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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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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 10. 09:08 횃불/1996년

말씀의 올바른 해석

죤 필립스

머리말

내가 처음으로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나에게 소개해 주었으면 했던 그런 책을 내가 내어놓는다.

수년간 나는 설교, 성경공부, 또 다른 주석에서 조금씩 지식을 얻게 되어 마침내 성경에 관한 상당한 정보를 갖게 되었다. 성경의 줄거리와 중요한 교리에 익숙해지고 성경의 기본적인 주제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성경을 알고 있으며 성경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도 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상 나는 성경의 총체적인 영역을 모르고 있었으며,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초보적인 개념만을 갖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면! 나는 성경 해석학(Hermeneutic, 용어 자체도 어려웠다)이 있다는 것, 어떤 성경구절의 실제 의미를 알아내는 올바른 길과 잘못된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치 계시를 받은 것 같았다.

문맥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어느 부분을 살펴 보기 전에 전체를 먼저 봐야 한다든지, 너무 자의적으로 알레고리칼(풍유적, Allegorical) 하게 해석하는 것의 위험성. 그러나 일반적 원칙을 잘 습득하여 성경에 적용하면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는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난 느낌이었다(이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단 사상이나 기독교의 큰 잘못들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해 내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쓸 때, 나는 나같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썼다. 이 책은 성경학교에서 성경해석학을 배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나는 성경해석학을 학술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해석의 커다란 원칙들만을 설명하고자하며, 이 원칙들이 어떻게 쓰이고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고 싶다.

이 책은 1,2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기본적인 원칙을 소개했다(나는 가능한한 재미있게 쓰려고 했다). 나는 이 내용을 수년간 강연했었는데 반응이 좋았다. 2 부는 이 해석의 원칙을 사용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모아 놓았다. 마지막 도서목록은 전적으로 필자의 주관적인 것이다.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책을 모은 것인데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나는 모든 사람이 이 책을 좋아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미 알레고리칼한 해석에 젖어 있는 사람은 이 책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해석의 황금률’-하나님은 자신이 뜻한 바를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뜻하셨다. 또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언어와 의사 소통의 일반적인 원칙들을 사용하신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分辨)’하는데 용기와 도움을 얻을 것이다. 

 

서론

한번은 내 친구가 우리 집에서 전기 배선 공사를 해 준 적이 있었다. 그는 먼저 전선이 통과하게 될 긴 관을 설치했다. 그 다음에 그는 절연 장치가 되어 있는 길고 두꺼운 전선을 꺼냈다. 그런데 그 전선은 3개의 다른 전선 -빨간색, 검은색, 흰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친구는 이 선들을 분리시켜 놓고 색깔을 잘 살폈다. 그는 빨간선과 검은선과 흰선을 결코 무분별하게 연결시키지 않았다. 그는 단순한 규칙, 즉 전기의 법칙-빨간선은 빨간선, 흰선은 흰선, 검은선은 검은선하고 연결되어야 한다-에 따라서 공사를 해 나갔다 그가 이 단순한 규칙을 무시하고 세가지 색의 선을 섞어 연결했다고 가정해 보자. 전기 스위치를 켰을 때, 합선되어 완전히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전선들이 서로 분리되어야 되는 것과 각 전선의 위치와 기능을 이해하는 것은 전기 공사의 기본적인 원칙이다. 성경 해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기 공사처럼 성경 해석에도 그 원칙이 있다.

성경을 통해 흐르는 3개의 주요 진리는 구원 진리”, “교회 진리”, “왕국 진리이다. 우리는 이것을 서로 구분하고, 묵상시 분리시키며, 올바른 목적으로만 모아야 한다. 이것들을 섞어버리면 혼란이 온다.

구원 진리는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항상 죄인들을 구원할 하나의 길을 갖고 계신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갈보리이다. 어느 시대에 살았건 간에, 구약의 성도는 십자가를 기대했다. 그들은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홍수 이전의 신자, 약속세대의 신자, 율법 아래 살던 신자들은 희생제물을 드리면서 갈보리에서 드려질 구원을 믿음으로 붙들었다. 오늘날 교회시대의 신자, 다가올 환난시대의 신자, 천년왕국시대의 신자들은 모두 믿음으로 십자가를 뒤돌아본다.  갈보리는 우리 모두를 덮어 준다.

교회 진리는 단지 신약에서만, 그것도 특히 바울 서신에서만 나타난다. 교회는 구약의 사람들에게는 계시되지 않았던 감추인 비밀이었는데 그리스도에 의해 처음으로 언급되었고 바울 서신에서 성령에 의해 밝은 빛 가운데 드러나게 되었다. 교회 진리는 구약에는 계시되지 않았지만 구약 속에 숨겨져 있다. 오늘날 신약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구약으로 돌아가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곳에 숨겨진 모형과 그림자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구약 성도들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교회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왕국 진리도 구원 진리처럼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 땅에 왕국을 세우고자 하셨고 이 목표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시편과 선지서의 많은 부분이 이 왕국진리로 가득차 있다.  이를 구원 진리나 교회 진리로 이해하면 혼란스럽게 된다. 어떤 비유는 구원 진리를 나타낸다(: 탕자의 비유). 그리고 어떤 비유는 교회 진리를 나타낸다 (: 진주 비유). 그러므로 우리는 전선을 잘못 연결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두 길을 만나게 된다. 이 두 길 위에 많은 전도자들이 있으므로 그들이 어느 길로 이끄는 사람인지를 잘 살펴야 한다. 때때로 이 두 길은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제3의 길이 있다고 말하나 성경적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 

첫번째 길은 알레고리 성경해석 원칙이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요 원칙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은혜를 나타내시는데 사용하신다.  이러한 해석체계를 언약신학이라 한다. 하나님이 사람과 맺은 이 언약에는 행위의 언약과 은혜의 언약이 있다. 이 이론은 결국 교회와 이스라엘과의 관계라는 중대한 문제에 부딪힌다. 언약신학은 교회를 영적인 이스라엘로 간주한다. 그렇게 되면 국가 이스라엘의 미래는 없게 되고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천년통치도 없게 된다.

두번째 길은 문자적 해석이다. 즉 성경구절은 문자적, 문법적, 문화적으로 해석된다. 이 체계의 주요 원칙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역사하신다. 나에겐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넓고 만족스러운 원칙처럼 보인다. 이 체계는 세대주의 체계이다. 성경에는 여러 세대, 혹은 시대가 나오며, 그 세대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을 드러내시며, 하나님은 여러 방식으로 사람에게 접근하셨지만, 사람은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이같은 해석체계도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문자적 해석 원리는 이 둘 사이의 분명한 구분을 주장한다. 교회는 영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며, 이스라엘과 교회는 하나님이 인류를 다루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이다. 교회와 이스라엘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전적으로 다른 미래를 갖고 있다. 교회의 미래는 휴거로 절정에 이르며, 이스라엘의 미래는 대환난, 아마겟돈 전쟁, 그리스도의 지상천년통치로 절정을 이룬다. 풍유적인 해석 체계나 문자적 해석체계 중 어느 쪽을 취하든지 간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죄인의 구원의 교리를 전한다. 둘 다 영원한 상태는 동일하다. 즉 믿는 자들의 영광과 불신자들의 영원한 저주, 그러나 이 둘 사이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 책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 방법을 따른다.

그렇다면 세번째 방법은 무엇인가? 이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사람이 만든 교리, 철학, 경험에서 출발해서 이미 취한 입장을 성경구절에서 증거로 끌어댄다.

예를 들어 은사운동(charismatic)은 경험에서 출발한다. 소위 성령 세례, 방언, 기적 등. 이 경험은 자신의 경험 혹은 타인의 것일 수도 있다. 성경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병고침, 기적, 예언, 방언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정상적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며 지금도 유효하다고 하는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 온갖 성경구절을 인용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4:39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같은 구절이 그렇다. 인기 없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13:8방언도 그치고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원어에는 방언 그 자체가 저절로 그친다(in and of themselves)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방언은 단지 일시적인 현상이므로 자동적으로 그칠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교리에서 출발한다. 성모 마리아의 무흠잉태, 연옥,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성체식 때 주 예수의 실제로 현현하심. 이런 교리 등은 성경을 철저히 살펴봄으로써 만들어진게 아니라 전통에 호소하고 교부들의 저작, 외경에 근거한다. “볼티모어 교리 문답서한 부를 구해 카톨릭 교리를 살펴보면 이들 교리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광범위한 로마 카톨릭 건물은 이같이 모래 위에 세워져 있다.

차를 운전하려면 먼저 도로의 규칙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운전자가 실기시험에서 감독하는 자를 만족시켜야 한다. 이것은 자신과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위해서이다. 아무도 공공도로 위에서 자기 마음대로 운전해서는 안된다. 함부로 중앙선을 침범해 운전해서도 안되며 교통신호를 무시해도 안된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해석하기 전, 원칙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성경을 가르치면 그는 위험한 존재가 된다. 이 책의 첫 부분은 중요한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 이 원칙들은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단순한 상식이며 모든 책의 해석에 적용되는 원리이다.

물론 성경은 독특한 책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성경의 진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전 2:14). 더군다나 가장 경건한 신자라도 성경의 신비와 이적을 계시해 줄 성령님을 통해야 한다( 14:16,17, 16:1215). 동시에 성령께서는 성경을 쓰실 때 언어의 법칙을 사용하셨고 그 진리를 드러내실 때도 언어의 법칙을 사용하신다. 우리는 언어의 법칙을 알아야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눌 수 있다(딤후 2:15).

 

1. 황금률

상식으로 보아 분명한 뜻이면 다른 의미를 찾지 말라.” 이것이 성경해석의 황금률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의미하신 바를 말하시고, 말씀하신 것을 의미하신다. 우리는 다른 보통 책을 읽듯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 즉 무슨 상징적, 신비적, 비유적 의미가 평범한 진술 속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성경구절의 한 구절이나 광범위한 이야기에서 영적 교훈을 끌어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어떤 구절이 표면상의 의미보다 깊은 가르침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 의미가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책을 읽는데 사용하는 상식이라는 동일한 원칙을 성경에도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쓰여진 것의 명백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한 다음에 표면 뒤에 숨겨진 보물을 캐내야 한다.

 

1. 우리는 문자적으로 이해한다.

어떤 단어의 보통 상식적으로 통용된 의미가 그 단어의 문자적 의미이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할 때, 시적인 언어를 쓸 때라도 그 단어를 겉에 나타난 의미로 이해하지,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지 아니한다. 우리는 신문, 잡지, 소설, 교과서를 문자적으로 읽는다. 비유적인 이야기를 읽게 되더라도 말한 그대로 즉 문자적 의미를 전달하는 시적 수단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매일 숙어, 상징, 시적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 목적은 비밀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에 색깔을 입히는데 있다. 따라서 성경에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읽을 때 우리는 비유의 장점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잡초들이 밀밭에서 훨씬 잘 자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성경이 어떤 사람들을 라고 말할 때 우리는 개의 습관이 얼마나 천한지, 그리고 사람들도 실제 삶에서 개가 물듯 퉁명스럽고, 꼬리치듯 아첨하며, 심술궂고 더러운지 안다. 성경에서 사람은 여러 동물로 비유 되어 있다. , 사자, 늑대, 돼지, 여우, .

이 동물의 특성이 사람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경 구절이 비유인지 결정하기 전에 먼저 문자적 의미를 살펴 보아야 한다. 다만 문자적 해석이 모순 되거나 문맥이나 주제와 전혀 일치하지 않을 때 비유적 해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시편에 시온이 많이 나온다. 우리는 이 시온을 교회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시온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명한 요새이며 자주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선지서에서 시온은 교회가 아니라 예루살렘 도시를 가리킨다.  히브리 저자들이 시온을 비유적으로 사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를 이스라엘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이 둘은 명백히 대조된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때도, 우리는 비유적 표현을 참작해야 한다. 몇 년 전 어떤 미국인 사업가가 대만에 있는 청중에게 연설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그에게 통역자가 왔는데 그는 영어의 숙어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 미국 사업가는 발을 꼿꼿이 세우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 오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통역자는 당황하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만 청중에게 이렇게 통역했다. “이 가난한 사람은 여기 오려고 죽도록 저축했습니다.”  대화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면 시적 표현과 관용어를 알아야 한다. 이 원칙은 어떤 구절이 의도한 기본적인 분명한 의미를 찾고 상징, 모형, 비유를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대로 이해한다. 누군가 나는 허둥댔다”(lose head)고 말하는 것은 머리가 잘렸다는게 아니라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이와 똑같이 상식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2. 우리는 문화적으로 해석한다.

성경의 어떤 부분을 지적으로 이해하려면 그 나라의 지리, 기후와 그 시대의 관습, 역사를 알아야 한다. 성경은 20세기에 쓰인 것도, 서구에서 쓰인 것도 아니다. 1,500년도 더 된 기간동안 동방의 페르시아, 서양의 로마 등지에서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기록하였다. 모세와 다니엘은 정치가였으며,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는 왕이었고 아모스는 목동, 여호수아는 군인, 에스라, 에스겔은 제사장, 마태는 세리, 베드로, 요한은 어부. 누가는 의사, 바울은 학자였다. 출애굽기의 문화적 배경은 호세아의 경우와 매우 다르며 예레미야와 이사야는 거의 백년의 차이가 난다. 그동안 전적으로 새로운 국제상황이 벌어졌다.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에는 400년의 폭동기간이 가로 놓여 있다. 구약의 역사서, 예언서, 그리고 신약의 역사서를 볼 때 그 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또한 성경지리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 , , 평야, 도시, 농산물, 기후, 계절, 식물, 동물 등이 나온다. 이런 것에 대한 정보가 수록되이 있는 성경사전이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성경지리를 알고 있으면 시편 29편을 이해하기 쉽다. 이 시편에는 다윗의 마음에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긴 우뢰가 묘사되어 있다(3,4). 이 우뢰는 지중해 위에 떨어진다. 다윗은 바다 위에 폭풍이 이는 특별한 광경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 우뢰는 내륙으로 들어와 레바논의 백향목을 흔들고, 북쪽 헐몬산(시룐)의 계곡에 번개를 내린다(6). 폭풍은 그 곳에서 다시 남쪽 가데스 광야로 옮겨간다(8). 폭풍의 무서운 메아리 소리 때문에 암사슴이 낙태하고 비바람은 숲을 말갛게 벗긴다(9). 이같이 다윗은 폭풍이 지중해에서 발생해서 남쪽 광야에서 사라질 때까지의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는 폭풍우에서 교훈을 끌어낸다.  혹은 에스겔 38,39장을 예를 들어보자. ‘극한북방에서의 침략이 언급되는데 이는 지도상의 북쪽이 아닌 팔레스타인의 북쪽이다. 성경지리에서 팔레스타인이 중심임을 기억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아시아의 일곱교회는 인도, 중국, 일본이 아니라 소아시아의 로마 지방 즉 우리가 터키라 부르는 곳이다.

이스라엘의 지리에 대해 알고 있으면 우리 주님 생애에 있었던 여러 사건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매우 작은 지역이다. 바울의 선교 여행을 성경지도 없이는 살펴볼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경역사는 성경지리 만큼이나 다양하다. 성경은 거대한 제국의 흥망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이집트,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가 나타난다. 가나안, 시리아, 모압, 에돔, 암몬, 팔레스타인, 아라비아도 등장한다. 예루살렘, 가자, 다마스커스 등의 도시도 자주 나온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900마일의 원을 그리면 아테네, 이스탄불, 안디옥, 베이루트, 다마스커스, 바그다드, 알렉산드리아, 카이로, 메카가 포함된다 또한 서양 문명의 대부분이 일어난 지역도 포함될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이집트까지는 겨우 300 마일이며 앗시리아, 바벨론까지는 약 700마일, 페르시아까지는 약 1,000마일, 그리이스까지 800마일, 로마까지 1,500 마일, 예루살렘은 고대의 거대 제국들이 행군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들어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역사가 그렇게 소란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수 십번 포위되었고 계속해서 점령, 약탈당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보다 약간 높아서 예루살렘을 사해에까지 이르는 광야로부터 막아주고 있다. 예루살렘은 해발 2,500피트이고, 사해는 1,200피트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사해까지 가면 거의 4,000피트를 내려가 열대성 기후가 되어버린다. 예루살렘 거리에는 눈이 내리나 25마일 떨어진 여리고에는 더워서 눈을 볼 수 없다. 여리고는 사해에 가깝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갔다는 말씀이 문자적으로도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요단 계곡은 지구의 지각 운동 때 생긴 커다란 균열 부분 중 하나여서 일년내내 날씨가 덥다.

성경에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구절을 읽으면 당시 땅의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로 생각해서 상당히 넓은 지역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동차로 하루도 안되는 거리이다. 예루살렘에 서 나사렛까지는 75마일이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5마일도 안된다. 나사렛에서 가버나움까지는 25마일이며 다윗이 자기 양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주위에 있는 유대의 언덕에 서서 보면 팔레스타인(블레셋)이 서쪽으로 2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스라엘의 구약 역사는 모두 웨일즈나 스코틀랜드보다 작은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다.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므깃도 평야는 푸른 나무와 농장으로 가득찬 비옥한 계곡이다. 고대의 많은 군대들이 이 운명의 평야지대를 지나갔었다. 이집트, 앗시리아, 바벨론 군대가 여기를 지나갔고, 여기 어딘가에서 바락이 시스라와 그가 이끄는 900대의 철병거를 무찔러 승리했다. 요시아왕이 이집트의 침략을 맞서 싸우다 죽은 곳도 여기이고 사울 왕이 신접한 여인을 은밀히 만나러 올라간 언덕도 여기 있다. 나봇의 포도원도 이 평야에서 멀지 않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죽인 갈멜산은 저 멀리 보이는 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나사렛은 남과 북을 나눌 뿐 아니라, 유대와 갈릴리를 나누며, 신약과 구약을 나누고 있다. 지리적으로 나사렛은 최전선 마을이며 두 세계를 잇는 다리이다. 북쪽으로 여행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유다를 작별하고 갈릴리로 들어 가는 곳이다. 남쪽에는 배타적이고 귀족적이며 형식적인 예루살렘이 있고, 북쪽으로는 시리아에서부터 닦아 놓은 로마 의 군사도로, 멀리 동방에서 시작된 오래된 상업도로가 있는 이방 갈릴리가 있다. 오른쪽으로 돌면, 가나를 지나 계속 언덕을 오르게 된다. 말 안장 모양의 해틴의 뿔이라 불리는 언덕에서 살라딘이 십 자군 윈정군을 격퇴시켰다.

이 언덕을 지나고 나면 100피트 아래에 갈릴리 바다가 보인다. 바람이 많은 요단강이 이 갈릴리 바다로 굽이굽이 돌아 흐르고 또 여기서 다시 돌아 나오고 있다. 갈릴리 바다는 해저 700피트이다.  심장 모양으로 생겼으며 가장 긴 쪽의 길이는 13마일. 폭은 7마일이다. 이 갈릴리 바다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산 꼭대기는 온화한 지역이며 산자락은 아열대 기후로서 바나나, 종려, 대나무가 자란다. 멀리 북쪽으로는 헐몬산 꼭대기가 눈이 덮인 채 보인다.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호수주위의 작은 산들은 나무가 무성했었다. 관을 통해 물을 사용했었고 호숫가 서쪽에는 인구가 많은 마을들이 있고 동산, 시장, 날로 번창하는 부두(埠頭), 활발히 돌아가는 공장 등이 그 안에 있었다. 가장 큰 도시는 디베리우스인데 로마식 생활 중심지이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는 한 한번도 찾아가지 아니하셨다. 이곳에서 그리이스, 로마인들이 본토 갈릴리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었으며, 그 화려한 헤롯 궁전이 그리이스 조각품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이는 정통 유대인의 자존심을 손상시켰다. 여기에도 원형 경기장, 극장 등이 있어 떠돌아다니는 배우들의 연기와 검투사의 검투를 로마에서처럼 구경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거주하셨던 가버나움은 공중 목욕탕과 온천으로 유명한 로마식 도시 디베리우스에서 10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호수 건너편 겔게세네 언덕은 해변까지 사람들로 가득찼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곳에서 사셨다. 로마의 군인들이 행진하고 그리이스 상인들이 번창해 가고, 페니키아인들이 먼 바다 건너 외국에서 가져온 이국적 상품을 팔던 곳, 군인들과 그들의 야영지를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 검투사, 연예인으로 뒤섞인 곳,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만나 불편해 하는 곳.

예수님께서는 종교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택해 살지 않으셨다. 광야에서 에세네파처럼 금욕적으로 살지도 아니하셨다. 얌전하나 애매한 나사렛에서 살지도 아니하시고 많은 외국인들이 통과하느라 소란스러운 가버나움에서 사셨다.

갈길리 바다는 보통 때는 거울처럼 잔잔하다가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면 작은 배들을 뒤집어버리는 파도가 일어난다.  그 이유는 아마 산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높은 산들을 넘고, 다시 호수로 내려오면서 수십 개의 계곡을 지나다가, 낮게 누워 흐르는 물을 보면 화를 내는 듯하다. 그러다보니 갈릴리 바다는 한순간 평온했다 갑자기 그 다음에 사납게 날뛴다. 

호수는 조용할 때 또 다른 유용함이 있는데, 말씀을 들으러 해변으로 몰려온 많은 청중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비탈진 곳에 앉게 하시고 자신은 호수를 뒤로 하고(군중들을 향해 ) 물가에 서셨다. 혹은 해변가에 배를 띄우고 앉기도 하셨다. 그분은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었다. 그분이 그냥 대화하듯 말하면 그분 뒤에 있던 호수가 자연 방음 장치 역할을 해서 그분의 음성을 모아 증폭시켜 앞쪽 비탈로 내보내 주었다. 나도 한번은 가버나움 근처에서 일련의 청중들 앞에서 이런 방식으로 설교해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서로 꽤 떨어져서 앉았기 때문에 보통 평상시 이야기 하는 음성으로는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녁식사하면서 나누는 음성 정도로 씨뿌리는 비유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도 그들은 내 음성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 호수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예수님에 의해, 예수님을 위해 고안된 마이크이자 앰프였다.  성경지리를 알면 성경을 현실감 있게, 생동감 있게 이해하게 된다.

역사를 알고, 당시의 정치적 갈등, 고대의 왕들과 그들이 내세운 구호, 성경 시대 국가의 정치구조 등을 알면 성경의 어떤 부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니엘서 11장은 그리스 제국이 무너진 후 중동 지역에 있었던 정치적 갈등을 알지 못하면 실제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성경시대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성경의 뉴앙스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아히도벨이 밧세바의 할아버지임을 알면, 압살롬의 반역에 대해 새로운 조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책 뒤에 나와있는 성경역사 개관을 잘 살펴보라).

성경의 관습을 아는 것도 성경의 역사나 지리 만큼이나 중요하다.  인류학자들은 인간의 문화를 물질적 문화와 사회적 문화로 나눈다. 도구, , 무기, , 가정용품 등이 물질적 문화이다. 관습이나 관례, 의례, 의식, 종교의식, 경제적 문제, 정치 등이 사회적 문화에 해당한다 성경에 나타난 어떤 것이 현대 서구 독자에겐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성경이 원래 당대 사람을 대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먹을 방을 마련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라고 말씀하셨다( 14:13). 일반적으로 여자 들만이 물을 지고 가므로 이 말씀은 매우 특이해 보인다. 남자가 그 당시에 물을 지고 가는 것은 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마태복음 10:810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말씀하셨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참고: 6:8, 9, 9:3). 여기서 주머니는 페라’ (pera)이다. 고대 문서를 통해 우리는 페라’(주머니)가 거지들이 돈을 담아 두던 가방임을 알 수 있다. 이방 신전의 제사장들은 여행시 이 헌금받은 돈을 담아두는 주머니를 가지고 다녔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돈을 벌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돈을 구걸할 필요도 없다. 그들을 보낸 분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실 것이다.  이와 비슷한 문화적 지식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4장에 또 다른 예가 나와있다.

 

3. 우리는 문법에 따라 해석한다.

성경의 언어를 아는 것이 바람직하다.  번역도 도움이 되나 번역은 아무리 주의 깊게 해도 번역일 뿐이다.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항상 잃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원어를 모르는 사람도 성경사전이나 원어에 대한 몇몇 책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적어도 어원이나 단어의 의미에 관한 한 그렇다. 물론 구문론은 별개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사람 에게 단어로 전달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단어는 모두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그 단어들을 임의로 쓰시지 않고 매우 조심스럽고도 정확하게 사용하신다.  예를 들어 성경에 지옥으로 번역되는 단어를 살펴보자. 지옥은 헬라어로는 하데스’(hades)이고 문자적인 뜻은 볼 수 없는이다. 그러므로 지옥은 볼 수 없는 곳’, ‘죽은 영혼의 거처를 가리킨다. 그러나 다른 단어들도 비슷하게 번역되었다. 예를 들어 스올’(sheol), ‘게헨나’ (gehenna), ‘타타루스’ (tar- tar-Us) 모두 볼 수 없는 세계를 의미한다. 이 단어들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떤 의미로 이 단어들이 쓰였는지를 알려면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성경의 원어를 알면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린도후서 11:13,14에서 가장한다로 번역된 단어를 살펴보자. 그 구절은 이렇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가장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메타스쉐마티조’ (metaschematizo)인데 외적 모습, 모양, , 외모, 태도를 바꾸다, 변경시키다를 뜻한다. 즉 이 단어는 외적 표현을 취했으나 내적 성품은 반영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어 신약성경을 영어로 해석, 보급하여 온 케네스 위스트(Kenneth Wuest)에 의하면 이 단어에 가장 가까운 영어 단어는 masquerade(‘가장하다’, ‘겉치레’, ‘허구’, ‘·.·인 체하다’)이다. 사단이 타락할 때 사단은 어둠의 천사가 되었다. 그러나 빛의 천사로 가장한다. 바울은 거짓 사도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구문론은 어원보다 원어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요구한다. 문장 내에서 단어의 위치가 단어의 용법을 결정한다. 완전한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문장 배에서 단어를 배열한다. 부지런히 살펴 보면 원어에서 많은 유익을 얻게 되거나 문장의 구문론과 관련해 문제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물론 모두가 문법이나 어원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성경의 많은 부분이 원어를 참고하지 않아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도 이 문제로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문법적 해석이 매우 가치 있음을 보여주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히브리서 1:1,2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로 나와있다. 여기서 동사 말씀하셨으니는 부정 과거 분사이므로 ‘havlng spoken’이 되어야 한다. ‘hath spok- en’은 부정 직설법이다. 즉 하나님은 추 약에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으나 그분의 마음을 다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할 말씀을 다하셨다.

단어의 의미는 문맥상 결정해야 하므로 항상 문맥에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주 오해되는 구절인 베드로후서 1:20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를 살펴보자. 과거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경해석이 교회가 할 일이지, 개인이 할 일이 아니며 , 성경은 신부들의 만장일치 동의에 의해서만 해석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이 구절을 끌어댔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사사로이 푸는 것은 어떤 걸까? ‘사사로이이디오스’ (idios)인데 성경에 114번이나 나오며 거의 대부분 자기 자신(its own)”으로 번역되었다. 이곳을 제외하고 사사로이로 번역된 곳은 한 곳 밖에 없다.  풀다에피루시스’ (epilusis)이며 느슨하게 하다’, ‘풀다, 설명하다의 뜻이다. 문맥을 보면 그 뜻이 분명해진다.  그 다음 구절은 이렇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21).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의 저자들은 그들이 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위에 자기 자신의 설명을 덧입히지 않았다. 베드로후서 1:20의 의미는 그러므로 성경 구절을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쓴 방식을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영감의 과정을 말하고 있다. 문맥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보통의 글이나 대화에서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전달하려는 바를 숨기지 않는 다.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가능한 한 명백히 말한다. 하나님 역시 그러하시다. 우리는 세익스피어, 아인슈타인, 옆집 친구의 말에 적용하는 언어 법칙을 똑같이 성경에도 적용해야 한다.  문법적 해석 원칙은 매우 중요하므로 이 다음 호에서 계속 설명하고 다른 예를 더 들어보고자 한다.

 

(1996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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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