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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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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27. 20:01 횃불/1997년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C. H. 매킨토쉬 지음

1. 재림에 대한 사실

가장 영광스러운 이 주제를 대하면서 독자들 앞에 성경의 증거를 제시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를 떠나 영광 중에 구름을 타고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영접하시고, 불의한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고, 당신의 영원한 나라를 굳건히 세우시는 사실 자체를 보여주는 일 말이다.

 

이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다른 두 내용만큼이나 신약성경에 명료하고 충분하게 제시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만큼이나, 혹은 성령께서 지금 이 땅에 계신 사실만큼이나 분명하다. 만일 한가지 사실을 인정한다면 동일한 권위에 근거를 둔 나머지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한가지 사실을 부정한다면 나머지 사실들도 동일한 권위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부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함께 인정되든지 아니면 함께 부정되든지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거절되고 쫓겨나셨으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일이 사실인가? 그리고 하늘에 오르셔서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것이 사실인가? 예수께서 부활 하신 후 오십 일이 지나서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지금 이 땅에 계신 것이 사실인가? 이 모든 일이 사실인가? 성경이 증거하는 한 그렇다. 그렇다면 복되신 주께서 다시 오셔서 그 나라를 세우실 것이 분명하며, 문자적으로, 실제적으로, 친히 하늘로부터 오셔서 그 위대한 권능으로 온 천하를 다스릴 일은 참으로 사실이다.

 

어떤 독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다 아는 그 진리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거론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의아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치 주의 재림에 대하여 들어본 바가 없는 것처럼, 혹은 듣기는 들었으나 여전히 의구심에 싸여 있는 사람처럼, 이 주제가 그에게 생경스럽게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우리는 지금 그런 독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토록 중대한 문제를 이처럼 단순한 방법으로 다룰 수밖에 없는 입장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 본 주제에 대한 증거들을 살펴 보도록 하자.

 

사랑하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막 떠나려 하실 때에 슬픔에 잠긴 제자들의 마음을 은혜로운 말씀으로 위로하시고자 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14:1-3).

 

여기 짚고 넘어가야 할 명백한 사실이 있다. 위에 인용된 것은 실로 제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씀임에는 틀림이 없다. 주님께서 내가 다시 와서라고 말씀하셨지 너희를 부르러 보내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더우기 너희가 죽으면 내게로 오게 되리라고는 더더욱 아니다.

 

천사 하나를 보내든지 혹은 천사의 군단을 보낸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시는 것과는 비교될 일이 아니다. 만일 수많은 천군천사가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와서 우리를 옹위하여 하늘을 향하여 당당히 올라가게 된다면 그야말로 얼마나 은혜로우며, 우리에게 그 얼마나 영광된 일이겠는가?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신실하신 주님의 언약이 성취된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시기로 언약하신 것은 반드시 행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은 헛되이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며, 자신의 말씀을 결코 변개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이뿐 아니라 많든 적든 천사들을 보내어 우리를 데려가는 것 역시 사랑의 주님께서 만족하실 수 없는 일이다. 주님께서 친히 다시 오실 것이다.

 

이 모든 면에서 얼마나 감동적인 은혜가 나타나고 있는가? 만일 기차를 타고 나를 찾아오는 내 사랑하는 귀중한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면, 심부름할 사람을 시켜 마중 나가도록 하거나, 빈 차를 불러 맞으러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직접 환영하러 나가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의도하시는 모습이다.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사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고 계신다. 하늘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으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앞서 가셔서 예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머물 곳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곳에 들어가고자 할 때에 낯선 느낌을 갖지 않도록 주님께서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하시며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말씀을 해 주신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우리 주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성취할 수 없으며, 그 아무것도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만족시켜 드리지 못한다.

 

이 약속의 말씀이 신자들 개개인의 죽음과 조금도 관련이 없음을 분명히 밝혀 두자. “내가 다시 오리니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것은 실제로 우리가 죽음을 통하여 주님께 가야 하는 것이라고 상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가 감히 주님의 간명하고 존귀한 말씀을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죽음을 통해서 주님을 찾아가도록 주님께서 분명히 의도하셨다면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도 있었고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런 의도가 없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고, 또 헛되이 말씀하실 수도 없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시는 것과 우리가 주님께 가는 것은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이다. 양자가 다른 개념이었다면, 다른 말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십자가에 달려 회개하는 강도의 경우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그를 데리러 오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말씀하셨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이 거룩하게 영감된 만큼 명확하다는 사실이며, 이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죽음처럼 아주 다른 두개의 주제를 성경이 결코 동일시 할 수도 없고 동일시 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싯점에서, 신약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체험하는 주제가 암시된 말씀이 단 네 구절에 나타나 있음에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첫번째 구절은 이미 참조한 대로 누가복음 2343절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이고, 두번째는 사도행전 759절의 주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이며, 세번째는, 우리에게 아주 친근한 말씀으로, 고린도후서 58절의 차라리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는 말씀이다. 마지막으로 네번째는 빌립보서 123절의 내가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는 말씀이다. 이 귀한 말씀들은 몸과 영혼의 분리 상태에 대하여 물을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에 성경이 증거하는 일단의 구절들이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종종 잘못 적용되고 있는 말씀이 계시록 14 13절에 기록되어 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며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가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물론 주 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들은 복되고 또 그 행한 일이 그들을 따르겠지만, 현재 살아 있는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다. 인용된 말씀은 교회가 언젠가 떠나고 난 뒤 다른 증인들이 나타나는 미래의 한 때와 관련이 있다. 요컨대 계시록 1413절 말씀은 계시 시대와 관계된 내용으로,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제 본 주제를 다시 상고해 보자. 사도행전 1장을 펴서 몇 가지 증거들을 살피도록 하자. 복되신 주님께서 이 땅을 떠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 곧 올라 가셨다. “올라 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1:10,11).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이 말씀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대단히 훌륭한 증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말씀의 강력한 증거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명백한 증거를 기피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니! 천사들이 갈릴리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모습을 보고는 불필요하게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같은 말을 불필요하게 반복하여 기록되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따라서 인용된 이 증거는 말씀의 온전한 성취요 아주 훌륭한 완성인 것이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수많은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완전히 동일한 바로 그 예수께서 목격자들이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임을 알게 된다. 주님께서 어떻게 하늘로 올라 가셨는가? 주님은 친히, 말씀에 기록된 대로, 실제로 하늘에 오르셨다. 그분은, 그분을 직접 목격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손으로 직접 그분을 만져보기도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셨던 분이었고, 그들과 함께 잡수시기도 하셨던 분이었으며, 수난을 받은 후에는 확실한 증거로써 부활하신 모습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던 바로 동일한 분이시다. ,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 그대로오실 것이다.

 

   두 손을 높이 들어

   이 낮은 땅에서 하늘에 오르신

   주님은 다시 오시리라.

   축복을 주시고저

 

앞으로 나눌 말씀에서 대할 것으로 예상되는 문제이긴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면 좋을 것이다.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실 때 누가 그분을 목격하였는가? 세상이 보았는가? 그렇지 않다. 회개치 않은 사람, 불신자 등, 무덤에 누우셨던 순간부터 존귀하신 주님께 시선을 두지 못했던 사람들은 누구건 간에 주님의 승천을 볼 수 없었다. 세상이 마지막으로 주님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인데, 이는 천사들에게도, 인간들에게도, 그리고 악마들에게도 의미심장한 하나의 장면이었다. 그 다음 세상이 보게 될 장면은 주님께서 공의로운 심판을 위해 번개의 섬광처럼 나타나셔서 원수들을 보수하시려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시는 때의 모습이 될 것이다. 실로 두려운 생각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순간부터 주님을 보아온 자를 제외하고 그 아무도 주님을 볼 수 없었던 것처럼, 주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친히 본 자들 외에는 그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하였다. 주님께서는 마음에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의 심령 속에 자기의 거룩하신 이름을 복되게 하시고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다. 영감을 받고 증거하는 자의 명백한 증거를 통해서 그들의 영혼에 확신을 심어주고 위안하시며 강하고 담대케 하신다. 사람이 육체를 지니고서 이를 수 있는 바로 그 순간까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 문턱까지 인도하시고 거기서 주님은 하늘에 오르시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그들이 그 영광된 광경을 목도하는 동안, 주님께서 그들의 심령 깊숙히 그 귀중한 증거를 깨닫게 해 주셨던 것이다. 다른 어떤 이도 아니고, 낯선 사람도 아니며, 단지 자애롭고, 자비심 넘치며, 은혜롭고, 변함 없는 친구가 되시는 이 분은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한대로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어떻게 이 증거보다 더 명료하며 더 만족하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더 명백하거나 더 확정적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어떻게 잠시 동안인들 반대 논증을 할 수 있으며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거짓 증인으로 나타나든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시든지 할 것이다. 이 양자 사이에 중간지대란 있을 수 없다. 성경에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하라”( 18:16)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천상의 두 사자들, 빛과 진리의 천군에서 온 두 전령들의 입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실 때에 거룩함 속에 보이시던 친밀한 모습과, 숨죽여 바라보는 자들의 시야에서 하늘 멀리로 사라지시던 모습이 특징을 이루었던 대로,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나타내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으신 모양으로 다시 오시리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은혜롭게도 하늘로 가심을 본그대로 다시 오시리라는 짧은 어구에 모두 내포되어 있다. 성경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증거들을 지금처럼 간략한 글에서는 다 인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복음서에서 하나,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또 한 말씀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서신서에서 한 증거를 살펴보기를 원한다.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전서를 살펴보자. 이 서신은 사도 바울이 쓴 초기의 서신으로 알려져 있고, 더우기 회심한지 얼마 되지 않는 성도들로 구성 된 교회에 썼던 서신이었기에 선택한 것이다. 갓 구원받은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진리를 들려 주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말을 종종 듣던 터라 그런 의미에서 선택이유 중 후자의 요점은 가치가 있다 하겠다. 새로 회심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쓴 편지만큼 주의 재림에 대하여 다루지 않은 다른 서선서들의 내용을 미뤄보건대,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어린 신자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가르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은게 분명하다. 사실은 이것이니,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복음의 온전한 빛과 자유 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러한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게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그 고귀한 진리가 바로 복음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은 성령께서 현재 교회 안에서 친히 역사하시는 신성한 연결 고리로 축복스럽게 연합되어 있다.

 

반면에, 은혜로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 곳에, 참된 평화와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곳에, 거짓 복음을 받아들인 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상태나 세상에 대한 기대에 사로잡혀 있다는 그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내가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고, 영생을 가졌음을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지 못한다면 주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지 못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시에 우리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사실들을 알고 있을 때에야 비로서 영광스럽고 거룩한 재림의 지식으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첫장에 기록된 다음의 문장들을 살펴보자.

 

이는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이는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5-10).

 

위 말씀에서 단순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복음다운 복음이 어떤 효과를 가져다 주는지 그 훌륭한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우상에서 돌이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아들을 기다린다···· 그들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복된 소망으로 돌이켰다. 이는 바울이 가르쳤던 바 복음의 정수요, 그들이 가진 신앙의 핵심이었다. 우상에서 돌이킨 것은 하나의 실제적인 일이었는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의 실제적인 일이었는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위로부터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은 그들에게는 바로 실제적인 일이요, 확실한 일이요, 적극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진리가 아름답게 어울어져 긴밀히 연합되어 있는고로, 만일 그 하나의 실제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진다면 나머지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시의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무엇을 기다리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의 대답은 어떤 것이 되었겠는가? “우리가 받은 복음으로 세상이 진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인가,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될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응답이겠는가? 아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대답을 하였을 것이다. 오직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소망이요, 교회의 아름다운 소망이다. 세상이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소망이 될 수는 없다. 세상의 변화를 기다리느니, 사람이란 자기에 대한 바램이 더 많은 법이므로, 차라리 건강의 증진을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죽음에 관해 기록한 성경말씀을 살펴보면, 그것이 누구에게든 불가피한 사실임에는 분명 하지만, 말씀에 이 죽음을 성도들의 진실하고 간절한 소망으로 표현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죽음을 신자들의 소망으로 말한 것이 신약성경에 일언반구도 나타나 있지 않음을 분명히 확언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서신서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성도들의 삶 가운데, 그들의 관심과 교제 그리고 관계 속에 아주 친밀하게 결속되어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나누는 개인적인 교제에서 관심어린 문제를 언급할 때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20)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곳 성도들이 거룩과 사랑 속에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바울은, “또 주께서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고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하고 다시금 덧붙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잠든 자들과 관련해서 성도들을 위로하고자 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잠든 자들을 지체없이 뒤따라 가야 한다고 말해줄 것인가? 그것은 마치 다윗이 사별한 아들을 두고, “나는 저에게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 12:23)고 말했던 것같이, 구약시대에나 어울리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성령께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가르쳐 주시고 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이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3-18).

 

그 어떤 증거도 이 진술보다 더 간결하고 직접적이며 확정적일 수는 없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회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소망을 둔 자들이었다. 그들은 날마다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다가 다시 하늘에 오르신 것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을 믿는 것이 그들이 믿는 바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래서 그들 중 어느 지체가 죽었을 때, 예상치 못한 일로 해서 당황하게 되었는데, 이는 죽은 자가 고대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재림의 순간에 누리게 될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들의 오해를 바로 잡고자 편지를 보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주제를 지혜의 밝은 빛으로 이해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미 죽은 신자들과 장차 죽음에 이르게 될 모든 신자들 즉, 신약시대 성도는 물론 구약시대의 신자들 모두)이 먼저 일어나게 되고 그 후 산자들도 변화되어, 위로부터 오시는 주님을 맞기 위하여 공중으로 함께 올라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분명히 깨닫게 해 주려는 것이었다.

 

이 영광된 주제에 관해 다른 영역을 다룰 때 다시 한번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실제로, 진실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과, 그의 개인적인 재림이 전체로는 교회의, 그리고 개별적으로는 신자 개개인의 진실되고 합당한 소망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성경의 수많은 증거들 가운데 하나를 단순히 인용했을 뿐이다.  다음과 같은 영감된 말씀들이 증언하고 있는 한, 이 영광된 소망을 잃어버리고서는 우리 주님의 상에 결코 함께 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면서 이번의 글을 맺고자 한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전 11:26). 언제까지라고 했는가? 성도가 죽을 때인가? 아니다. 단지, “그가 오실 때까지이다. 우리 주님의 상이 십자가재림이라는 경이로운 두 시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성도들은 그 상에서 두 시대를 비치는 영광의 광채를 바라본다.  매주 주의 날에,온 성도들이 주의 상에 둘러 앉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선포하며, “이것이 주의 만찬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주님의 날이 다시 밝아오기 전에,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는지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주님의 재림, 이 얼마나 존귀한 일인가! (다음 호에 계속)

 

(1997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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