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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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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 윌리암스

구절의 위치

이사야의 이 예언은 축소판 성경이라고 불립니다. 바로 우리의 성경이 66권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이사야서도 6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죄의 시작과 결과를 보여줍니다. 이사야서의 1장은 타락에 대한 죄악의 더러운 질병들을 비유합니다, “상처와 터짐과 썩게 하는 종기 그것들은 닫혀 있지도 않고 묶여 있지도 않으며, 향유로도 낫게 하지 아니하였다.” 창세기에서 사람이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며 부르십니다. 이사야 1:18에서는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 죄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가능하도록 주님에 의해 제공되었습니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계 21:1)을 사도 요한에게 보이신 것처럼 계시록에서 끝납니다. 이사야 예언의 마지막 장들은 예언자가 “보라, 내가 새 하늘들과 새 땅을 창조하노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이 되도록 창조하며 그녀의 백성을 기쁨이 되도록 창조하고”(사 65:17-18)라며 행복한 천년시대에 대해 기대합니다.

 

구약 39권의 책은 우리 주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의 이전 일들을 말합니다. 이사야의 처음 39개 장은 웃시야부터 히스기야까지의 일들을 주로 취급합니다. 동시에 이 장들에는 많은 예언적인 진실을 가지고 있지만 앗시리아가 북쪽의 큰 세력일 때 그들 역시 역사적인 일들과 관련됩니다. 신약은 27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사야의 마지막 27개 장은 이사야의 시대부터 미래에 일어날 일들 곧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과 뒤따를 회복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두 부분을 나누는 지점은 40장입니다. 그 세 번째 구절에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같이 주의 오심을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신약성경은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침례 요한의 예언으로 시작됩니다. 사복음서의 각 기자들은 그분의 증거인 이 절을 각각 인용합니다.

 

성경 축소판으로 이사야는 2개의 부분 – 39개와 27개 장들로 바로 나뉩니다. 40장과 66장의 사이 중간쯤이 되는 53장은 이 후반 부분의 중앙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이 아닌가요? 그리스도와 갈보리의 이야기는 모든 신약성경의 참된 중심 주제입니다. 더욱이, 이 마지막 27장들 가까이서 보이는 것은 그들이 각각 9개 장들로 3개의 부분으로 분할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인 생각은 각 부분으로 끝냅니다. 40-48장들은 “주께서 이르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평강이 없다”는 단어들로 끝납니다. 49-57장들에도 “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평강이 없다”로 다시 끝냅니다. 58-66장들에는 “그들의 벌레가 죽지 아니하고 그들의 불이 꺼지지 아니할 것”이라는 장소의 슬픈 그림과 함께 닫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세 번이나 그분은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53장에는 죄를 위한 제물로 “그분의 (영)혼”의 삼중적인 암시로 끝냅니다. 이사야서의 신약 부분의 중심 구절은 구속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를 그분에 대해 읽습니다(53:5). 삼위일체의 수는 우리 성경에 넘쳐나는 진리입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자”라고 읽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영과 혼과 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신약성경은 명확하게 창조의 하나님이 또한 구원의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줍니다. 이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요 1:13); 그것은 성령의 일입니다(요 3:6);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인한 것입니다(벧전 1:18-19). 하나님께서는 구속을 생각하시고, 그리스도는 그것을 위해 죽으시고, 성령님은 그것을 증거하십니다. 이사야의 이름은 “여호와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가 자기 혼을 쏟아 부어 죽기까지”를 그분에 대해 읽습니다. 우리는 제공된 구원에 대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또 다른 특징은 “종”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40장과 53장 사이에 이 단어는 항상 단수입니다. 때때로 그 단어는 예언자 자신이나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백성들에게 호소하는 예언자들에 공통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42장은 세상에 오셔서 갈보리로 가신 아들, 미래의 종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분은 완전하고 확실한 종이셨습니다. 실제로 53장에서 66장 사이의 그 단어는 항상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53장 이전에는 여호와의 눈이 단지 한 사람의 종에게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이야기에서 아버지들은 가족을 위해 어린 양을 취했습니다. “각 사람이 어린양을 취하되.” 그것은 어린 양의 수천 마리를 포함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녁때에 이스라엘 회중의 전체 집회에서 그것을 잡으라”(출 12:6)고 읽습니다. 주님의 눈은 이집트의 많은 어린양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복된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종”이란 단어가 53장 이전에는 단수였다면 왜 이 장 이후에는 복수여야 합니까? 그것은 갈보리의 구속 사역이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데려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사신 많은 종들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드리기 때문입니까?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