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3. 12. 2. 09:19 횃불/1995년

결혼과 가정 (9)

인공유산

A. J. 히긴즈

때는 1974년 8월 9, 장소는 백악관의 동쪽 방, 여기에서 제럴드 포오드 대통령은 국민에게 연설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연설의 첫 문장을 기억하고 있을텐데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재직기간 중 가장 잊지 못할 말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오랜 국가적 악몽은 이제 끝났습니다.” 물론 포오드 대통령은 워터 게이트(Watergate) 사건, 즉 대통령의 역사(歷史) 가운데서 처음으로 사임을 몰고 왔던 그 정치적, 법률적 사건을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가장 끔찍한 국가적 악몽이 몇 달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19세기 때에는 태아를 보호하자는 법안들이 미국의 각 주()마다 통과되었으며, 1966년까지만 해도 의학적인 필요를 제외하고는 인공유산이 각 주에서 법률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유럽사회에서 인공유산이 더욱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미국의 뉴욕 주가 제일 먼저 인공유산을 자유화하더니 결국 1973년 1월 22 미국의 대법원은 저 불명예스러운 웨이드 대() 로우의 결정 “(Wade versus Roe decision)에 의하여 인공유산을 사실상 허용하고 말았으며, 그 골자는 임신 6개월 이내에는 본인의 요청에 의해 마음대로 인공유산을 할 수 있고, 임신 6개월 후의 나머지기간 중에는 의학적인 필요에 의해서 인공유산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악몽은 그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현재에도 계속 진행 중에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매일 4천 건 이상의 낙태가 행해지고 있으며, 일년이면 무려 일백 오십만 건 이상의 임신 중절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어느덧 인공유산은 미국의 외과수술 중에서 두번째로 많이 시행되는 수술이 되고 말았고, 살아서 태어날 수 있는 태아 중 절반 가량이 현재낙태로 죽어가고 있는 실정이며, 그 임산부들 중에서 29% 이상이 두번 이상의 낙태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태아의 생명을 빼앗는 일을 생각만 해도 천성적인 저항감을 느낍니다. 이 영적인 본능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많은 문제들에 부딪히면서도 그 문제들에 관한 성경의 교훈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합니다.(하지만 이러한 영적 본능은 단지 선입관으로만 일을 처리하려는 자세를 방지할 수 있도록 차후에 성경의 입증을 필히 받아야만 좋습니다.)

존경받는 어떤 장로께서, 필자가 이 인공유산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줄 알고서는 그 어려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은 인공유산이라는 단어를 어떤 성구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인공유산의 부당성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심한 탄식중의 하나는 임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불임에 관한 것입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으로, 즉 축복의 신호로 간주되었습니다( 127:3). 구약의 성도들 중에서 인공유산을 생각해 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라헬은 자기가 자녀를 갖지 못하면 죽어버리겠다고 남편인 야곱을 협박했습니다( 30:1). 하나님의 뜻은 생육하고 번성하는것이었으며, 이것은 에덴 동산 이후로도 계속 변치 않고 있습니다( 1:28).

현재 다루고 있는 주제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성경말씀들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도대체 어떠한 사상이 산아제한이라는 이 현대적인(?) 수단을 제정하고 합법화시켰는지 먼저 심사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18년 전에 필자는 다른 급우 일백명과 함께 기립하여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낭독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선서에는, 임신을 해치는 일이라면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서약을 어긴 사람은 당시의 동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법률과 의학계에서 심하게 다루어졌습니다. 이 범죄는 몹시 혐오스러웠던 까닭에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일을 행한 자는 자기 동료들로부터 대단히 경멸 섞인 말을 들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180도로 뒤바꾸어 놓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토록 밉살스러웠던 것이 어떻게 해서 그토록 용인되어지고 있을까요?

이 문제의 복잡성으로 인해 딱 한가지이유만으로는 답변하기 어렵겠지만 지난 60~70년대를 통하여 대중의 사고방식에 막강한 영향을 미쳤던 철학들을 적어도 두 가지는 명백하게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 철학들이 현대의 선두적인 사상가들 사이에서 꼭 인기를 얻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 영향은 십년이 지나도 대중의 마음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철학들 중 으뜸가는 것이 를 주장하는 세대를 낳게 했는데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기만을 첫째로 추구하는 사상입니다. 정글의 법칙이 문명사회로 복귀한 까닭에 각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결국, 각 사람은 자기를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권리가 있다는 태도를 낳았습니다.

이와 연관된 것으로서는 행위와 그 결과를 분리하려는 시도, 즉 모든 행위는 필연적인 결과를 낳는데도 이것을 영원히 부인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심는대로 거둔다는, 하나님의 지엄한 법칙이 무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조(思潮)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에덴 동산에서 이미 그 첫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다만 현대에는 그것들이 즘 더 세련된 모습으로세인에게 부담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 두 사조를 지닌 사람들은 결혼 후의 임신에 대하여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자녀를 갖는 것이 과연 합당한 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권리를 배우자 중 어느 누구라도 갖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 자녀가 불편하다든지 혹은 직업에 방해가 된다든지 하면 아무런 이의없이 그 임신을 끝내고 마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자녀였다든지, 자기 몸은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든지, 혹은 다른 완곡하고 그럴듯한 변명들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 변명들은 결국 이기주의와 무책임주의라는 진기한 자세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이 주제에 대하여 어떠한 빛을 더욱 분명하게 비추고 있을까요? 인공유산에 관하여 글을 쓰시는 분들은 출애굽기 21:22~25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사용하여 태아는 아직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이 과연 정당한지 문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같되 생명은 생명으로····

이 말씀을 보는 시각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학자들은 그 말씀의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덕적인 교훈에 관해서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스퍼렐(Spurrell)의 번역을 따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낙태를 조기출산의 의미로 보고 출산 후 미숙아의 생존에 아무 지장이 없는 것으로 해석하기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를 사형에 처하라는 지시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똑같이 히브리어에 능한 다른 학자들은, 그 말씀이 말 그대로 유산을 가리키고 임부(姙婦)만 다치지 않는 것을 의미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해석을 근거로 하여 태아의 생명의 가치와 임부의 생명의 가치가 다르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태아의 죽음에 대해서는 돈으로 보상했고, 임부의 죽음에 대해서는 오로지 목숨으로만 보상했기 때문에 태아의 가치가 임부보다 못하고, 이 말은 곧 태아가 아직 완전한 인간은 아니지 않느냐라는 반론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이런 논리에 대해 치명타를 가하는 것은 바로 그 장()의 전체적인 교훈은 고의성과 책임에 관한 것이지 생명의 상대적인 가치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12절에서 만일 사람이 고의로 타인을 살해하지 않았다면 그 살인자의 목숨은 즉시 빼앗기지 않았으며, 그는 도피성으로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28절에서 소가 만일 남자나 여자를 우연히 받아서 죽이면 그 소의 임자는 죽임을 면하고 그의 소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소의 가치를 동일시하고 계셨을까요? 그러나 만일 그 소가 본래부터 받는 버릇이 있는 줄을 임자가 알고도 단속하지 않은 경우에는 그 소의 임자와 그 소가 둘 다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32절에서는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 게 주어야 했고, 그 소는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이런 모든 사례로 볼 때 하나님이 남자, 여자, , 미숙아 등의 목숨에 대하여 상대적인 가치를 부여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위의 사례들은 고의성, 사전 계획, 동기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제 시편 139편을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관계된 구절들만을 허겁지겁 살펴보기 전에 우선 그 시편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게 좋습니다. 그 시편의 목적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우리에게 자세히 보여주는 것이며,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그분에게 경배를 드리도록, 그분의 속성이 묘사되어있습니다. 6절까지는 그분의 전지하심에 관하여 서술되어 있고, 7절부터 12절까지는 그분의 무소 부재하심이 서술되어 있으며, 13절부터 16절까지는 예상대로 그분의 전능하심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 중 한 가지 사례를 보여주시기 원하실 때에는 무수하고 광대한 창조의 위엄을 언급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조그만 태아의 발달 현상과 생명 창조의 경이에 관하여 언급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139:13~16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얼른 살펴보기만 해도 거기에는 빛나는 진리가 뚜렷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신분은 모태 속에서부터 확립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 자신, 자신의 형체 혹은 뼈, 아직 형성되지 않은 자신의 형질 혹은 태아에 대하여 가지시는 하나님의 관심을 언급하고 있습니다(16). 하나님께서는 태아를 하나의 인간으로 간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한인간의 주체성이 시작되고 있으며, 바로 모태 속에서부터 모든 가치를 지닌 한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앞선 선택운동(pro-choice movement)을 주창하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목소리 중 하나는 모든 자녀가 원하는자녀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여러분이 어떤 아기를 원치 않는다면 아기를 갖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말을 잠시 동안만이라도 심사 숙고해 보십시오. 이 말은 실상 한 인간의 가치를 다른 사람의 뜻에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태아의 가치는 그 모친이 살려 주겠다고 결정했을 때에만 존재한다는 말인데 이것은 태중의 자녀를 불완전한 인간으로 격하시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비인간으로까지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원치 않는 모든 것, 불완전한 모든 것, 불편한 모든 것에 대하여 사회의 태도는 심각하게 달라졌으며, 모든 생물의 가치가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일 따름입니다.

시편 139편이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바는, 아직 덜 형성된 형질 즉 초기단계의 태아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주체성을 지닌 한 인간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성경말씀을 잘 찾지 못하여 실망할 때가 종종 있는데 때론 이것이, 자기가 원하는 성경말씀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유익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필자는, 의사였던 누가가 누가복음을 기록할 때 임신중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모태 속의 태아들을 묘사함에 있어서 틀림없이 다른 단어들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그 단어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태아나 유아(乳兒), 심지어 어린 아이를 묘사할 때조차 같은 단어인 브레포스(brephos)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누가는 태아가 하나의 인간임을 보여주기 위해 특별한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필자의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서류철 속에 그냥 철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여하간 그 사실만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필자는 그 사실을 도저히 덮어둘 수가 없습니다. 누가는 위에서 말씀 드린 생명의 모든 단계에 대하여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각각이 하나의 완전한 인간으로서 서로 전혀 차이가 없는 브라포스이기 때문입니다. 빈틈없는 의사였던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할 때에도 미출산아와 출산아를 묘사함에 있어서 다른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수태 시에 하나의 완전한 유전 단위가 형성되기 때문에 태아를 더욱 인간답게 만들려고 무엇이 더해질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시간과 크기는 더해질지라도 생명의 본질은 더해지지 않습니다.

시편 139편은 또 태아의 성장과정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단지 시적인 표현 내지는 시편기자의 임의적인 과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독자들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한 마리 참새의 목숨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하물며 그분은 모든 어린이의 출생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겠습니까! 시편 139:16에서 기자는 수태에서부터 출생에 이르기까지 태아의 성장과정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17,18절에서는 하나님의 관심이 죽음과 그 너머에까지 확대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기념하고 있지, 생명을 시적으로 찬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장해 가는 태아에 관하여 그처럼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인공유산을 옹호하는 자들이 그것을 단지 수태의 산물이라든지 비인간”, 기타 다른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자기중심적인 사상이 하나님의 관심을 능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여성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사항들을 스스로 통제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들 하지만 이 말은 거의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기 몸으로 할 수 있다고 해서 법이 이를 다 허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를 잠시 접어두고라도 다음 사항을 고려해 보십시오. 태아도 몸을 지니고 있는 하나의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아 역시 자기 몸을 통제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최소한 그 권리라도 보장받아야 합니다

태아는 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소유한,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성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4절과 15절의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라는 표현들은 이를 잘 입증하고 있습니다. 인간 신체의 발달 과정은 하나님의 걸작입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글에는 다루어져야 할 문제들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간혹 제기되면서도 대법원조차 답변하지 못하는 질문 중의 하나는 생명이 언제부터 시작되느냐?” “영혼이 언제 몸 속으로 들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태아의 신체적 발달이 매우 일찍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랄 것입니다. 심장 활동은 수태 후 14~18일부터 시작되며, 1개월이 지나면 모든 기관들이 형성됩니다. 팔다리의 움직임은 6주부터 시작되고, 뇌파의 활동은 43일만에 탐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뇌파가 없는 것을 뇌사(腦死) 상태에 포함시킵니다. 그런데 태아의 뇌파는 한달 반 만에 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학자들과 교부(敎父)들은 영혼이 몸 속으로 들어가는 문제에 대하여 오랫동안 고심해 왔으며, 그 중에서 오래된 개념들 중 한 가지는, 남자는 40일만에, 여자는 80일만에 영혼이 몸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허무맹랑한 억측일 따름입니다.

모든 논증들을 다 섭렵해 보아도 한가지 근본문제는 여전히 남기 마련입니다. 수태 시에 영혼이 몸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언제 들어갈까요?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도움을 주고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는 저 특별한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의 모태 속에 있었던 분은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에 모든 신자들은 동의할 것입니다. 그분의 영혼은 이미 거기에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것이 유일무이한 사례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침례 요한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가 자기 모친의 모태 속에서 뛰논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필자의 말이 견강부회라고 생각된다면 자궁 내의 생각과 활동을 다루는 주제에 관하여 상당한 증거들이 있다는 사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 시편 51:5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죄악된 아담의 본성이 잉태시부터 존재한다면 바로 그때부터 영혼도 들어간다는 사실에 어느 누가 반박하겠습니까? 출산이 임박한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영혼을 태아에게 주신다는 암시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영혼을 주신다는 사실은 성경의 단 한 군데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2:7). 필자는 이 말씀을 통하여 영혼이 수태시에 전달된다는 암시를 받습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직면해야만 하는 또 다른 난제는, 피해자의 뜻과는 전혀 상반된 범죄의 결과로 발생하는 임신입니다. 성폭력이 임신이라는 결과를 낳으면 피해자는 한 명이 되지만 이것을 인공유산으로 처리하면 피해자는 두 명이 됩니다. 그 범죄의 결과를 제거하는 것은 그 범죄 자체나 그 해악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성 피해자에게 가해진 상처를 되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상처를 그녀의 생애에 남길 뿐입니다.

죄는 손쉬운 해결책을 스스로 찾지 못합니다. 모든 죄와 모든 악은 그 자국마다 슬픔을 남겨놓으며, 인공유산은 큰 죄악이므로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

 

(1995 10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