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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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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8. 15:06 횃불/1996년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46:4).

 

이것이 바벨론의 멸망 중에 일어난 한 사건이다. 고레스가 침략하였고, 이에 그 강한 성은 그 문에서 오래 기다림으로 노기충천한 바사군의 밥이 되고 말았다. 방백들의 피가 그 궁궐의 대리석 바닥에 어지러이 흘렀고 병사들은 거의 죽임을 당했다. 여자와 아이들이 어두운 집 구석에 웅크리고 있거나 잔인한 군사들의 칼날을 피해 공포의 절규와 도움을 부르짖는 호소로 거리를 가득메웠다. 최후의, 그리고 가장 처절한 싸움은 우상을 모신 신전 경내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고요하다. 제사장들은 그들이 섬기는 제단 주위에서 엎드러졌으며, 그들의 피는 그들이 드린 희생제물의 피와 섞였고 그들의 빛나는 제의(祭衣)는 그들의 수의(壽衣)가 돼버렸다. 그리고 평안하던 날에 무수한 숭배자들의 발길로 붐비던 대리석 계단으로 군사들이 무력한 우상들을 옮겨갔다. 바사의 엄격한 일신교는 바벨론의 많은 신들을 전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태양 숭배자들의 땅에는 우상을 모셔놓는 신전이 일절 없다. 그 대신 승리의 완전함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전시되었다.

제국의 수도의 이름을 암시하는 벨이 있다! 그것이 얼마나 수치스럽게 그 주춧대에서 내려졌는지! 그리고 느보가 그 뒤를 따른다.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섬뜩한 신상들이 자리에서 내려졌고 그것을 나르는 자들의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신상들은 거기에 박힌 보석들을 빼가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들의 거친 손으로부터 조금도 보호받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계단 아래로 내려와 코끼리의 등에 실리거나 마차에 실렸다. 그 신상들은 번성하던 시대에는 화려한 외양을 갖추고 바벨론 거리를 지나 질병이 있는 곳마다 실려갔었다. 그 때는 징과 나팔소리가 진동했고 거리는 숭배하는 무리로 가득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했다.”…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은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그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도 잡혀 갔느니라”(46:1,2). 이로써 바벨론의 신상들은 대적에게 사로잡혀 갔다.

바벨론 신들이 패배한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이러한 모사에 이어 우리는 각각의 항목에 대한 대조점이 뚜렷이 두드러지는 여호와에 대한 묘사를 생각해 보도록 요청을 받는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 집의 모든 잔존자에게 말씀하시되 나면서부터 품에 품고 어릴적부터 가슴에 안은 자녀를 대하듯 말씀하신다. 그들의 하나님은 요람이나 유모차가 필요없었다. 그분의 영원한 팔이 요람이자 유모차가 되기 때문이다. 그분은 예나 지금이나 그러하시다. 그분은 변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들을 백발이 되기까지 품으실 것이다. 그분이 지었고 그분이 품으실 것이다. 그렇다. 그분이 품고 건지실 것이다.

이러한 대조는 영원한 대조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를 품에 품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 종교에 의해 품기운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을 맡겼다고 스스로 믿는, 정해진 신조와 의식과 규례와 헌금의 짐을 진다. 또 어떤 이들은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도 관심도 없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렸으며, 그분께서, 친히 그들에게 말씀하신 곳에 그들이 이를 때까지 그들이 가는 모든 길에서, 사람이 그 자식을 안듯이 그들을 품고 안으실 것을 확신한다( 1:31, 63:9).

 

1. 하나님이 자신을 책임있게 만드는 짐들

우리들 대부분의 삶은 짐으로 무겁게 눌려있다. 우리는 방해받지 않고 경주를 시작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짐과 책임이 늘어간다. 우리의 발걸음은 죄와 고난으로 무겁기만 하다. 무엇보다도 존재의 짐이 있다. 우리는 살아야 한다. 우리는 살 것인지를 묻는 질문을 받지 않았는데 이는 우리가 그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이 없었으며, 오늘날 다른 아무 선택도 없다. 사람들이 죽음이라고 부르는 육체적인 현상이 쉼표를 삽입하거나 선을 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은 이곳을 뛰어넘어 저편에서, 영원히 계속된다. 우리의 마음의 제단의 불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속성의 영원한 불에서 점화된 까닭에 달이 쇠하고 별들이 타버린 후에도 존재할 것이다.

죄의 짐이 있다. 짐을 진다(bearing)고 할 때 사용되는 단어는 이사야가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53:4) 그 죄 -담당자를 가리킬 때 사용한 단어와 같다. 대기가 우리 몸을 1입방 인치당 수 파운드의 비율로 압박을 가하지만 우리는 그 무게를 의식하지 못한다. 그와같이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인간은 죄의 짐을 거의 감지하지 못했으며 그 견딜 수 없는 무게 아래 신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분의 순결한 형상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전해지면서 사람들에게 죄의 무서운 짐을 일깨워 주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그 심령에 기쁨과 활력이 없고 그 발걸음이 쉬 지치고, 그리고 그 생명의 날이 무력하게 끝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한 베드로의 외침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이들에 대한 책임의 짐이 있다. 우리의 삶은 다른 이들의 삶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들에 대한 관심의 짐을 지지 않고서는 삶을 유지할 수가 없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고용주와 고용인, 교사와 학생 등 모든 인간관계가 서로에 대한 관심을 요구한다. 게다가 우리 주변에는 외롭고 시련과 핍박을 당하는 자들이 우리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여러분과 제가 철부지 아이 때처럼 자기 혼자만 생각하고 쏜살같이 인생 길을 달려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인생과제의 짐이 있다. 우리는 다른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보냄 받았다는 것, 우리는 우리 자신이 회계해야 할 달란트를 받았다는 것, 우리는 포도원의 한 구역을 경작하고, 주인의 자본 중 한 달란트를 이용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 -이것이 우리로 삶의 중요성과 긴박성을 느끼게 해 준다. 우리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축복이 아니면 슬픔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서도 우리에게 부과된 책임의 엄중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숙명적으로 고독하다.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 사람마다 각기 짐을 지고 있다. 모두가 상상할 수 있는 만큼의 짐과 수고와 싸움을 지니고 있다. 아무도 자신의 기쁨과 힘과 용기를 다른 사람과 나눠가질 수 없다. 우리는 동정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이다. 각인의 영혼은 자신의 존재와 죄와 책임 및 일의 짐을 져야 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여호와께서 개입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짐과 우리 자신을 구분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 능하신 팔로 우리와 우리의 짐을 붙드시고 아무 피곤한 느낌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우리를 안으신다. 우리는 짐으로 몹시 무겁지만 그것은 그분에게 아무 문제 되지 않는다. 그분은 어릴적부터 우리를 안으셨으며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신다. 그분은 아무 짐도 들어갈 수 없는 땅과, 아무 짐도 통과할 수 없는 문이 있는 도성과, 그리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사슴처럼 뛰고 지친 자들이 안식하는 세상으로 인도하실 때까지 우리를 품고 안으실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러한 책임을 맡으시는 이유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서 자신의 악한본성-같은 기질과 같은 욕심과 같은 성향-이 재현되는 것을 볼 경우, 그는 그 잘못을 들어 그 아이를 내쫒는 대신 오히려 연민의 마음으로 넘쳐 더 가까이 다가가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라고 소곤거린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그 마음에서 그것이 자리잡을 때까지 결코 쉼이 없을 사랑을 끌어냈을 경우, 비록 그가 지혜로웠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드는 문제들이 제기되더라도 그는 자신이 자아낸 그 사랑의 위대함을 생각하면서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라고 자신에게 속삭인다.

어떤 그리스도인 사역자가 그 주변에 많은 회중을 모으고 또 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을 경우, 그는 더 중요한 문제가 그 마음을 누르지 않는 한, 그를 지도자나 아비로 여기는 자들을 둘러보며,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라고 자신에게 속삭인다.

이제 이러한 묵상의 도움을 받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올라가 보자. 그분은 우리를 지으시고 빚으셨다. 그분은 그분만이 만족하실 수 있는 소원을 우리 안에 심어 놓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극심한 곤경 가운데 두시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을 맡기셨다. 그분은 우리를 최대의 희생을 요하는 자리에 두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행하신 까닭에 그분은 그분의 목적들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이신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 속해 있으므로 우리는 그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고 또 영원히 그분을 위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분이 지으셨은즉 안으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현재 모습으로 만들고, 현재 위치에 두실 책임에 직면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가 영원함으로 그분은 우리와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셔야 한다. 그분은 그 손으로 지은 작품을 버릴 수 없으시다.

성경에는 이러한 사실을 확증해 주는 여러 말씀들이 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주린 자를 위해 먹을 것을, 그분이 주신 몸을 위해 입을 것을 주셔야 한다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행하고 그 보증을 주신 것을 이루셔야 한다는 말씀이 있다. 또 로마서 8장에는 각각 그 다음 항목을 요구하는 훌륭한 사슬이 나오는데, 즉 미리 정하심은 부르심을, 부르심은 의롭다 하심을, 그리고 의롭다 하심은 영화롭게 하심을 각각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인물을 세우실 경우 먼저 그것을 이를 수 있을지를 생각하신다. 그리고 그분이 그 일을 시작하신다면 그것은 곧 그분이 그 계획을 실행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을 의미한다. 그분이 지으셨은즉 안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경우에 그러했다.”  그분은 그분의 택하심과 은혜로 그 택한 백성을 지으셨다. 그분은 그들을 베드윈의 이름 모를 부족으로부터 그분의 독특한 백성이자 그분의 기업이자 세상에 대한 그분의 사자들로 삼으셨다. 그들의 거듭된 방황과 격동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결코 미리 아신 그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 모든 기나긴 세월 동안 그분은 그들을 깊이 염려하셨으며, 장차 그들을 독수리의 날개에 태워 그들의 성읍과 땅에 인도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그분이 세상을 지으셨다. 세상은 그분의 사랑과 능력으로 보호를 받는 대상으로서 그분의 축복의 초기 흔적을 지니었다. 비록 죄로 어둡고 붉었지만 그분은 우주의 심연을 통해서 세상을 품에 안기를 결코 중단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람들이 그분을 멸시하여 십자가에 내주었을 때 세상의 오만불손과 수치를 품에 안으셨다. 그분은 갈보리의 번민 가운데서 세상의 죄를 품에 안으셨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확실하다. 그분은 세상을 그 가슴에 안으시고, 그 악()이 그분의 선에 의해 극복될 때까지 결코 세상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세상은 그 본래의 아름다움 가운데 다시금 빛을 발할 것이며, 그 자매된 영역들과 한 소리로 노래 부를 것이다.

 

3. 이러한 묵상이 가져다 주는 위로

최근에 범한 죄로 인해 괴로워할 때.”  죄는 우리 자신의 것이다. 어떤 의미로든 죄인이 하나님께 죄를 전가할 수 없다. 그는 내가 전에 범죄하여 시비를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었구나라고 부르짖는다. 그리고 여전히 죄의식의 심연으로부터 하나님께 대한 호소가 흘러나온다. 그분이 창조하셨고 우리로 범죄한 인류의 일원으로 태어나게 허락하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마음을 두고 우리를 그분의 소유로 만드시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을 모두 아셨다. 그분이 친히 짓고 구속하고 양자와 은혜로 그분의 자녀 삼으신 우리를 참아달라고 그분께 우리가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그분께서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라고 대답하시지 않겠는가?

근심에 잠겨 있을 때.”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염려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어둠을 지나 하나님께로 나있는 제단 층계 아래 엎드린다. 상황은 극도로 혼란스럽고 매듭은 풀리기를 거절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최선인지 알 수 없을 때, 하나님의 낮을 바라보고 이렇게 아뢰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주께서 나를 이곳에 오도록 허락하셨고, 주만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시고, 주께서 나를 지으셨나이다. 그러할진대 주께서 나를 안아 이 넘치는 파도를 헤치고 견고한 땅에 이르게 하시지 않겠나이까?” 그러면 그분께서 다시 이렇게 답하지 않으시겠는가?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라.”

불길한 조짐이 보이는 날에.”  때때로, 높은 산 위에 오르면, 계곡을 가득메운 샛털 구름 바다 위로 시커먼 바위들이 섬뜩하게 솟아오른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밤을 새워야 할 산장도, 그리로 가는 길도 모두 보이지 않는다. 앞날이 우리 눈에 가리웠고, 무지로 인한 두려움으로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을 염려한다. 안개는 엷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금 우리는 엄위하신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분은 우리를 지으셨기에 우리의 인내의 한계를 알고 계신다. 그분께서 친히 시간과 생각을 투자하신 대상을 위태롭게 하실리 없다. 그분은 실패하거나 포기하실 수 없으시다. 우리는 마음껏 그분께 책임을 맡길 수 있다.

, 우리의 창조주여! 어미가 젖먹이를 품에 안듯이, 아비가 기진한 자식을 품에 안듯이, 유능한 등산 안내원이 가파른 벼랑아래를 보고 아연실색한 어린 소녀를 품에 안듯이 우리를 안으소서. 주께서 우리를 지으셨은즉 우리를 품에 안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시 대답이 들려온다.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1996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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