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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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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11. 08:56 횃불/1996년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14장 우리를 버리지 않을 사랑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49:16).

이장은 바벨론으로부터 귀환 직전에 즈음한 선택된 백성들의 확신으로 가득차 있다. 그들은 소심했고 그들의 포로된 익숙한 환경에서 떠나기를 주저했다. 그들은 되돌아가는 여행의 위험들과 궁핍을 두려워했으며, 그들을 사로 잡은 거대한 제국이 그들로 가도록 허락해 줄 것이며, 그 황폐한 성읍을 재건토록 허용해 줄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목소리는 이례적으로 부드러운 어조를 띄었으며,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을 하셨다. 위로와 동정을 하시는 그분의 연속적인 확신에 유의해 보자.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 49:13).

 

1. 그분은 목자의 관심으로 인도하신다.

초기 히브리인들의 유력한 특징은 목자적이었다. “야곱은 양을 지켰다.”  그 민족의 족장들은 모든 시대의 가장 위엄있는 목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과 가장 초기의 선지자들은 양들을 치던 중에 취함을 입었다. 그러므로 양떼의 이미지는 국가적인 연설에 깊이 스며 있었고 놀라운 유추를 풍성케 했다. , 모든 인도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여호와 자신이 그분의 백성의 목자로 불리워졌다.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 이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확신들 밑에 내재되어 있는 개념이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49:10).

동방 목자들의 삶은 이곳 북부 기후에 익숙한 우리들과는 매우 다르다. 그는 어떤 바위의 아늑하고 유리한 곳에 앉아서 황무지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양떼를 지킨다. 때로는 그들을 푸른 초장이나 물가의 휴식을 취하도록 계곡 아래로 인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야수들이 그 굴에서 튀어나올 수 있는 어둑한 골짜기를 지나게 할 때, 목자들은 주의깊게 주위와 먼 곳을 살피며 지팡이와 막대기를 움켜 잡고 그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방어력이 없는 연약한 양떼들을 지킨다.  여러분은 에서와 그의 군사들의 급한 행보를 따를 수 없다고 한 야곱의 변명에서 참 목자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 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33:13,14).

이보다 한층 더 놀랍도록 아름다운 말씀이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49:10). 이 얼마나 놀라운 위로의 말씀인가! 그분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과도히 몰아 부치지 않으신다. 그분이 우리 앞서 가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행보에 그 행보를 맞추신다. 가장 긴 날의 행진도 우리 자신의 용량에 맞추어 조정될 것이다. 가장 심한 어려움도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초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 길이 아무리 거칠고 어렵다 해도 그분께서 그대를 이끄시는 과정이 항상 그분의 자비하심임을 기억하라. 그분의 돌보심과 교제 안에 거하는 자는 결코 굶주리거나 목마를 수 없다. 지금 그대는 그늘진 곳에 휩싸여 있는가? 그것은 단지 낮의 햇볕과 열기가 그대를 상치 못하게 하시려는 그분의 숨은 배려이다. 어떤 급경사나 낭떠러지가 있는가? 그것은 단지 그분이 그대를 생명의 샘물로 인도 하시려는 것이다( 7:17).

그리스도인이여, 불평하지 말라. 다만 그대 영혼에 다음과 같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후렴구를 항상 되새기라.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분이 나를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2. 그분은 장애물도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는 수단이 되게 하신다.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49:11). 산들은 장애물이다. 팔레스틴의 거리를 연구하는 학생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남쪽 국경을 산들로 강한 장벽을 쳐 놓은 사실에 감명하지 않을 수 없다. “브엘세바의 남쪽에 평평한 사막 지대가 펼쳐져 있고, 아라비아서부터 애굽과 팔레스티나에 이르는 도로 지역은 60마일 가량 산지 마을이 전개되는데, 대개 동서로 뻗어 있는 가파른 능선에 위치해 있다. 비온 뒤라 할지라도 채소가 자라기 어렵고 그나마도 여름에는 전멸이다. 이 지역을 통과하는 다른 길은 없다. 그러므로 그 가파르고 험난한 능선은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와 유사하게, 스위스의 산들은 자유의 피난처 역할을 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산들도 거의 정복하기 어려웠다. 이스라엘 앞에는 큰 산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산들을 제거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들은 빠르고 쉬운 귀환에 기여되도록 한 길을 내어야 한다.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우리 모두는 인생 여정에서 산들을 만난다. 우리의 거룩한 삶의 전진을 가로막고 위협하는 사람이나 일들이 있다.  변덕스러운 날씨, 대가족, 무거운 요구들, 마음에 들지 않는 직업, 그밖에 육신 안에 있는 가시 등이 매일의 십자가이다. 우리는 만일 이러한 것들이 제거되기만 하면, 우리가 보다 순결하고 온유하며 거룩한 삶을 살게 되리라 생각하며 그것들이 없어지기 위해 기도하곤 한다.  , 어리석고 마음에 더디 믿는 이들이여! 그것들이 바로 성취하기 위한 조건들이다. 그것들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오래 기도해 왔던 그 은혜와 미덕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 생애에 놓여진 것이다.

그대는 인내를 위해 오랜 세월동안 기도해 왔지만 참기 어려운 일들이 그대 앞에 놓여있다. 그대는 그 일로부터 달아나고 회피하며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소연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결코 한순간 제거되거나 극복되거나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대는 단지 조급하게 유혹이 멈추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내가 아닐 것이다. 인내는 오직 지금 견딜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시련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되돌아가 그대 자신을 굴복시켜라! 예수님의 인내의 동참자가 되리라고 주장하라. 그분 안에서 그대의 시련을 직면하라. 그리함으로 그대와 그대의 약속의 땅 사이에서 있는 산들이 그대의 길을 만드는 것이 되리라.

이 약속의 의미를 주목하라.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인생에서 겪는 괴롭고 곤란한 일 중에는 가장 최고한 목적의 성취에 수반되지 않는 것이 없다. 작은 단어이지만 큰 의미를 나타내는 모든 산이라고 한 말에서도 예외를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소유대명사를 생각해 보자. 그것들은 그분의 산들 이다. 그분은 거기에 그것들을 두셨다.  그러나 그 약속이 미래 시제로 된 것을 잊지 말자.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멀리서는 그 길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바 위들이 엉클어져 있는 것을 볼 뿐이다.  가장 예리한 안목으로도 그 산들 사이를 가로지른 실낱 같은 길이 나 있는 지점을 분별할 수 없다. 그렇지만 왜 기대감을 갖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결코 그분의 약속하신 일에 실패하지 않으심을 알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 길을 이해하시며 그 장소를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땅 끝까지 보시며 하늘 아래를 굽어 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산 밑에 이르게 되면 그 길을 발견케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사랑은 모성애보다 뛰어나다.

많은 경건했지만 잘못 인도된 영혼들이 처녀 어머니를 하나님과 같은 수준에 두었고 그녀를 숭배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자를 남자보다 더 부드럽고 더 참을성 있고 더 용서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여인의 사랑을 사랑의 최고 표시로 삼았던 것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처럼 여인의 사랑보다 더 순결하고 더 비이기적이며 동정심을 깊이 품은 것은 없다. , 여인의 가슴은 그대가 배신한 모성애의 최고도를 나타낸다.  웃는 애기 위에 구푸려 그 아기에게 키스를 할 때 기쁨의 절정이 있다. 괴로움을 달래며 자장가를 부르며 곧 꺼져버릴 가느다란 촛불 곁에선 그대는 차갑고 어두운 곳에 남겨지지만 아무런 불평이나 후회가 없다. 애기가 다만 잠자고 먹고 살게 하기 위한 보살핌을 아끼지 않는데, 그것이 바로 모성애가 의미하는 바이다. 바로 그같은 사랑이 일생동안 내내 우리를 따른다. 종종 거절당하고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하지만 그 사랑은 우리 곁에 머무르며 기도와 눈물과 거룩한 갈망을 불러 일으킨다. 조그만 병색이라도 보여지거나 곤경에 처한 기척이라도 보이면 곧바로 우리 곁에 다가온다. 모성애는 계획과 설계를 가진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러하다. 실로 그것은 그분의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한 줄기 빛이다. 만일 어머니의 사랑이 한 줄기 빛이라면, 그분의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어떠할 것인가! 그러나 모성애도 때로 실패할 때가 가끔 있다. “그들은 잊을 수 있다.” 광란에 미쳐있거나 술에 흠뻑 젖어있을 때 또는 부정한 정열로 상기되어 있거나 어지러울 정도의 유쾌한 분위기에 빠져 있을 때, 여인은 그녀의 젖먹는 아이를 잊을 수 있다. 사마리아 성이 포위되었을 당시의 기록처럼 실로 배고플 때 여인들이 자기 아이들을 먹음으로 그 굶주림을 채우려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 자녀된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

우리는 진흙 투성이 속에 빠질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를 가장 아껴주던 이들도 우리를 떠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로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 우리는 죄에 찌들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잊지 않으신다. 우리가 먼 나라에 가버렸기에 가장 신실한 친구의 창문에도 밤에 불을 밝힐 촛불이 꺼져 있을지라도 그분은 우릴 잊지 않으신다. 모든 인간 제단의 불꽃들이 다 타버려서 하얀 재만 남게 된다 할지라도 그 분의 사랑은 우리가 처음 그분을 알았을 때처럼 여전할 것이다.

 

4.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생각을 보배처럼 간직하신다.

동양에는 친한 친구들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는 관습이 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데 얼마나 강조되어 있는지 주목해 보자. 단지 시온의 이름만이 아닌, 다윗이 거했던 성 시온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던 곳이다. 그곳은 하나님의 손바닥에 그 이름이 새겨진 곳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인 그대는 하나님이 그분의 손바닥과 가슴에 새겨서 항상 지켜보시는 자이다. 그대는 그 분의 눈에 가리워져 있지 않고, 그분의 생각에서 한 순간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 손바닥뿐 아니라 양 손에 새겨져 있다. 그것은 각각 복수로 되어 있다.  내 손들의 (hands) 손바닥들(palms) 위에.”

그저 문신 정도나, 사진이 찍힌 정도로 지워지거나 흐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새겨져 지울 수 없는, 그 새기는 도구는 창과 못과 그 십자가였다. “거기에 쓰지 마시오라고 한 개구장이가 대기실 창문에서 정교하게 다이아몬드에 무언가 새기고자 하는 청년에게 말 했다. “?”라고 깜짝 놀란 그가 물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거기에 쓸 수 없기 때문이예요라고 그가 말했다. 유리나 호마노나 마노 같은 것으로는 새길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곧바로 그리스도의 손에 그들의 의뢰를 두어야 할 것이다. “한때 죽임을 당하셨던 어린양이 보좌 가운데 거하시며 그분이 그들에게 그 두손과 옆구리를 보이셨다.”

시온은 몰락되지 않고 다만 예전에 느브갓네살이 무너뜨렸던 것처럼 그 성벽이 무너질 뿐이다. 5,60년 만에 그 성벽들이 파괴되었다. 느헤미야는 달밤에 행했던 그의 첫 슬픈 정탐에서 짐승의 접근을 막았던 그 폐허더미를 지났던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산발랏은 그 부스러기 더미에 대해 조롱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과 죄를 연상시키는 그 파멸을 계속 마음에 두시지 않았다. 시온의 성벽은 항상 그 분 앞에 서 있었다. 우리의 참 자아는 바로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이다. 우리가 갈망했던 우리의 최상의 순간들, 은혜가 온전히 역사되었을 때,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 대해 지울 수 없는 개념이며, 이러한 모습으로 항상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다.

버림받고 잊혀진 것에 대해 시온이 울부짖는 것과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 사이에는 얼마나 놀라운 대조가 되는가! 이처럼 과거의 즐거움이 사라져 버렸고 그의 영혼의 황폐함을 생각하는 신자는 자신을 버림받은 자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신자가 가장 깊은 절망에 처했을 때, 하나님은 마치 첫 아이의 어머니처럼 그를 생각하신다. 그의 필요는 하나님 앞에 항상 있다.

 

5. 하나님의 사랑은 그 목적을 실행하기에 충분히 강하다.

용사의 빼앗은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24) 이것은 낙담에 처한 이스라엘의 반문이었다. 강한 제국의 심장부에 처했던 이스라엘은 무력한 포로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호와는 자신의 자원을 잘 계산하셨다. 그분의 손이 높이 들려지고 그분의 백성들이 회복되며 왕들과 왕비들의 염려로 고토로 되돌려질 것이다. 그러니 그대의 구원의 어려움들을 생각지 말고 과거의 실패와 대적의 강함을 너무 깊이 생각지 말라. 이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그분을 바라보라. 그분은 당신의 용장이요 승리자가 되실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신원을 받아 주시고 해결해 주실 것이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 강하게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 앗을 것이요 강포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 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25).

 

6. 하나님의 사랑은 버리지 않는 것이다.

유대인은 자기 아내를 버릴 때, 그녀에게 이혼증서를 주었다( 10:4). 이 이혼 증서 없이는 이혼이 완전히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 남편은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고 자신의 아내를 다시 데려올 수 있었다. 먼 포로의 땅에서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이혼 당한 아내로 생각한다.

그녀는 그러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같이 생각하며 그것을 두려워한다. 여호와는 그러한 말 없는 의문을 답변하신다. 이스라엘에게 그 스스로는 이혼 증서를 만들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 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그분은 그것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보신다. 그분은 결코 이혼 증서를 주신 적이 없기에 그것을 찾을 수 없음을 아신다.

하나님은 일단 그분의 언약으로 취하신 그들과 이혼할 수 없다. 그들이 비록 타락하고 반역하고 믿음없이 행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은 그분의 것이다.  비록 온 우주를 샅샅이 뒤진다 해도 그 이혼증서는 발견될 수 없다. 마귀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우리를 위협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그분께 속한 영혼들을 붙드신다. 물론 잠간의 분노로 그분이 잠시 그 얼굴을 가리기도 하시지만 영원한 인자하심으로 그분은 자신의 백성들을 용서하시며 자비로 모으신다.

 

(1996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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