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3. 12. 17. 14:50 횃불/1995년

결혼과 가정(11)

실패하는 아버지

A. J. 히긴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한없는 지혜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의 역할과 책임의 영역을 설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각 역할의 잠재적인 선()은 그것을 오용했을 때 야기될 수 있는 잠재적인 악()과 정비례합니다(, 좋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큰 만큼 나쁜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커진다는 뜻임 -역주).

아버지의 역할은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영역입니다. 그런데도 현대 사회에서는 아기보는 사람이나 탁아소 따위가 보모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데 이것은 슬픈 현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질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시사하기를, 모든 아버지의 역할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을 제정하신 한가지 이유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하나됨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땅의 가정 생활은 영적인 하나님 가족의 가정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엄청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성경적인아버지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는 성부(聖父)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깊은 통찰력이 상급으로 주어집니다.

그들은, 자기 자녀가 구원을 받은 후 하나님의 아버지 역할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면서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표준을 따르지 않는 아버지들에게는 반대의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우리가 지금 완벽(完瑩)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표준에 할 수 있는 한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자세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역사서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수많은 남자들의 가정생활을 연대기에 올리고 있습니다. 이 사례들 안에서 우리는 실패한 아버지들의 비극적인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필자는 사실, 부정적인 면들을 길게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필자는 다윗이나 사무엘 같은 사람들의 실패를 지적하면서 은근히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교훈을 위해 그 사례들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역할을 크게 강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복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에게 두셨습니다. 문제들이 발생하면 우리는 그 책임을 자기 배우자에게 떠맡기고 비난하기를 일삼지만 한 가정의 최종적인 권위는 아버지가 지니고 있기에 모든 계획과 결정과 훈육은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책임인 것입니다. 물론 이것들은 아내와 협력하여 수행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필자와 함께 룻기와 사무엘상, 하에 나와 있는 몇 아버지들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엘리멜렉 -그릇된 모범의 유산

맨 처음으로 우리의 이목을 끄는 아버지는 엘리멜렉입니다. 그의 이름은,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고 거론하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아무튼 롯기를 읽는 독자들이 맨 먼저 대하게 되는 이름입니다. 우리는 지금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동기를 파악하거나 누가 더 많은 비난을 받아야 할지를 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멜렉의 동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았을지 모르며, 그의 잘못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적었을지 모릅니다. 하여간 성령께서 그것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지는 않고 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간단명료한 정보를 주목해볼 때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이 분명해집니다. 그 당시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대였는데(1) 도덕적, 영적, 가정적 상태가 너무나 하락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동하였으며, 절대적인 것과 규범들이 모세시대에나 해당되는 구식적인 것으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시대의 조류에 떠밀려 가며 살던 한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시련이 닥치자 그는 성경적인 원칙들을 포기하고 편의주의를 채택했음이 분명합니다. 식량과 번영은 모압에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세 개의 무덤과 부서진 가정생활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세 개의 무덤은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모압 땅에서 죽어 장사된 무덤을 가리킴 -역주).

엘리멜렉이 죽자 나오미에게는 두 아들이 남겨졌습니다. 과연 성경적인 원칙이 마침내 승리하고야 말까요? 과연 그들은 예상치 못한 비극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까요? 과연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모압의 밭을 포기하게 될까요?

엘리멜렉은 성경적인 원칙을 이득과 맞바꾸고 말았는데 이제 그의 두 아들마저도 동일한 행동을 답습하고 마는 것입니다. 혹자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혹자는 또 그 두 아들을 옹호하여 이르기를,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편리한 길이 아니었겠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자기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잘 배줬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자기 자녀들에게 어떠한 본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모세의 오랜 믿음 생활은 믿음의 부모로부터 시작되었으며( 11:23), 우리는 흔히 한나의 영향력을 주로 강조하지만 엘가나의 성경적이고 헌신적인 생애 역시 사무엘에게 의미를 부여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언어로 자녀들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인생의 문제들과 시련들에 대한 자신의 반응으로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엘리 -단호하지 못한 결과들

실패한 아버지에 관한 주제를 논할 때마다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은 비참한 엘리 이야기입니다 엘리의 실패를 하나로 요약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질책을 감안할 때(삼상 2) 엘리의 실패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집안에서 실천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들을 제지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책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존중히 여긴것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자기나라를 도덕적으로 순결하게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었는데 자기 가족에 대해서는 두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는 유약하고 어떻게 보면 변명하는 듯한 어조로 자기 아들들의 죄와 부도덕을 나무랐지만 이것만으론 불충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훈육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규범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엘리가 자기아들들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존중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극단에 치우치기 쉬운 존재들이며, 이것은 우리의 크나큰 약점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너무 태만하거나 너무 가혹하거나, 너무 풀어주거나 너무 혹독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균형을 취하려면 주님으로부터 끊임없는 은혜와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안에서 토론하고 옹호하는 일은 그것을 가정 안에서 날마다 실천하는 일보다 훨씬 용이합니다. 우리도 엘리처럼 다른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쉽사리 정죄하면서도 자기 자신에 관계되는 사항들은 변명하기가 일쑤입니다.

 

사무엘 -일관성의 해이(解弛)

사무엘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인물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12장에서 그는 자기 민족 앞에 일어서서 어려서부터 오늘까지자기에게 무슨 악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도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민족이 왕을 요구하는 일을 정당화(正當化)할 구실을 찾았을 때 사람들은 사무엘의 가족을 지적했습니다. 사무엘상 8장에 보면 그가 늙으매 자기 아들들로 브엘세바의 사사를 삼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들은 자기 부친을 닮지 아니하고 소행이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도덕적 파탄은 사무엘의 가정교육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치 못한 그들에게 책임있는 지위가 부여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영향권이 비교적 좁은 브엘세바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사람들의 분노가 위선적인 것은 아니었겠느냐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무엘이 엘리의 실책을 조금이나마 답습했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도 역시 자기 아들들을 편애했던 것입니다. 사무엘의 생애에 있었던 비일관성은 비록 그것이 아주 적은 것이었을망정 사람들로 하여금 왕을 소리쳐 요구하도록 만드는 구실을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본심을 알고 계셨으므로 그들의 위선을 일축하시고 그 민족을 정죄하셨습니다.

가정생활에 있어서 일관성은 필수적입니다. 이것에는 훈육(징계)의 문제뿐만 아니라 개인생활과 우리의 영적 생활까지 포함됩니다. 자녀들은 우리의 처신 속에 있는 비일관성을 즉시 간파해내며, 그 다음에는 이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뻔뻔스럽게 변명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새 -확신의 결여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자 했을 때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한 데 불러 모았습니다. 이때 이새는 자신의 여덟 아들 중에서 일곱 명을 불러왔습니다. 그는 다윗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어쩌다가 실수로 다윗을 빠뜨렸을까요?

이새도 오늘날 우리 모두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사무엘이 적임자를 찾던 그 왕위에 대하여 다윗이 적격자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나이나 키, 몸집, 서열 등 단지육신적인 것으로만 판단했지 하나님이 다윗 속에서 보시던 것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가장 어렸던 까닭에 제외되었으며, 아마도 가족과 그 행복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여김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훌륭하게도, 자기 가족에 대한 악감이나 적의를 결코 나타내지 않았습니다(삼상 17:28). 반면에 다른 자녀들은 그렇게 좋은 품성을 지니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부모는 자녀의 타고난 재능이나 자기를 닮은 외모 때문에 한 자녀를 다른 자녀들보다 더 편애할 수 있습니다. 각기 편애하는 자식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쪼개져 있던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편애와 편벽은 분노와 좌절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재능이나 지적인 재능이 결여되어 있다고 해서 간과되거나 냉대받거나 부인 당하거나 강등 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잠시만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그러기가 매우 쉽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아빠의 건장한 신체를 갖지 못한 소년이나 자기 엄마의 재능을 소유하지 못한 소녀, 또는 자기부모의 지적인 학습경로를 밟지 못하는 자녀는 자신이 자기 부모를 실망시켜 드리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모된 우리는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무조건적인 사랑의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 사랑은 성취 정도에 근거한 사랑이 아니라 혈연관계에 의거한 사랑입니다.

 

사울 -완고(頑圖)의 책임

자녀 양육에서 볼 수 있는 이 모든 불완전성들은 단지 우리 자신의 타락된 본성의 열매들이요 표현일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잠재적인 모든 죄악성을 지닌 육적(肉的)인 사람이 부모로서도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들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울은 재난을 초래한 아버지의 완전한 표본이었습니다. 그의 실책들은 몇 가지 중대한 영역에서 저질러졌는데 결국 그 결과는, 다윗이 사울의 집에 남은 자가 있느냐고 물어보아야만 할 정도로 사울은 자기 가족을 멸절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13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처럼 경솔히 취급했던 사람이 바로 한 장() 뒤인 14장에서는, 부지중에 자기 명령을 순종치 못한 자기 친아들조차 죽이려고 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데 이것은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할 일입니다. 사울은 누구에게나 공정한 징계를 가차없이 시행하려 했다기보다 자신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기 가족까지도 악용하려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또 그가 자신의 이 기 적인 목적을 위해 자기 자녀들을 이용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다윗을 옭아 묶기 위해 자기 딸들을 이용했으며(삼상 18), 요나단더러 다윗을 밀고하라고 요구했고(삼상 19), 자기 자식들이 자기와 함께 음모를 꾸미지 않는 것에 대하여 욕하고 부끄러움을 주었습니다(삼상 20:30~34). 그는 다윗을 유혹하여 벌을 주려고 자기 딸 미갈을 값싼 장신구처럼 활용했습니다(삼상 25:44). 그에게서는 자녀의 행복을 고려한다거나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는 태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생각은 오직 자기 뜻과 목적을 달성시키는데 있어서 자녀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여러분에게 몹시 강하게 들릴 것이며, 사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어떤 원칙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입각하기보다 자기 뜻에 입각하여 자녀를 인정하거나 불인정하는 경향이 없습니까? 어떤 부모들은 자신의 환상이나 욕심을 드러내기 위해 자녀를 이용하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이것은 너무 지나친 상상입니까? 우리 중에 어느 누가 자기 자신을 점검한 후에 자녀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강요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자기 자녀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인 욕심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녀가 이 세상의 지위나 물질 따위로 아무리 성공을 거두었든지 간에, 혹은 자녀가 선교사나 복음전도자가 되고 싶어 하는 등 아무리 영적으로 보이든지 간에,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릇된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좋지 않은 것은, 자녀가 아버지의 욕심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아버지가 그 자녀를 인정하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울은 가족과 친지들 및 심지어 십과 같은 모든 성읍들을 다룸에 있어서도 교묘한 농간과 사람의 동정을 이용하는 두 가지 술책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행과 곤경을 호소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동정을 사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는데 이런 수단들은 참으로 비열하기 그지 없습니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첫번째 목표가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교묘한 술책과 통제 방법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합니다. 이것이 어떤 종류의 순종을 유발할는지는 모르지만 실상은 순종이 아니라 굴종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사실, 부모의 진정한 목표와는 훨씬 거리가 먼 것입니다. 독재적으로 다스리고 굴종케 하는 것은 결코 이상(理想)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나의 첫번째 책임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족에게 드러낼 수 있도록 아버지로서의 진정한 모습을 지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중대한 목표는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의지에 입각한 사랑과 충성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죄의식을 이용하여 자녀를 억제한다면 혹시 순종을 유발해낼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양육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은 자녀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짧을 살려고 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자녀들의 삶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형벌을 가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자기 딸 하나로 하여금 수태치 못하게 하는 일에 기여하게 되었으며(삼하 6:23), 세 아들을 길보아 산에서 죽게 만들었고(삼상 31), 일곱 손자들을 기브온 사람들 손에 죽게 만들었습니다(삼하 21). 그리고 그 자신의 생애도 수치와 오욕 가운데서 자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상과 같은 생애로부터 우리는 각성과 경계를 받습니다. 우리 중에는 사울과 같은 사람들이 없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우리 각 사람의 마음 속에는 다소나마 사울의 특성들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를 통해 우리 자신의 욕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에 대한하나님의 뜻과 자녀의 행복과 자녀의 쓰임과 자녀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저 어떤 일정한 틀 속에 집어넣으려고만 하지 말고 시간을 내어 자녀를 연구함으로써 그들의 감정적, 영적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모든 자녀는 고유의 잠재력과 달란트를 소유한, 개별적이고 독자적 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알아내어 양육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이자 특권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고 결국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미갈의 아버지 사울보다는 사무엘을 하나님의 뜻에 의탁한 엘가나와 한나가 훨씬 더 나은 것입니다.

 

다윗 -겸손의 실물교수

다윗은 네 아들을 장사 지내는 슬픈 경험을 가졌는데 이 네 장례 행렬의 출발점은 바로 밧세바와 저지른 그 심각한 죄였습니다 이 죄를 짓기 전에는 다윗이 흘린 많은 눈물을 하나님이 자기 병()에 담으셨지만( 56:8) 그의 범죄 이후부터는 하나님이 다윗의 눈물을 계수(計數)하신 것이 아니라 다윗이 했습니다. 눈물은 다시 하염없이 흘러 내렸지만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강퍅함과 죄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네 아들이 죽는 것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가 자녀들에게서 반복되는 것을 보는 쓴 경험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어떤 이들은 이 문제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부모 노릇을 함에 있어서 가장 심하게 우리의 콧대를 꺾는 것은 자신의 약점에 대한 의식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패가 자녀들에게서 반복되는 것을 보는 경험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사용하셔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시고 가르치시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만 여하간 그 교훈자체는 우리의 콧대를 겪습니다. 우리의 약점과 모순이 그처럼 반복되는 것은 우리의 결점들을 보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아버지를 더욱 의지하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욕정과 부도덕이 자기아들 암논한테서 더욱 큰 규모로 반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오만함과 우리야를 살해한 것은 압살롬의 치욕적인 이력 가운데에서 전부 재생되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에 대하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이고 탄식하였는데 이것은 단지 자기가 압살롬 대신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말만은 아니었습니다. 뒤늦게서야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살려두기보다 차라리 징계하셔서 데려가 버렸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탄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죄는 그의 임종(臨終) 자리까지 따라갔습니다. 그 연로한 왕이 마지막 숨을 내몰아 쉬고 있을 때 아도니야가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우리는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는 말씀을 볼 수 있으며, 그의 모친은 압살롬 다음에 그를 남았습니다. 왜 다윗은 왕위 계승 문제에 있어서 그처럼 연약성을 보였을까요? 단지 나이 때문이었을까요? 아도니야가 압살롬의 형제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사실이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그의 양심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던 까닭에 압살롬의 비극적인 종말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고 있던 그는 압살롬의 형제가 보상을 받도록 너그러운 아량을 베풀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 집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 중 몇 사람의 실책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위험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여 보았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로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6:4). 바울의 필()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령께서 명하신 이 간단명료한 명령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실패들의 긍정적인 면을 요약해줍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것에는 가르침과 훈육뿐만 아니라 모범까지도 포함됩니다. 자녀들의 낙심은 매우 실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녀들을 격노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3:21). 이것은 곧, 우리가 자녀들을 즐겁게만 해주라는 뜻이 아니라 계속 호되게, 부정적으로, 품격을 떨어트리는 비판만 일삼지 말라는 뜻입니다. 칭찬과 인정(認定)은 변화를 향상시키고 긍정적인 성격을 강화시키는 일에 훌륭한 매개체로 작용합니다. 그리 고 이 것은 다원을 간과한 이새나 자기 자녀들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농간한 사울처럼 되지 않도록 우리를 예방해 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부모 노릇을 함에 있어서도 역시 극단과 치우침 또는 결점과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의탁하고, 마노아가 드렸던 다음의 기도를 우리 입술로도 자주 새어 나오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 13:12).

 

(1995 12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