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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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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7. 14:48 횃불/1995년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F. B. 메이어

10장 요구와 명령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 빗장을 꺾고”( 45:2).

 

위 말씀이 그 일부를 이루는 단락의 서두에는 한 아름다운 상()이 첫 대문자처럼 서 있다. 선견자의 눈에는 땅이 하늘의 구름이 걸려있고 대기가 숨을 쉬고 그리고 태양이 빛줄기를 뿌리고 있는 광활한 곡창지대처럼 하늘을 향해 펼쳐 있다. 그 구름들은 본서 전체에 결쳐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 특별한 용어인 의()로 충만하다. 기도의 호소에 하늘들이 그 소중한 보화를 쏟아 부으며, 땅은 풍부한 비를 흡수하고자 모든 흡입구를 연다. 곧 하나님의 의()가 하감한데 대한 반응으로 온 땅이 구원을 열매 맺고 사람들의 심령에서 의()가 솟아오른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혼인예식으로서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고 한 시편의 예언의 성취이다.

여기에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개념이 담겨 있으니 하늘이 잉태하고 땅이 그에 반응하는 것이다. 깊음이 깊음을 부르고 있다. 하나님의 속성이 생기와 감화를 불어넣고 인간의 속성이 그에 반응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감하는 은혜가 그와같이 인간의 믿고 열망하는 마음에 의해 받아들여질 때 그 결과는 구원이다. 개정역(R.V)의 난하주에는 하늘들로 구원을 열매 맺게 하고 땅으로 의가 솟아나게 하라고 옮겨져 있다. 본 장 끝까지에 이르는 전체 단락에는 그 핵심주제인 구원의 환희가 울려퍼져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숨기시는가?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구원자이시다. 우상을 만든 자들은 수치를 당하고 혼란에 빠지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이스라엘은 영원한 구원으로 구원을 받는다. 놋으로 만든 우상들은 경멸을 당하지 않는가? 이는 그것들이 능히 구원치 못하는 신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견줄데 없는 신성을 주장하시지 않는가?

이는 그분은 공의의 하나님이요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비록 멀리 땅 끝까지 옮겨질지라도 그분을 바라보라는 명령을 듣지 않는가? 이는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우선적으로 이 구원은 택한 백성을 바벨론 노예상태에서 해방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과 관계된다.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3). 죄의 정죄와 권세로부터의 보다 큰 구원을 상징하는 이 구원은 하나님의 정한 목적 안에서 세상과 인간의 창조만큼이나 확실했다. 그것은 하늘들로 뻗친 손들과 그 모든 군대에게 명하는 말씀에 의해 보증되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그분은 친히 그들의 조상에게 주어 물려주게 하신 그 땅으로 그분의 백성들을 다시금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하나님의 결정의 선포와 더불어, 다음과 같이 화자(話者)에 대한 삼중적인 묘사로 그 중요성이 강조된 기이한 명령이 선포된다:

여호와”- , 영원한 구속적 목적을 지닌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 이방 종교들에 만연된 가증한 모습들과 대조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함;

그의 창조자”- 아브라함 시대에 메소포타미아의 고지대에서 채취한 진흙으로 그분의 용도에 맞는 훌륭한 그릇을 만들고 있는 목적을 암시해 준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삼중적인 묘사는 하나님의 마음에 담긴 목적의 성취를 위해 기도로 구하라고 백성들을 권한 그 엄위한 명령을 제시해 준다.

쇳덩어리로 만든 육중한 배가 대양으로 서서히, 위엄있게 미끄러져 나가는데 있어 이따금씩 어린아이의 손가락과 같은 힘이 그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만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하나님의 모든 목적과, 그것을 이루는데 사용되는 섭리 적인 기계들은 택한 백성이 그분이 약속하신 것들을 요구하고 심지어 그분의 마음에 담긴 일에 관해 그분께 명령할 때까지 보류 상태에 있었다. 고레스의 승전 기록, 바벨론 왕에 대한 제사장 계급의 불만, 대제국의 멸망에 대한 분명한 조짐들, 예레미야에 의해 예언된 70년 기한의 임박한 마침 등 모든 것이, 백성들이 다니엘처럼 기도와 간구로써,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쓴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 얼굴을 돌리고 그분의 말씀의 성취를 구하지 않는 한( 9:3) 아무 소용없었다.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행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될 연결고리이다 -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11). 하나님께서는 항상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아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라”( 2:8). 그리고 내가····하리라는 복스런 약속들로 장식되고 또 그분이 하실 준비가 된 사역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 자신을 위해서-을 펼쳐 보이고 있는 단락의 끝에서, 택한 백성들에게 그분은 그래도 이스라엘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고 말씀하신다( 36:37). 우리 주님은 기도를 끊임없이 강조하시며, 그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행하겠다고 약속하신다( 14:13), 야고보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한가지 이유는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4:2).

따라서 본문의 선언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연결고리로서 기도의 중요성을 증거하는 많은 성경 구절들에 의해 지지된다.

(1) 기도는 자연과 생명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협력체제의 일부이다. 아무 알곡도 가을 들녘에서 넘실대지 않고, 아무 빵도 우리의 아침 식탁에 놓이지 않고, 아무 금속도 그 유용한 봉사를 하지 않고, 아무 보석도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지 않고, 아무 연로도벽난로나 화로에서 타오르지 않는 등등의 상태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그러한 이중적인 동역을 증거해주지 않는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그와 같이 협력이 있어야만 한다. 비록 인간 편에서는 종종, 희미하고 미약해 보이는 기도에 국한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샘에 파문을 일으킨다. 광부의 마지막 괭이질에 의해 광맥이 터져 검은 기름이 솟아나고 반짝이는 보석이 발견되듯이 말이다.

(2) 기도는, 진실할 경우, 하나님께서 받는 자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않고 자신의 가장 좋은 선물을 맡기실 수 있는 성향의 존재를 시사한다. 겸손과 복종이 없이, 그리고 피조물의 도움으로부터 영혼을 격리시키는 일이 없이 어떤 이들을 축복하는 것은 오히려 해를 끼칠 뿐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 지극한 사랑 안에서, 마음이 온전히 부서진 채 그분께 부르짖을 때까지는 자신의 최선의 선물을 보류하신다. 그러한 부르짖음은 영혼의 건강의 복스런 증표이다. 선지자 엘리사가 그 몸에 엎드릴 때 아이가 재채기를 한 것처럼(왕하 4:32~37) 그것은 생명이 돌아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순전한 마음은, 독수리의 위엄있는 비행이 그 높이에 도달할 수 없고, 심오한 사상이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그러한 축복을 아무 위험없이 받을 수 있다.

(3) 기도는 또한 그 본질상, 믿음으로 감화될 경우, 하나님을 향한 열려짐이요, 수용성(受容性)이요,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열린 손으로 부여잡는 능력이다. 그분의 약속 위에 선 채, 간구자는 하늘을 향해 축복을 내려달라고 부르짖는다. 복이 채워지도록 그 마음과 손과 입술이 활짝 열린채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기도에 힘쓰도록 하자.

연합적으로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개개의 가족들이 기도하러 모이는 야곱의 거처들보다 무리가 모이는 시온의문들을 더 사랑하신다. 그분은 이스라엘족속(혹은 ”)에 의해 구한바 되실 것이다. 만일 지역사회 전체가 주권자에게 어떤 간구를 드리고 있는데 두 세 사람이 따로 모여 기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연주의를 끌만 하지 못한 것으로 제쳐질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백성이 그분의 약속의 성취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두 세 사람이 따로 모여 기도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같은 마음으로기도하자. 기도를 위한 모임은 몸이 아니라 영혼의 모임이어야 한다. 한 사람이 소리내어 기도하면 모두가 조용히 기도해야 한다. 다른이들 앞에서 드려진 기도는 그들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 독백이나 토론이나 진리에 대한 어떤 특별한 관점을 강조하는 것 등은 기도회 속에 자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아무 기도제목도 없고, 생각은 이러 저리 방황하고, 단순한 관심만을 표하는 모습은 고개를 떨구고 얼굴을 가리우고 경건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자들에 게 합당한 마음가짐이 아니다.

열심히기도하자. 기도는 길이가 아닌 능력으로 측정된다. 기도의 가치를 재는 하나님의 척도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압박했느냐 이다. 기도의 자물쇠는 때때로 몹시 견고하며 우리의의지력을 요구한다. 천국은 힘이 있어야 취할 수 있다 기도에 힘쓰고 애쓸 것을 성경은 권한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이나 바벨론의 다니엘, 그리고 바울이 세낸 집에 있던 에바브라 등이 그러했다. 옛날 지하동굴에서 깜박이는 등불아래서 드려진 기도들도 그러했고, 왈도파 신도들이 모였던 알프스 산골의 동굴이나, 언약자들이 절벽 아래 은둔하던 산기슭에서 드려진 기도도 그러했다. 우리의 기도소리가 하나님의 임재의 방의 문들을 두드리는 소리가 되어 울려 퍼지도록 하자.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들을 위하여 구하고”( 6:18).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에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되 그 응답은 우리의 간청의 강도(强度)와 지속성에 달려있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도록 하자.

예수님의 이름으로기도하자. 우리 주님의 일에 너무 심취되고 그분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분의 관심사와 우리의 관심사가 일치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우리가 기도드릴 때 마치 성자께서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성부께 아뢰고, 우리를 통해서 중보와 간구를 쏟아붓고 계신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이것이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드릴 것을 거듭 강조하실 때 그분이 뜻하신 바이다. 자식의 마음이 하나님의 얼굴을 우러러 보며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것은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기만 하면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된 이타적인 마음이요, 그 중심이 주님의 관심사에 있는 사랑의 마음이다. 이모든 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 속에 포함된 의미이다. 그리고 그같이 기도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장래 일의 성취를 확신하게 된다.

본문에 나타난 믿음에 대한 명령적인 강조를 보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12).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여 내가 원하나이다라고 하실 때 그런 어조로 말씀하셨다. 여호수아도 그 승리의절정의 순간에 이르러 지는 태양을 향해 창을 높이 들고 태양아 너는 머무르라!”고 외칠 때( 10:12) 그런 어조를 사용했다. 엘리야도 3년 반 동안 하늘을 닫았다가 다시 열 때 그런 어조를 사용했으며, 루터도 죽어가는 멜랑흐톤 곁에 무릎을 꿇고 죽음이 그를 취해가지 못하도록 명할 때 그런 어조를 사용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들어가도록 명하시는 놀라운 관계이다. 우리는 그분께 순종하는데 익숙해 있다. 우리는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고 하시는 그런 말씀들에 친숙해 있다.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께 명하라고 청하신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관계의 변화이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의 문자적인 위력에 대해서는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명령이 그분의 아들들과 그분의 손으로 하신 일과 관계가 있고 또 그분의 약속의 말씀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제한만을 두신 채로 여호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의 구속받은 자녀인 우리에게 내게 부탁하라(command, “명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러한 태도는, 우리가 익숙해진, 그리고 습관적인 반복으로 인해 그 날카로움과 촛점을 잃어버린, 주저하고 멈추고 믿지 못하는 기도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이 자리서 응답하시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먼 훗날에, 조금씩 조금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에 구멍을 내듯이 그 기도들이 뭔가 큰 일을 이를 수 있음을 상상해 본다.

예수님은 지상 생애 중에 얼마나 종종 사람들로 그분께 명령하는 위치에 서게 하셨는가! 그분은 여리고를 떠나 갈 때에 멈추어 서서 소경된 거지들에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는데( 20:33) 이는 나는 너희의 명령에 따를 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분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자신의 자원을 얻는 열쇠를 건네주시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누리라고 말씀하신 일을 어찌 우리가 잊을 수 있겠는가?( 7 :29) 그분과의 오랜 사권은 사도들의 언어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성령 충만한 기도에서 우리는 이 동일한 명령의 어조를 감지할 수 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4:29).

우리 죽을 인생이 어찌 우리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으로 그 어린 자녀들을 이끄시는 그 위치의 장려함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분은 그 자녀들을 그분 곁에, 그 보좌 옆에 두시고, 그분의 성령의 불이 그들을 감찰하여 완고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제거하시는 동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듯하다. “내 모든 자원이 네 명령에 달려 있으니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하라. 무엇이든지 네가 구하는 그것을 내가 시행하리라.”

세상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강한 힘들로 가득 차 있다. 빛은 우리의 모습을 그려주며, 자력(磁力)은 우리의 멧세지를 전해 주며, ()은 우리의 필요한 기구들을 만들어 주며, 질소는 바위를 산산히 부숴뜨린다. 이밖에 너무 많은 문명의 이기(利器)들이 쏟아져 나와 문명화된 사회의 인류의 육체적인 기능은 사용하지 않음으로 인해퇴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은 우주의 강한 힘들을 다스리는 기술에 있어 갈수록 발전하고 있으며 그 힘들을 이용하여 인간의 진보의 찬란한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요컨대 세상에 대한 인간의 옛 우월함이 어느 정도 그에게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 거대한 자연력들-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들인-이 그렇게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베이컨 시대 이래로 인간이 자연조건들을 열심히 연구하여 철저히 그것에 복종했기 때문이 아닌가? “힘의 법칙에 복종하라 그러면 힘이 당신에게 복종할 것이다라는 말은 물리학에 있어 철칙에 가깝다. 가성, 만일 당신이 전기의 법칙을 연구하고 그것에 주의깊게 복종하여 그 에너지가 흐를 수 있는 전선을 설치한다면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류를 보내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 당신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기의 성격에 정확히 일치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뿐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하나님의 모든 자원은 부활하여 영화롭게 되신 주님 안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과 우리의 빈곤 사이에 개입하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된다. 말하자면 대양을 통해 세상의 부()가 런던이나 뉴욕의 부두로 흘러 들어 가듯이 전자(우리의 빈곤)가 후자(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로 이끌림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이 역사하는 방법 -그 장애요인 및 보조요인, 그 촉진요소 및 저해요소-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성령께 복종하라, 그러면 성령께서 영혼 안에, 영혼을 통해 강한 에너지를 부어 넣으시되 사람들로 그 무진장한 공급에 넋을 잃게 하실 것이다. 반대로 성령을 저항하거나 물리치라, 그러면 성령께서도 영혼을 멀리 하사 온갖 난관과 시련을 그 홀로 대항하며 힘겹게 싸우도록 내버려 두실 것이다.

, 사랑하는 형제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라! 그분이 뭐라고 말씀하시든 그것을 행하라. 한치의 착오도 없이 철저히 순종하도록 유의하라. 하나님이 당신과 동행하시도록 하라. 하나님께 자신을 맡길수록 당신은 하나님과 더불어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지휘관의 권위 아래 철저히 머물수록 당신은 그분의 자원들을 향해 가라, 오라, 혹은 이런 저런 일을 하라고 명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고 자신의 열쇠를 내어주며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허락하실 것이다. 당신은 그분과 몹시 친밀한 관계를 즐길 것이며, 그분이 자기에게 명령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그리고, 종에게 맞는 공경심과 구원받은 죄인에게 합당한 태도를 결코 잊지 않는 가운데 당신은 그분의 아들들과 그분의 손이 하시는 일에 관하여 그분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도와 믿음이란 가장 중요한 행위 뒤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될 것이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오게 한 뒤에 얼굴을 무릎 사이에 두고 땅에 부복한 엘리야처럼 말이다. 거룩한 영혼들은 항상 상하고 참회하는 마음의 제사를 드린다. 세상을 움직이는 팔을 움직이는 능력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는 고백을 극히 겸손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자들에 의해 행사된다.

 

(1995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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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