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4. 1. 11. 08:58 횃불/1996년

발람(7)

 

하나님의 백성의 아름다움과 질서

만일 우리가 육신의 악함에 대해 깨달은바가 없다면 발락과 발람이 이스라엘에 재앙을 보내기 위해 또 다른 시도를 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할 것이다. 발락은 자신이 부득불 들을 수 밖에 없었던 노래에 대해 매우 분노했다. 그는 비록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고 발람에게 말했으나 곧이어 이렇게 덧붙였다. “오라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네가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 이것은 분명히 악의에 찬 발언이었다. 여호와께서 이미 그의 계획을 두번씩이나 무산시키셨건만 여전히 그는 또다시 시도하려 했으며 이에 발람은 반대하지 않았다. 확실히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들이 이 때만큼 끈질기게 증오의 화살을 쏘던 때는 없었다!

새로운 전망대는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브올산 꼭대기였다. 발람은 이번에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실로 아름다운 묘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모든 약속된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광야 가운데 있었다. 신약성경의 서신들을 살펴보면 천국의 영광 중에 있는 성도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이 악한 세상 중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에 대해서도 놀라운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있는 것으로 보시며, 믿음은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라고 득의양양하게 말한다(요일 4:17).

발람은 이제 마술을 부리려고 애써봐야 더 이상 소용없음을 온전히 확신했다. 그는 지옥의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에 대해 아무 힘도 쓸 수 없으며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마음을 그분의 택한 백성에게서 돌리게 할 수 없음을 경험을 통해 증명했다. 그것은 마땅히 그의 속에 부서지고 통회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했으나 슬프게도 전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러한 비극(이스라엘이 아닌 그 자신에 대한)은 자연 그 무서운 결말로 이어졌다.

민수기 24 2절에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성령으로 태어나고 그 결과로 영원히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어느 개인에게 임하는 것의 차이를 구분치 못하는 이들을 놀라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 위대한 희생사역을 이루고 하늘에 올리우신 이후로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차별없이 주어진다. 사도와 선지자와 전도자, 목자와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유약한 하나님의 자녀도 똑같이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우리는 때때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어떤 특별한 사역을 위해 사람들에게 임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것은 회심과 무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이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신이 옷니엘에게 임했으며( 3:10), 아사 시대에 선지자 아사랴에게 임했다(대하 15:1). 이들은 진실한 성도들이었던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신이 사울이 보낸 사자들과 심지어 사울왕 자신에게도 임한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삼상 19:20-24). 그 당시 그들의 마음이 살의(殺意)로 가득찼던 것으로 보아 그들 중 아무도 성도가 아니었다. 또한 역대하 35:21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방 애굽왕을 도구삼아 경건한(그러나 잘못된 길에 빠진) 왕 요시야를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민수기 24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이 사단의 사악한 종에게 임하여 그를 완전히 그분의 지배 아래 두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가 보는대로 하나님의 백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놀라운 표현으로 묘사하도록 강권하시는 것을 대하게 된다. 화자(話者) 본인이 그가 한 모든 말의 반대를 말하기를 원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는 실로 대적의 모든 권세에 대한 하나님의 뛰어나심을 놀랍게 드러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말이 발람과 같은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고 모든 면에서 그들의 행복을 구한 모세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경우보다 얼마나 더 위력이 있는지!

발람은 매주 엄위한 표현으로 그의 세 번째 비유를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과, 그리고 자신이 말하도록 주어진 그 놀라운 일들과 관계된 자신의 위치를 묘사한다.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그와같이 그는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뜨인 눈으로 아무 관심이 없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음을 의식했다. 그가 증오하는 백성의 축복과 궁극적인 승리에 대해 묘사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타락한 인간임을 알았다. “엎드려서 눈을 뜬 자.” 특권을 입은, 그러나 악의를 품은 이 사람은 영원한 파멸로 내려갔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멈추어 우리 마음에 한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소중한 것들을 지적인 방법으로 보고심지어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도 우리 마음이 감동을 받지 않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가르침을 이해하게 될 때 그 진리가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기울이도록 하자.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1:18).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발람이 하나님에 관한 소중한 것들을 거룩치 못하게 다룬 일이 주는 경고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자.

발람은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거하는 것을보았으며 이에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외쳤다(2). 그의 이 세번째 비유를 주의깊게 살펴보면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그 백성의 장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우리는 7절에 이르러서야 라는 대명사를 접할 수 있는 데 이점을 주목해야 한다. 성막과 그 기구에 대해 가르치는 출애굽기 26장에는 여러가지 장막이 성막(6), 앙장(12 ), 덮개(14)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1-6절은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놓아 만든 가는 베실로 된 열 폭의 앙장을 성막으로 묘사하는 반면, 713절에서는 염소털로 된 열 한폭의 천을 가리켜 막이라 일컬으며, 그리고 14절은 붉은 물들인 수양과 해달의 가죽으로 된 덮개를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는, 그 완전하심으로 그분의 백성을 가리우고 그들을 위한 모든 축복을 보장해 주는 그리스도를 말해 주었다. 그러므로 발람이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말한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슬프게도 이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발한 고백의 어떠함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다! 발람의 세번째 비유는 매우 충만하다. 그는 여호와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아름다움과 질서와 축복됨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그 대강을 제시한다.

얼마나 연합되어 있는가! “그 지파대로” -2.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그 지파대로 거하는” -2.

얼마나 아름다운가! “골짜기 같고 동산 같으며 “ -6.

얼마나 향기로운가! “침향목들 같고” -6.

얼마나 위엄한가! “백향목들 같도다” -6.

얼마나 충만한가! “물가의····” - 6.

얼마나 넘치는가! “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7.

얼마나 힘있는가! “들소와 같도다·수사자와 같고”-8,9.

 

얼마나 연합되어 있는가!-열두 지파는 여전히 한 몸이었다. 솔로몬이 죽은 뒤에 일어난 분열이 이제까지 치유되지 않았다. 지파들은 주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에 나팔소리와 함께 재결합될 것이다 ( 24:31. 11:12). 그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외칠 것이다( 133:1). 이 기간에 하나님의 성도들의 연합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연합보다 더 친밀하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오순절에 하늘로부터 강림하셨다. 이제 지상에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우는 놀라운 영적인 유기체가 존재한다.  모든 지체들은 하늘에 있는 영화롭게 된 머리와 살아있는 연합을 이루며, 모든 지체는 서로 연합되어 있다. 만일 이 진리를 믿음으로 깨닫게 된다면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기존 기독교계의 교파적인 조직을 포기하고 다시는 그런 류의 분파적인 움직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 발람은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장막에 거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오천명이 떡을 먹을 때 그들은 원하는대로 아무데나 앉아서는 안 되었다.

주 예수님은 떼를 지어 한 오십명씩 앉히라고 명하셨다( 9:14).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진영은 여호와 자신에 의해 계획되었다. 지파들은 각기 세 지파씩 네 무리로 성막 주변에 정열되었다(2).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도 모든 지체는 하나님에 의해, 하늘에 계신 머리의 무한한 원천으로부터, 그 몸의 축복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았다.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고전 12:18).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4:16). 하나님의 은혜로운 질서를, 그토록 오랫동안 전체 교회를 핍절케 한 인위적인 조직과 비교한다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얼마나 아름다운가!그 멀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얼마 나 멋진 모습인가! 골짜기보다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며 동산보다 매혹적인 것이 무엇인가! 골짜기는 하나님이 항상 그분의 백성에게서 보기를 원하시는 사랑스러움을 암시하며, 동산은 훈련을 암시한다. 아가서 4 12절에서 신랑이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 수라고 말하자 이에 신부가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고 화답한다. 신랑은 그 아름다운 초청을 받아 들인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4:13, 5:1).

이스라엘은 옛 세대에 있어 하나님의 경작된 동산이었으며 교회는 오늘날 그 분의 경작된 동산이다. 그러기에 사도는 고린도전서 3 9절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라고 말한다. 개개의 성도들은 무한한 지혜와 사랑으로 돌봄을 받는 그분의 나무들이다. 단순한 종교인들을 가리켜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다.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5:13).

이스라엘에 관계된 아름다움에 대한 또 하나의 상()이 에스겔 10장에서 발견된다. 거기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을 꾸짖고 계신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자녀로 입양하여 정성을 다해 돌봐준 버려진 아이에 비유하신다. “네 화려함을 인하여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14).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주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우리말 성경 난하주 참조-역주)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라고 고백하며, 예레미야 13 20절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무시한 지도자들을 향해 네 아름다운 양떼는 어디 있느뇨라고 책망을 가하신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부활하신 분의 모든 온전하심과 구비되심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있다. 골로새서 3 12절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라는, 다른데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사용된 표현을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사용하고 있는데, 이를 다음 말씀들과 비교해 보라.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42:1).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2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3:17).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우리에 대해, 그분의 아들을 가리켜 말씀하시듯이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마땅히 그의 행하시는대로행해야 할 것이다(요일 2:6).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자들은 사람들 앞에서도 아름다워야 한다. 우리의 실제 상태는 우리의 신분과 일치되어야 한다.

 

(1996 4월호)

 

'횃불 > 1996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 실제의 회복  (0) 2014.01.11
분노 중에 지나가는 우리의 모든 날  (0) 2014.01.11
바리새인과 거룩  (0) 2014.01.11
가장 사랑하는 나라  (0) 2014.0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0) 2014.01.11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0) 2014.01.11
그리스도 안에서  (2) 2014.01.06
그리스도를 위한 포기  (0) 2014.01.06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