 사람은복이 있습니다! 싸움과 배워야 할 많은 것과 죽여야 할 많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거기 있으며 그것과 관련된 생명이 거기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경우에서 그 결과를 보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시몬이 그토록 유명한 한 돌을 이루는 성전에서 각각 제 위치를 지닙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실제로 그것에 주어진 계시의 높이에 있다는 얘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 계시가 우리의 지상적인 위치에 접촉하는 그 편에서 아직 죽지 않은 육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에 게 주어진 계시는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거절당하심을 암시했으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분의 수치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요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계시인 교회와 천상왕국을 메시아의 지상에서의 나타남 대신 위치시키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후에 다시 살아나시기 위해서 이방인에 게 내어준바 되신다는 것이 아니고 다른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도덕적으로 베드로는 그것을 깨달을 수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그의 육신적인 마음은 그에게 주어진 계시와 예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자신을 높이기 위해 이용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실제적인 도덕적 결과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개인적인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꾸짖고 그분을 순종과 복종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 합니다. 주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셔서 그를 대적으로 대하십니다. , 얼마나 종종 우리는 어떤 진리를 그것도 신실하게 누리다가 그것이 이 지상에서 가져오는 실제적인 결과를 보지 못하는지! 교회를 세우시는 천상의 영화롭게 된 구주께서 지상에 있는 십자가를 암시하십니다. 육신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육신은 당신이 원하면 자신의 메시아를 하늘로 올리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자신의 수치의 몫을 취하는 것은 영화롭게 된 메시아에 대한 육신의 개념이 아립니다. 그러한 위치를 취하려면 육신은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능력을 소유해야만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좇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이상이,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고백에 앞서는, 그리고 슬프게도 그분을 신실하게 시인하고 알아온 자들에게서 발견되는(영혼이 하나님에게서 배운 것의 높이에서 행할 수 있도록 육신이 죽임을 당하지 않은 까닭에, 그리고 육신이 거절하는 결과에 대한 생각으로 영적인 지각이 어두워진 까닭에) 불신앙의 형태들입니다.

그러나 만일 십자가가 왕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면 영광에 대한 헤시는 지체되지 않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유대인에 의해 거절당하셨으므로 훨씬 더 영화롭고 한결 의미가 깊은 칭호가 계시됩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석서(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카 사람을 그 행위대로상 주실 것입니다. 거기 서 있는 자들 중에는 심지어 죽음을 맛보지 않고(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으므로) 인자에게 속한 왕국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볼 자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초로 확고히 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날에 전해진 증거에 관한한 메시아란 칭호가 포기되고 인자란 칭호로 대치되었습니다. 아울러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칭호를 취하시는데 그것은 그분의 고유한 권리에 속한 영광을 지닌 칭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그분의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그리고 인자로서는 그분 자신의 왕국 안에서 오실 예정이었습니다.

여기서 시편 서두에 주어진 가르침을 기억해보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 첫번째 시편에는 의인이 악인의 회중과 구분되어 소개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둘째 시편에는 땅의 열왕과 통치자들이 주님과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자(, 그분의 그리스를 대적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제 이에 대한 여호와의 포고가 선언됩니다. (아도나이)께서 하늘에서 그들을 비웃으실 것입니다. 게다가 여호와의 왕이 시온산에 세움을 입을 것입니다. 그 포고는 이러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은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시편들에서는 그 모든 영광이 어두워집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일부가 되시는 잔존자들의 곤고함이 언급됩니다. 그런 다음 8편에서는 그분이 인자로, 즉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주권적으로 허락된 모든 권리의 상속자로 소개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온 땅에 뛰어나게 됩니다. 이들 시편들은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라고 기록된 부분을 제외하고 그러한 진리들의 지상적인 부분을 뛰어넘지 않는 반면에,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인자의 그것과의 관련성과 그분의 천사들을 동반한 그분의 오심(교회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이)이 우리 앞에 진술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인자가 하늘 영광으로 오시는 것을 봅니다. 그분의 그곳에 거하심이 선포된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하늘의 지극한 영광으로 가득한 가운데 지상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왕국으로 오십니다. 그 왕국은 지상에 설립됩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늘 영광으로 그것을 취하러 오십니다. 이것이 여기 28절에 있는 약속을 따라 다음 장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변화 사건은 각 복음서마다 죽음을 보기 전에 인자의 왕국을 볼 자가 있다는 약속 바로 뒤에 나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베드로는(그의 두번째 서신 1 16절에서) 이 장면을 가리키면서 선언하기를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의 나타남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위엄을 친히 봄으로써 예언의 말씀이 그들에게 확증되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알게 한 것이 무엇을 가리켜 말씀한 것인지 알았습니다. 사설 앞서 살펴본 대로 주님께서 그 일을 언급하신 것은 정확히 그린 의미에서입니다. 그것은 방금 그뿐이 그들에게 선언하신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고 제자들의 믿음을 확실케 하기 위해 주어진, 그분이 이후에 그 안에서 임하실 영광에 대 한 그림이었습니다.

 

17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사 거기서 그들 앞에서 변화되십니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모세와 엘리야도 나타나 그분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졌습니다. 그들이 나눈 이야기의 주제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이긴 하지만, 몇가지 점에 대해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몇몇 다른 상황들을 추가해 주는 누가복음에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분과 함께 나타납니다. 모세는 유대인의 입법자이며, 엘리야는 배도한 열 지파를 여호와께로 되돌리고자 애쓴, 그리고 백성들에게 실망하여 율법이 주어진 호렙산으로 돌아가 후에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하늘로 취해감을 입은 선지자입니다.

율법과 관련하여 백성들의 기초자와 회복자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그 위치가 뛰어난 이 두 사람이 예수님과 더불어 나타납니다. 베드로는(인자의 영광에 대해 무지한 채, 그리고 그분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에 대한 계시를 잊은 채, 다만 그 환상에 놀라서, 또 그의 선생이 유대인 체제의 두 기둥과, 그 유명한 하나님의 종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고 즐거워하면서) 장막 셋을 지어 그 세 사람을 동일한 수준에 위치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 즉 이스라엘에게 그 영광의 거처(쉐키나)로 알려진 그 표증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립니다. 은혜는 모세와 엘리야를 하나님의 아들의 그것과 동일한 영광 안에 위치시키고 그들을 그분과 연관시킵니다. 그러나 인간의 어리석음이 무지 가운데 그 세 사람을 신자의 마음에 대해 동일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위치시키려 한다면 아버지께서 즉시 그분의 아들의 권리를 변호하셔야 합니다. 한 시도 놓치지 않고 아버지의 음성이 그분의 아들의 위()의 영광과 그 아들과 자신과의 관계, 즉 그가 자신의 전적인 사랑의 대상이며 그에게 그의 모든 기쁨이 있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제자들이 들어야 할 것은 그의말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졌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영화롭게 될 분으로,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자들을 가르칠 분으로 거기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그분을 구별하시며 그분을 제자들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분으로가 아니라 아버지 자신의 기쁨의 대상으로 제자들에게 제시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께서는 온전히 기뻐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다스리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우리 앞에 한가지 공통된 목표를 놓습니다. 우리처럼 가련한 피조물에게 이 어떤 자리인지! 이 어떤 은혜인지!

이와 동시에 율법과, 옛 언약 아래 있는 율법의 회복에 대한 모든 개념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인자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얻으신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마음의 유일한 시여자(施與者)로 남아 계십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심히 두려워하여 방에 엎드렸습니다. 그러한 영광과 음성에 익숙한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 늘 그러하셨듯이 두려워 말라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격려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이신 그분과 함께 있는데 왜 그들은 두려워하는가? 그들의 가장 좋은 친구인 그분은 하나님이 지상에 나타나신 것이었으며 영광이 그분께 속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졌으며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그 영광도 사라졌습니다. 예수님 그분에 게 주어진 영광 가운데, 그분의 영광스런 위()의 권리 및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그들에게 그렇게 나타나신-은 그들이 늘 알았던 모습 그대로 그들에게 머물러 계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광은 인자이신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기 전에는 그들의 증거의 주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그분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중대한 증거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방금 그들이 보는데서 빛을 발한 그 영광으로 친히 올라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에 관한 서기관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에 한가지 의문이 일어납니다. 서기관들은 메시아가 나타나기 전에 엘리야가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말라기의 예언이 그러한 기대를 옹호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메시아가 엘리야가 오기 전에 우리 앞에 계신 것을 보고 있는데, 왜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할까요? 예수님은 엘리야가 모든 일을 회복해야 한다고 덧붙여 말씀하심으로 그 예언의 말씀을 확증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이으십니다.”(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그 때 제자들은 예수께서, 성령께서 그 부친 사가랴를 통해 선언하신 대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오신 세례요한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본문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주님께서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말라기의 예언대로 서기관들이 말한 것을 다만 확증하신 것입니다. 마치 그들이 옳다고 하신 것과 같았습니다. 이 때 주님은 엘리야의 도래의 결과를 선언하십니다. “그가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그러나 인자가 오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제자들에 게 너희가 이스라엘의 모든 동리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오셨으매, 지금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말씀하신 인자의 오심은 다니엘 7장의 예언대로 심판 중에 인자로 나타나실 과분의 영광 중의 오심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유대인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이 성취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마태복음에서 과분은 그러 한 기대와 관련하여 그들에 게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게 제시되고 고난을 당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에 따른 메시아의 나타남을 통해 시험을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일은 이루어졌으며, 하나님께서도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신 대로 그분은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셨습니다. “ 또한 이사야 40장 말씀대로 요한이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그분 앞에 나갔습니다. 그는 인자도 그렇게 되셔야 했듯이 거절을 당했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그들이 방금 떠난 장면과 관련하여, 그리고 본 마태복음의 이 부분 전체와 관련하여, 유대인에게 제시된 인자가 거절당하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선언하십니다. 그 동일한 인자가 변화산에서 잠시 그들이 보았듯이 영광 중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말한 대로 과연 엘리야가 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인자가 그렇게 제시되도록 능력으로 그 직무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은(유대인들은 적절하게도 그들 자신의 책임에 내맡겨졌습니다) 다만 그분의 거절당하심과, 그리고 이스라엘의 제쳐짐(하나님께서 그들의 상태가 어떠하든 여전히 그분에게 사랑스런 존재인 그분의 백성과 다시금 관계를 가지기를 시작하실 날이 올 때까지)만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 때 그분은 모든 일을 회복하실 것입니다(이 일은 그분의 맏아들을 다시금 세상에 보내심으로 성취하실 영광스런 일입니다). “모든 일을 회복하다는 표현은 여기서 유대인들을 가리킨 것으로 도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그 표현은 인자 자신의 임재의 결과를 가리 킵니다.

인자의 일시적인 임재는 영원한 영광이 달려있는 사역이 성취된 순간이요, 모든 세대를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온전히 영광을 얻으신 순간이요, 하나님과 인간이 계시된 순간이요, 고것이 그분의 신적인 위()가 아닌 사역에 관계되는 한 인자의 외적인 영광조차도 그 열매에 불과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영화롭게 함으로써 그분이 온전히 영화롭게 되신 사역이었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약속과 관련하여 그것은 그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치러야 했던 시험의 마지막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분의 아들을 거절할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이 실제로 그 일을 행하기 전에는 그들을 명백한 범죄자로 간주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그 신적인 지혜 안에서(후에는 자신의 불변하는 약속들을 이루셨지만) 고분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제시하십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모든 필요한 증거를 베푸십니다. 그분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지닌 세례요한을 그분의 선구자로 그들에게 보내십니다. 다윗의 자손이 그들에게 확신을 가져다 줄 만한 모든 표증을 지닌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과 자기 의로 눈이 멀어 그 모든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신분에 관한한 은혜 안에서 그분의 백성의 좌선한 상태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키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다윗이 그의 시대에 거절당했듯이 그가 예표하는 대상인 예수님은 그분의 백성의 질고를 함께 지셨습니다.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을 압제한다면 그들의 왕께서는 그들의 곤경에 동참하시는 한편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모든 증거를 제시하고 사랑으로 그들을 찾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거절당하셨으며, 모든 것은 순전히 은혜에 의존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약속에 따라 아무것도 주장할 권리가 없으며, 가련한 이방인처럼 그러한 은혜에서 모든 것을 받는 위치로 낮아집니다. 하나님은 은혜 안에서 실패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죄인의 위치에 확실히 두셨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11장의 주제입니다 ♠

 

(1995 10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