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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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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7. 14:44 횃불/1995년

J. N. 다비의 성경 개요

 

18

베드로전서가 마태복음 16장에서 발견되고 베드로후서가 우리가 방금 상고한 마태복음 17장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16장에서 베드로는 아버지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주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으며, 이에 주님은 이 반석 위에 그분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며 사망의 권세 잡은 자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그의 첫번째 서신에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거듭나서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제 그 부활로 말미암아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난바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그리스도를 산돌로 부르며, 우리가 산 돌처럼 그분께로 나아와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진다고 말합니다.

두번째 서신에서 그는 그 변화산 사건의 영광을 인자의 강림하심과 나라의 증거로 특별한 방법으로 회상합니다. 요컨대 그는 그 서신에서 주님의 심판에 대해 말합니다.

이제 18장에서는 새로운 질서에 적합한 중요한 원리들이 제자들에게 알려 집니다. 그러면 이 아름답고 소중한 주님의 가르침을 잠시 상고해 볼까 합니다.

이 가르침은 두 가지 면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것은 은혜와 진리에 대한증거로서 이 땅에서 주님의 위치를 대신할 것에 관한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주며, 아울러 그것은 본질상 전해져야 할 참 증거인 인격을 묘사해 줍니다.

본 장은 그리스도께서 거절당하여 계시지 않고, 17장의 영광은 아직 오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18장은 16장과 연결되기 위해 17장을 건너 쉽니다(17장 말미의 구절들이 하나님께서 그것을 옹호하실 때까지 주님께서 자신의 참된 권리들을 포기하신 것에 대해 실질적으로 증거해주는 경우를 제외하고). 주님은 16장에 포함된 두 가지 주제인 왕국과 교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왕국에 합당한 것은 어린아이의 유순함인데, 어린아이는 세상에 맞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그런 자로서 의존과 겸손의 영을 말해 줍니다. 제자들은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거절당한 주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그것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합당한 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한 자는 예수님 자신을 영접한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는 소자 중 하나가 걷는 길에 걸림돌을 놓는 자는 가장 무서운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슬프게도 세상이 그렇게 행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세상에 화가 미칠 것입니다. 제자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만일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그들에게 올무가 된다면 그들은 그것을 뽑고 잘라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소자에게 걸림이 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하되 혹 조금이라도 걸림이 되었을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게 최대한 가혹한 채찍을 가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몹시 소중한 것을 잃은 것은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상태와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현재의 문제였고, 죄는 하나님의 집에 전혀 발을 들여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약한 자라도 다른 사람들을 깊이 생자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한 것이 아무 걸림이나 악이 없도록 하기 위한 왕국의 규례였습니다 들은 이 소자들을 멸시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 소자들은 비록 스스로 세상을 헤쳐나갈 힘은 없다 하더라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왕의 얼굴을 뵙는 특권을 지닌 자들처럼 아버지의 특별한 은총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아무 죄도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진 자들을 멸시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소자 중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어린아이들을 그 팔로 안은 자들처럼 말씀하셨다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제자들에게 한편으로는 겸손과 의존의 마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진실로 왕국의 자녀들이 되기 위해서 본받아야 할 아버지의 마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아울러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중요성을 유지하고자 애쓰는 인간의 마음으로 행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고 모욕적인 언동에 굴복할 것을, 그와 동시에 겸손한자들을 생각하사 그분의 존전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시는 아버지를 본받을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인자가 오신 것은 무가치한 자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5장 끝부분에 언급된 은혜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왕국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보다 특별히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죄를 범한 경우와 관련하여 그 동일한 온유의 영이 그분의 제자에게 합당했습니다. 그는 그 형제를 얻어야 했습니다. 만일 그 형제가 듣는다면 그 일은 피해자의 마음 속에 묻혀져야 했습니다. 만일 듣지 않는다면 그의 양심에 호소하기 위해, 혹은 증인 역할을 하기 위해 두 세 사람이 피해자와 함께 그를 찾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적절한 방법이 아무 소용없다면 그 일은 교회에 알려져야 했고, 만일 그래도 그 형제가 죄를 자복하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겨야 했습니다. 여기서 다뤄지는 문제는 교회의 공적인 치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지니고 행해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만일 그 일이 거론될 때 범죄자가 자복하되 하루에 일흔번씩 일곱번이나 자복하더라도 그는 용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교회의 징계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교회가 이 땅에서 이스라엘의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후로는 밖에 있는 것과 안에 있는 것이 그것에 적용되었습니다. 교회가 땅에서 맨 것을 하늘이 인준해줄 것이며, 합심하여 구하는 두 세 사람의 기도를 아버지께서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는 두세 사람이 그분의 이름 안에서 혹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함께 모이는 그곳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그들은 결정과 기도에 있어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도 같았는데 이는 그리스도자신이 그들과 함께 그곳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엄위한 진리인지요! 진실로 그분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두 세 사람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총이 베풀어지는지요! 그러나 실재가 없이 그러한 연합이 고백될 때는 그분의 이름은 크나큰 슬픔의 주제를 형성케 됩니다.

하나님 안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왕국에 합당한 인격의 또 한 요소는 용서의 은혜입니다. 왕국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하며 항상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은 공적인 징 계가 아니라 개인에게 행해진 잘못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끝까지 용서해야 합니다. 아니 끝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용서해주셨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제가 믿기에 여기에는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위해 중재하셨습니다. 그러한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에 의해,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예비적인 용서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은혜 역시 거절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분명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들인 이방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문제였을 때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그들은 주님께서 저희는 저희 모든 죄에 대해 갑절이나 받았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형벌에 처해집니다.

간단히 말해서 왕국의 영은 외적인 능력이 아니라 겸손함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 가운데 아버지께 가까이함이 있으며, 그러할 때 이 세상에서 온유하고 겸손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맛본 사람은 땅에서 위대함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은혜의 영으로 젖어 있어서 비루한 자들을 사랑하며 자기에게 잘못을 행한 자들을 용서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그 삶에 있어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교회 안에서든 그 지체 안에서든 동일한 은혜의 영이 다스립니다. 그것만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백성을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 받아들인 것 위에 기초하는 규정들은 그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두 세 사람은 그분의 권위로 행동하며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특권들을 누리는데, 이는 예수님 자신이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19

19장은 천국에 합하는 영이란 주제를 가지고 인간 본성을 지배하는 원리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에 의해 소개된 것의 원리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바리새인들에 의해 제기된-주님께서 유대 가까이에 이르셨으므로-질문은 결혼에 대한 그분의 교훈을 해설할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해 주어진 율법에서 고개를 돌려 하나님의 규례로 돌아가십니다. 그 규례에 따르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여 하나님 앞에서 한 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분은 결혼의 불가분의 결속의 진정한 성격을 확립, 아니 재확립 하십니다. 제가 그것을 불가분 하다고 부른 것은 결혼관계에 불충실한 경우 허용되는 예외는 예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범죄한 쪽이 이미 결속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한 몸된 남녀가 아니었습니다. 한편, 만일 하나님께서 그에 필요한 영적인 능력을 주셨다면 결혼하지 않은 채 머물러 있는 것이 훨씬 나았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어린아이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증거하시면서 그들과 관계된 가르침을 새롭게 하십니다. 여기서 그것은 제가 보기에 세상과 그 혼란과 방종에 속한 일체의 것이 없이 사랑스럽고 천진하고 외면상 그 성품이 더럽혀지지 않은 것을 소유한 상태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반면에 18장에서는 그것이 왕국의 본질적인 특성이었습니다. 이 후에 그분은,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일념뿐이라면, 모든 것을 바치고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그분의 위() 안에서 왕국이 소개된 것과 관련하여) 세상의 영은 모든 면에서, 육신적인 욕망과 재물 양면에 있어서 반대되었습니다. 분명 모세 율법은 그러한 욕망을 저지했으나, 그러나 그것은 그 욕망을 가정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감수합니다. 세상의 영광에 따르면 어린아이는 아무 가치도 없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세상에서 무슨 권세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어린아이가 가치가 있습니다.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을 약속했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그 요구사항에 있어 단순하고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하십니다. 아니 오히려 그 참된 단순성 안에서 그것들을 회상하십니다. ()는 율법에 의해 금지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율법에 의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도덕적인 의무가 보존되긴 했지만 마음을 세상에 구속시키는 것은 율법에 의해 판단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치리에 의하면, 번성이 율법에 대한순종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을 전제로 하고 거기서 그를 시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십니다만 그러나 마음의 동기가 시험을 받습니다. 율법은 신령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거기에 계셨습니다. 우리는 전에 발견한 것-인간이 시험과 진단을 받고 하나님이 계시되는 것-을 다시금 발견합니다. 모든 것이 그 성격상 본질적이고 영원한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그 이기심을 자극하고 그로써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분리시키는 일체의 것을 판단하십니다. “네 소유를 팔고 그리고 나를 좇으라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슬프게도 그 청년은 자신의 소유와 자신의 안락과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요 천국이었으며 자아나 세상은 그곳에 거할 곳이 없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그렇게 은총을 많이 받고 성품이 좋은 사람이 여전히 구원과 거리가 멀다는 것에 대해 의아해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이제 전체 진리가 자명해 집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육신의 욕망을 이길 수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그리고 그의 의지와 관심사에 있어서 그러나 욕망들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우리는 흑인을 희게 만들거나 표범의 점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나타내는 것은 그들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게는-그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베드로로 하여금 모든 것을 부인한 자들이 얻을 분깃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게끔 합니다. 이것은 우리로 17장의 영광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거기에는 소생이 있을 것이며 인자의 지배 아래서 만물의 상태가 완전히 새로와 질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은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입니다 그들은 지상왕국의 통치부에서 으뜸되는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각기 제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부인했든 간에 모두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땅에서의 외양이나, 옛 조직 안에서 사람들 앞에서 차지하던 위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먼저 된자로서 나중 될 것이고 어떤 이들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것입니다.

 

20

그러나 두렵게도 인간의 육신적인 마음은 자신의 모든 수고와 모든 희생에 대한보상의 형태로 주어진 그러한 격려를 물질적인 의미로 취하여 하나님을 자신의 채무자로 만들고자 합니다. 이에 주님은 비유를 통해 강화를 계속 하시면서(20) 그분이 주시는 것 안에서, 그리 그분이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부르시는 자들을 향하여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의 원리를 확립하시며, 그분의 포도원으로 친히 이끄시는 자들에게 주시는 그분의 은사들을 그분의 은혜와 부르심에 의존하게끔 만드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실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따라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기는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나를 좇는 너희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이름을 위해서 그것을 행한 자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동기였습니다. 상급은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이미 그 길에 있을 때 주어지는 하나의 격려 입니다. 신약에서 상급이 언급된 배경은 항상 그러합니다. 11 부름 받은 자는 일터로 들어가기 위해 그러한 부르심에 의존했습니다. 그리고 촉 주인이 친절하게도 그에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임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해도 다른 이들은 마땅히 기뻐했어야 했습니다. 먼저 온 자들은 공의에 호소했습니다. 그들은 합의된 것을 받았고 나중 온 자들은 주인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은혜와, 은혜에 대한신뢰의 원리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이 비유에서 말하는 요점은 그것, 즉 포도원 주인의 은혜와 그들의 행동의 근거가 되는 은혜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깨달았을까요? 바울이란 인물은 하나님에 의해 나중에 부름을 받아 들어왔으나 복음시대 초기부터 활동한 다른 일꾼들보다 더 능력 있는 은혜의 증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후에 제자들과 함께 그 주제를 계속 전개시키십니다. 그분은 거절과 죽임을 당하고 후에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그곳은 메시아가 당연히 영접되고 왕위에 올리워야 할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이 와서 왕국의 첫째와 둘째 자리를 요구하자 그분은 자신이 그들을 정말로 고난으로 이끌 수 있으며 , 그러나 그분의 왕국의 첫째 가리는 그분이 수여하실 수 없었고 아버지께서 예비한 자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주어질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자기부인인지요! 그분이 일하시는 것은 아버지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스스로 처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자기를 좇고자 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밖에 다른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있는 완전함에는 얼마나 진정한 영광이 있으며, 우리가 그러한 동기만을 갖고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며, 그리고 우리로 오직 고난당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행동하게 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때 우리의 육신적인 마음이 얼마나 놀랍게 정화될는지요!

 

(1995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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