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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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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11. 09:00 횃불/1996년

바리새인과 거룩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기도원에 가셔서 100일 기도를 하셨는데 100일이 다 되어서 부인과 아이들이 아버지를 만나러 기도원에 갔다고 합니다. 그들이 기도원에 도착했을 때 마침 목사님은 백일기도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한 딸이 아버지를 보자 반가워서 아버지!” 하면서 아버지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자기 딸에게 여자여 물러 갈지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웃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거룩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거룩에 대한 오해는 특별히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심했는데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거룩이나 신령함에 대해 잘못된 개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에 대한 아주 좋은 예가 누가 복음 18 914절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한 바리새인에 대한 이야기 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바리새인과 세리를 예로 들어 오늘날 우리가 피해야 할 외형적인 거룩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둘 다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데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과, 하나님께 십일조도 하고 금식하는 것에 대해 감사했고 세리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인하여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세상에는 토색하는 자들, 불의를 행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 그리고 세리처럼 남의 돈을 갈취하는 자들이 많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첫째, 그는 그 스스로에게 속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정말 온갖 불의나 토색이나 간음으로부터 멀리하고 또 그러한 자가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요 칭찬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토색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성경에 있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과부의 돈을 삼키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을 온갖 장사의 소굴로 만들어 돈벌기에 급급한 자들이었으며 마음은 온통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음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세리와는 다른 자로 보았습니다. 즉 자신을 거룩한 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거룩은 외형적인 것이었고 내적인 것, 즉 속에서부터 나오는 거룩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세상 사람들처럼 속이고 훔치고 간음하면서도 자신은 이런 류의 사람들보다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거룩하다고 보는 자들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외식적인 삶을 살면서도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이 바리새인이 범한 실수였습니다. 

두번째로 그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거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가 비교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과 비교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세리처럼 자신이 거룩하지 못한 죄인인 것을 알았을텐데 사람들과 비교했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보다 못한 바람들과 비교해 위로 받기를 원하지만 거룩은 자신보다 못한 간음자들, 토색하는 자들과 비교할 일이 아닙니다.

세번째로 그는 자신의 거룩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거룩을 죄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가까이하며 그들을 변화시키는데 사용하셨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한다고 했고 그로 인해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신실한 삶을 사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 금식은 무엇이 문제일까요? 주님은 마태복음 6 1618절에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금식에 대해 말씀하시고 어느 것이 진정한 금식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금식할 때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얼굴을 흉하게 하고 슬픈 기색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그들의 금식은 오직 은밀 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보이려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금식하는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고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금식을 드러내려고 일부러 사람들 앞에 얼굴을 흉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들의 금식의 주요 이유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여 자신의 금식을 드러내므로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하다는 것을 나타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금식은 사실 사람들과 자기를 구분하기 위한 금식이었던 것이며 사람들 앞에 신령한 자로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새벽기도, 철야기도, 100일 기도, 40일 금식기도등 수많은 금식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일을 위하여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주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이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그 경건은 헛것이요 무가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가 어떤 인위적인 경건을 세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평가하신 것처럼 그것은 무익한 것이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십일조를 드리기 때문에 자신은 세리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그보다 더 많이 드리는 것은 마땅한 것이고 사실 그리스도인이 소유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의 십일조 생활을 보면 많이 타락되어 있었습니다.  말라기에서 주님은 유대인들의 십일조 생활에 대해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병들고 천한 것, 재산 가치나 이용가치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좋은 것은 자신들이 소유했습니다. 그들의 십일조 삶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상실되고 오직 의무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힘겨워 했고 형식적이었습니다.

하나님만 알고 사람들은 모르게 어떤 일을 하는데에는 어려움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자라면 꼭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므로 자신들의 거룩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 대하여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인과 신은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주님의 말씀처럼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거룩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무리 중에는 에세네파가 있었습니다. 에세네파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에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리새파 그리고 사두개파에 이어 유대의 3대 종파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거룩을 지키기 위해 엄한 규칙과 모든 것을 공유하는 생활을 했고 또 대부분이 타락된 세상을 떠나 광야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부도덕한 세상에서 거룩을 지키는 길은 따로 사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거룩을 지키기 위해 그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하지 않고 무리 가운데 계시면서 거룩을 지키셨으며 자기와 접촉하는 자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리새인이나 에세네파들의 거룩에 대한 자세를 보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아니 성도들이나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정말로 거룩하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의로운 자들이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바리새인들처럼 우리도 또한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 대해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두번째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함으로 어떤 자만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주 폐쇄적인 교회들에 있어 그들을 유지하게 해주는 원동력은 하나의 자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변질되어가고 타락되어 가는데 나만 진리를 지키고 있다는 자만은 때로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 소경이 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거룩이나 신령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의 거룩을 진정으로 비교해 보기를 원한다면 주님 앞에 자신을 드러내 놓고 평가해 봐야 할 것입니다. 나는 누구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하고, 금식도 더 많이 하며, 헌금도 더 많이 하고, 주일 예배도 더 잘 참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즉 나보다 기도나 금식 그리고 헌금을 적게 하는 사람들에 비해 더 거룩하거나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참으로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 마음 속에는 어느 정도 이러한 마음들이 있는 것에 대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번째로는 우리의 거룩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은근히 세리나 부도덕한 자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에 비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시시때때로 사람들을 그리고 심지어 주님까지도 죄인이라고 판단하고 정죄 했는데 정말로 거룩하신 주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내가 어떤 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하거나 더 지킨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차이가 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도토리 키재기라고 말한 것처럼 금식기도를 한번 더했거나 남보다 성경을 조금 더 보거나, 기도를 좀 더 하거나, 전도를 다른 사람에 비해 몇 번 더했거나 어떤 음식을 안 먹었거나 어떤 말씀에 대한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다르거나 다른 사람들이 쓰는 용어를 나는 쓰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은 주일날 오후에 일을 하는데 나는 거룩하게 생각해 지키거나, 다른 사람들은 TV를 보는 데 나는 일체 보지 않거나···· 등 이 적은 것들로 인하여 내 자신은 더 거룩하고 다른 사람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인 것처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판단과 정죄는 내가 상대방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즉 자기를 더 의롭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것이든 거룩은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는 우리가 세리처럼 생각했던 지체들에 대하여 어떤 생 각을 갖게 될까요? 여전히 나는 그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할 수 있을까요?

 

(1996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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