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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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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 09:18 횃불/1995년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F. B. 메이어

8장 변질된 식욕

그는 재를 먹고 미혹한 마음에 미혹되어서 스스로 그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이사야 44:20)

포로된 이스라엘을 통해 우리는 두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충족성과 하나는 우상의 불합리성이다. 이 두가지 주제가 본장 5절에서 시작해서 20절에서 절정을 맞는 놀라운 단락에서 다뤄져 있다.

하나님의 절대충족성은 6~8절의 주제이다.

우상의 불합리성은 9~20절의 주제이다.

이제 우리가 상고해볼 대목은 그 후자이다. 우리는 당시의 우상공장 안으로 인도된다. 탐사를 시작함에 있어 우리는 우상을 만드는 자들이 허황되다는 것과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이 무익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들이다 모여 서서 아연실색한 중에 완전한 혼란과 수치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고 받는다.

그러한 주의와 함께 우리는 피부가 검게 그을린 대장장이의 우람한 팔에 들린 육중한 쇠망치에 의해 시뻘겋게 달궈진 쇠에서 우상의 형상이 만들어지는 공장으로 들어간다. 확실히 그렇게 만든 제품은 뭔가 도움을 줄만큼 강인할 것이다. 그러나 보라. 대장장이가 서너 시간일한 뒤에 지치고 갈증에 허덕인다. 그렇게 되면 절박한 상황에 처한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을 더 이상 만들 수 없지 않겠는가! 결과가 그 원인보다 클 수는 없다. 그것을 만드는 자가 그토록 쉽게 기진할진대 우상은 영속적인 힘을 제공해 줄 수 없는 것이다(12).

이어서 목공이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정규로 그어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내는 목제 우상 공장으로 인도된다. 바닥은 엷은 대팻밥이 어지러이 널려있고 여기저기 톱밥이 쌓여있고 숭배자들을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해야 할 우상이 그 제조가정에서 전혀 정중하지 않게 다뤄지고 있다(13).

끝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들 뒤를 따라 숲으로 들어간다. 그는 원하는 목적에 적합하도록 오래 전에 심어 길러온 백향목이나 디르사나무, 혹은 상수리나무를 베어 넘긴다. 나무의 일부는 토막을 내어 땔감으로 쌓아놓고 나머지는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 절을 한다. 그 두 가지 행동은 얼마나 대조를 이루는지! 우리는 그 사람이 땔감용 나무를 취해 손을 더웁게 하고 떡을 구워먹으며 즐거워하는 소리를 듣는가 하면, 곧 이어 그가 나머지 나무로 만든 우상 앞에 절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일까? 그들의 행동의 모순점을 깨닫지 못함은 어찌된 영문인가? 이사야 선지자는 사람들이 돌이나 나무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생각과 기도를 집중하는데 도움을 주는 도구로 우상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현대의 이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상숭배의 원인은 보다 깊은데 있다.

그는 재를 먹고 미혹한 마음에 미혹되어서 스스로 그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

 

1. 인간 속에는 신적인 것에 대한 주림이 있다.

그것은 보편적이다.” 모든 인간은 물질적이든 도덕적이든 동일한 계획하에 지어졌다. 몸이 식물을 필요로 하듯 마음은 진리를, 영혼은 하나님을 요구한다. 이것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사실이다. 언제 어디서든 그러한 욕구가 만족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집 주위에는 각종 곡물과 과실을 내는 밭이 있으며, 돌 던질 만한 거리에는 교회당이나 사원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것을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몸을 지탱하는데 필요한 물질에 의해서 인간의 몸의 구성에 간한 정보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은 영원히 인간을 괴롭히는 굶주림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가축은 배불리 음식을 먹으면 만족스레 풀밭에 누워 쉰다. 그러나 인간은 음식을 먹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치 않는다. 인간은 미()와 고결함과 아름다운 색상 및 소리의 조화와 진리의 발견과 하나님의 임재를 찾아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이것이 부분적으로 인기를 얻는 물질주의철학의 허구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만일 인간이 물질이라면, 만일 생각이 뇌의 회색 물질의 운동에 불과하다면, 만일 영혼도 초월세계도 없다면, 물질적인 세계가 최고선을 제공해 줄 수 없음은 어찌된 영문인가? 그리고 솔로몬의 경우처럼 인생이 부와 권세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가득찼음에도 그 모든 것을 헛되고 헛된 것으로 여기며 쓸쓸히 돌아서는 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그것이, 인간의속성에는 시간과 공간의 내용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시간을 뛰어넘고 영원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속한 요소가 있음을 말해주지 않는가? 만일 인간이 신적인 것에 굶주려 있다면 인간 속에 신적인 요소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영적이고 영원한 것만이 인간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면 그 영적이고 영원한 요소가인간 속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필수불가결하다.” 식물이 인체 내에서 수행하는 기능은 세 가지이다. 식물은 첫째로 인체의 조직을 약화시키는 노폐물을 갈아주고 둘째로 체온을36~37도로 유지시키고 그리고 셋째로 성장에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는데 필요하다. 이 세가지는 영적으로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몸이 식물을 필요로 하는 동일한 세가지 이유에서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1)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체력의 노폐물을 갈아주기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행동하거나 말을 할 때마다 우리의 속성의 일정 분량을 소모한다. 말하자면 신경이나 근육의 미세한 부분을 소모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소생되거나 대체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인생은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해체와 부패의 세력에 대항한 끊임없는 싸움이다.

영적인 영역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모든 이타적인 행동, 잘못에 대한 모든 저항,순결과 평화와 의를 위한 모든 노력, 모든 올바른 사고와 삶과 일, 병든 자를 방문한 일, 대화, 도덕적으로 뛰어난 행동들, 등 모든 것이 우리의 영적인 힘을 소모시킨다. 우리는 영적인 활력이 약화되고 소진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조용한 사귐의 시간을 가짐으로 우리 자신을 소생케 하고 소모된 힘을 재충전해야 한다.

 

(2) 우리는 온기를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추울 때 몸은 충분한 탄소공급을 필요로 한다. 연료가 충분히 채워져야 하는 것이다. 방대한 혈액순환조직의 각 지점마다 혈관을 막는 노폐물을 소각시키고 체온을 유지시키기 위해 늘 불이 타고 있어야 한다. 그렇듯 우리는 참 위로자의 위로와, 사랑과 믿음과 소망의 새롭게 됨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한번,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

 

(3) 우리는 성장을 위해서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어린아이가 성장하기 위해 우유를 먹어야 하듯이,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의 게걸스런 식욕이 자연이 그 성장을 위해 주문하는 엄청난 요구를 말해주듯이, 우리의 영적인 성장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만큼이나 섭취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러한 신적인 양식의 부족으로 인해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강인한 성인이 되지 못한채 어린아이 수준에 항상 머물러 있다. 내적인 짧을 세워주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고도 친밀한 사귐이다. 그리고 그것은 직접적일수록 더욱 좋다.

 

2. 그러한 식욕은 변질될 수 있다.

그는 재를 먹고····식욕 자체는 아주 건강한데 부적합한 물질이 공급될 수도 있다. 양식이 없을 때 중국인들은 일종의 식용 흙을 대체식물로 사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아프리카 서부해안의 흑인들은 황갈색 흙에 거친 밀가루를 섞어 생계를 유지한다고 하며, 자바섬 원주민들은 진흙을 둥글게 반죽하여 고급양식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이런 저런 방법으로 사람들은 그들의 자연적인 식욕을 바꿔놓는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해 돈을 쓰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의 근본을 이루는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향한 그 놀라운 열망-거부되고 무시될 수도 있으나 여전히 채워질 것을 요구하는 이상적인 양식, 이상적인 미(), 이상적인 진리에 대한 주림-을 다루는 그들의 태도에 있어서도 그와 흡사한 양상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러한 주림을 하나님 안에서 찾기보다는 우상의 재에서 찾으려 한다.

사람들은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 감각주의자는 종교의 이름 아래 엄청난 부도덕에 바쳐진 섬 주위에서 푸른 에게해의 속삭이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건만 및 비너스 신전에서 경배를 올린다. 그는 육체적인 욕구충족의 재를 통해 신의 사랑에 대한 자신의 주림을 채워보려 노력한다

세속적인 사람은 돈과 명예와 높은 지위를 숭배한다. 그는 그것들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는 이 세상 신의신전에서 가장 좋은 예물을 바치며 그의 도움을 호소하고 그의 노를 달래고 그의 미소를 얻고자 노력한다. 황금 송아지가 여전히 경배의 중심으로서 화관이 장식되어 있고 즐거워하는 무리가 둘러서 있다. 그 엄위한 시내산 꼭대기에서는 쉐키나와 더불어 구름 장막이 붉게 타올랐지만 산 아래서는 값진 제물이 금송아지 앞에서 연기를 피웠다.

유행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인간의 견해의 성전에서 경배하며 인간의 박수갈채의 재를 먹고 산다. 전능자의 잘 하였도다!”는 칭찬으로 충족되어야 할 식욕을 그것으로 대신 채우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학생은 학습의 성전에서 경배를 한다. 그리고 영원한 진리로 양육되어야 할 식욕을 인간의 견해의 재로 채운다.

모험적인 행동에 대한 애착이 강한 군인은 마르스(Mars, 군신(軍神)-역주) 신전에서 경배하고, 또 압제받는 자들을 위해 큰 도움을 주고자 하는 식욕을 군사적인 흥분의 재로 채우는 경향이 있다. 비록 물질적인 형태는 줄어들었지만 우상숭배는 어떤 형태로든 과거 어느 때 못지 않게 우리 가운데 만연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경우에 있어 그 우상들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것으로 인간은 자신을 만족시키려 애쓰지만 그것은 재가 물질 생활을 만족시킬 수 없듯이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다.

 

3. 참된 양식-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6:32). 떡에 대한 주림을 당신 안에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욕구충족을 위한 성장에 필요한 벽을 만드셨다. 물론 양식을 경작하고 준비하는데 있어 인간이 담당할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담당하시는 측면에 비하면 적은 일이다.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65:9). 모든 땅에는 그 토양에 맞는 빵 원료가 있다. 채소마다 그에 맞는 서식지가 있다 감람나무는 래브라도(Labrador, 북아메리카 북동부의 허드슨만과 대서양 사이의 반도-역주)에서는 자라지 않으며, 전나무는 아마존강 주변에서는 번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옥수수는 모든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모든 토양에서 자란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정서를 위해서 미(), 우리의 사고를 위해서 진리를,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위해서 사랑을 예비해 주셨다. 그리고 그 모든 것과 그밖에 많은 것들을 모아 그분의 한가지선물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속에 넣어 주셨는데 그분은 옥수수가 몸의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듯이 우리의 내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 안에 담고 계신다.

자연은 죽음을 통해 인간에게 그 예비한 것을 공급해 준다.” 길게 늘어선 옥수수 군대는 낫에 의해 베어 넘어진다. 그 연한 식물은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고 맷돌에 갈아지고 불에 달구어진다. 가축들도 끔찍한 쇠망치나 칼날 아래 쓰러진다. 숲의 야생동물들은 총에 맞아 맥없이 쓰러진다. 예수께서 사람들의 양식이 되신 것도 죽음을 통해서이다. 주님의 만찬은 영원히 그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우리를 자라게 하는 벽과 포도주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의 몸과 피의 상징물이다. 그 거룩한 예식을 통해 우리는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의 죽음을 기념한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자라게 하는 생명이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 죽음의 고통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상징하는 몸과 피를 자주 언급하셨다는 것은 이 사실, 즉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만이,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만이 그분이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되실 수 있다는 사실 ( 6:53~57)을 강화 내지 강조해 준다.

이제 우리가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본이나 행실 (죽음을 제외하고)을 통해서가 아니라 죽음으로 그분과 연합되고 죽음을 통해 그 모든 특질들을 통과하고 그리고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라고 하신 그분의 말씀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하자. 주 예수께서 인간의 영적인 속성의 양식이 되신 것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우리의 양식을 소화시켜야만 한다.”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제시된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을 먹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어떠하심과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을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인 지각을 사용하여 그분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특히 시험과 실패의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 특별한 필요들에 대응하기 위해 그분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강해지고 또 기쁨이 충만케 될 것이다 충만한 생명이 우리에 게 부여될 것이다. 하나님의 낙원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를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 같이 우리가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1995 10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