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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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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12:11 횃불/1997년

노아 - 그의 생애와 그 시대

사무엘 W 제밍스

3: 선지서의 노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 중 일부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노아에 대해서는 신구약에 언급되어 있는데, 사실상 신약의 기자들은 위대한 진리들을 밝히기 위해 그와 그의 시대를 여러 가지 모형과 실제적인 면으로 사용하였다.

앞 장들에서 언급했듯이 구약의 두 기자를 이 노아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했고, 그밖에도 그의 시대와 홍수에 대한 많은 간접적인 언급이 있다. 

이사야의 언급은 매우 간략하지만 빛을 던져 준다.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같이 내나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54:9).

이 장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다루는데, 대환난에서 나오는 그 징계와 천년왕국에서 그들의 기업에 대해 말해준다. 이 모든 것은 미래의 일이다. 그 주된 요점은 다음과 같이 추적해 볼 수 있다.

 

(1) 환란의 그 끔찍한 살육 이후에 한층 더 풍성한 열매를 맺음(1).

(2) 장막 터를 넓히라는 언급에서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2,3).

(3) 수치스런 과거, 즉 끊임없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거역했던 끔찍한 과거가 잊혀질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은 그 과부된 상태에 거했던 그 쇠약한 때도 잊혀질 것이다(4).

(4) 그분의 지상 백성들과 하나님의 새로운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5,6).

(5) 천년왕국으로 이르는 그 두 기간은 대환난과 그 뒤이은 회복으로 주목된다(7,8). 또다시 그 아름다운 순서가 나타나는데, 백성들의 마음에 확신되기 위해 그 진리가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7). 이것은 계시록 7장의 큰 환란에 대한 하나의 참고구절이다. “그러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이는 계시록 20장의 장래의 회복에 관한 언급이다.

그 두 개념이 다른 말로 다음과 같이 반복된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8). 진노는 그 환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며, 자비는 회복에 대한 언급이다.

회복의 근거는 너를 지으신 자”(5)너의 구속자”(8)라는 두 거룩한 명칭으로 묘사된 주님 자신이다. “너를 지으신 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암시하고, “너의 구속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낸다.

(6) 이것은 또한 9절의 노아에 대한 언급으로까지 나아간다 주님은 그 백성들이 그들의 영원한 안전을 확신케 되기를 원하신다. 그들이 과거에 종종 회복을 경험했다가 다시 우상숭배로 떠내려 갔기 때문에, 이같은 확신이 그들에게는 필요했다. 여기서의 회복은 색다르기도 하고 최종적인 것이다. 이스라엘로 확신케 하기 위해 주께서는 그분의 말씀과 약속에 대해 그분의 신실하심을 말씀하신다. 과거를 돌아볼 때, 예를 들어 노아의 날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때 이제는 물로 전 세상을 다시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노아와 그의 후손들에게 이중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맹세까지 하셨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맹세하신다.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그 다음 구절은 이 선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가한다.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이 모든 것은 창세기 9장에서 노아와 맺은 언약과 유사하게 하나의 언약에 기초를 둔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견고한데,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하나의 예로 인용된 노아의 홍수와 같다. 하나님의 성령에서 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예 가운데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예로서 이것을 선택한 사실은 분명히 놀라운 사실이다. 노아와 맺은 언약과 지구는 언제나 견고히 설 것이다.

 

구약에 노아에 대한 두번째 인용이 에스겔 14 14절에 있는데, 이는 한층 더 아름답다. 이것은 이사야서와 같이 물로 말미암는 홍수를 언급하지 않고, 노아와 그가 나타낸 사랑스런 인격에 대해 언급한다.

2장은 14,18,20절에서 노아의 인격에 대해 언급한다. 비록 18절에서는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다른 두 사람과 함께 거기 속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구약에서 다른 두 위인인 다니엘과 욥과 함께 그가 언급된 사실을 주목해 보라. 의로운 점에서 셋 모두는 공통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 성을 건지기에는 무력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쌓은 의로 그들 자신만을 건질 수 있었다.

두번째 요점을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하는데, 이것은 근본적인 것이다. 여기서 다니엘과 욥 둘 다 그들이 죄인이며, 범죄하였음을 고백했기에 구원은 결코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니엘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들어보자.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의 규례를 떠났사오며”( 9:4,5).

욥 또한 마찬가지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천하오니”( 40:4). 그리고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42:6).

우리는 또한 노아가 그의 생애 말년에 술취하여 벌거벗은 모습을 통하여 그의 타락한 본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 사람은 믿음을 가졌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1:6). 이어지는 구절에서 노아가 바로 그같은 믿음을 가졌음을 확증해준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행위로 방주를 지었다. 그러므로 뜨는 행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실제적인 경험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

다른 두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구원은 항상 믿음의 원리로 주어지는 것이다. 바로 그 믿음의 근거로 인한 결과로 그들에게 의가 전가된 것이며, 이는 복음을 믿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이다.

다윗도 로마서 4 68절에 의하면 이같은 경험을 가졌다. 로마서 4장에서 설명된 동일한 원리가 시편 32 1,2절에 기술되어 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15:6). 이처럼 그는 이 놀라운 원리의 모본이 되었고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 것이다( 4:16). 아브라함은 그후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것처럼 선행을 나타내는데 진보하였는데, 이는 많은 이들이 처음 믿음의 경험 이후에 슬프게도 매우 약하게 된 것이었다.

영생을 가진 증거로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의로운 행실이 나타나야 한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증거한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그러므로 실제적인 의가 나타나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물론 그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는데, 씨 뿌리는 비유에서와 같이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13:23). 이것은 물론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관점이다. 그분은 가장 큰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까지 심판하신다. 또한 달란트( 25) 비유와 데나리온( 20) 비유를 참고하기 바란다.

마가의 계산을 보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데, 그 순서는 역으로 삼십배, 육십배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배로 언급하였다. 이러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바로 마가가 종의 관점에서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심지어 가장 미미한 섬김일지라도 그분의 목전에 소중한 것으로 여기며, 그분은 보다 큰 일로 진보되기를 기대하신다.

에스겔 14장의 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신분상의 의를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이 그것을 놀랍게 인정하실 정도로 의의 열매도 맺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의는 그 도시를 건질 수 없었고, 다만 그들 자신만을 건질 수 있었을 뿐이다. 주님의 통치적인 심판은 그 도시의 열망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의 생전에 주어진 말씀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한층 더 놀라운 사실이다. 하나님의 지난 세대의 의로운 성도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에 대해 증거하신다. 그분은 또한 현재 지상에 살아있는 의로운 성도들에 대해 증거하시며, 그들 안에서 큰 기쁨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지상에서 의로운 남녀들을 보시고 천사들 앞에서 그들을 증거하실 수 있도록 애쓰시며 찾으신다.

하나님은 욥의 생전에 그의 의에 대해 사단에게 이렇게 증거하셨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국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1:8).

노아 또한 조금도 손색이 없는 하나님의 칭찬을 이렇게 받았다.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7:1).

이처럼 그 세 사람 모두 살아 생전에 하나님에 의해 그들의 개인적인 의에 대해 증거를 받았다.

또한 그들을 통해 건짐받는 공통된 경험이 그 세 사람에게 있었음을 주목해 보자. 노아는 그의 가족들의 구원의 수단이 되었다( 11:7). 그는 그의 아내와 세 아들과 자부들을 홍수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구원받게 하는 통로가 되었다.

욥 또한 사단과 그의 모든 궤계로부터 건짐을 받았다. 그는 그의 생애 속에서 얼마나 엄청난 시련을 겪었던가! 엄청난 손실과 고난, 게다가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로부터의 오해를 받았다. 그는 이 모든 위경으로부터 건짐을 받았고, 그의 세 친구를 그들의 어리석음의 결과로부터 건져주는 수단이 되었다. 그들은 욥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에게 몹시 나쁘게 행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다루심에 대해 옳지 않게 말함으로 하나님께 정죄받았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42:8). 이리하여 그 친구들은 징계로부터 건짐을 받게 되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의 격변기에 바벨론 궁정에 있었고, 그의 세 친구들로 인하여 느부갓네살의 사악한 우상숭배를 면할 수 있었다( 1). 또다시 그는 장차 예루살렘의 구속에 패해 예언했다( 9).

이처럼 세 사람 모두 다른 이들 즉 노아는 그의 가족을, 다니엘은 그의 동료를, 욥은 그의 친구를 구원하는데에 쓰임을 받았다. 그러나 에스겔서 14장에 나타난 이 이름들은 가장 엄숙하다. 죄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포위되었고, 여러 명이 포로가 되었는데 그 중에 에스겔과 예루살렘 성의 장로들이 포함되었다. 그들은 그발 강가의 포로수용소에 있었는데 예루살렘으로부터 오는 소식은 좋지 않았다. 그 도성은 무가치한 시드기야 왕의 통치하에 있었고, 이전 왕은 징계하는 군대와 같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다. 백성들은 강에 의해 감금되었고, 석방되기를 고대하면서 그들의 사랑하는 성으로 되돌아 갈 수 있기를 바랬다. 사실상 어떤 거짓 선지자들은 마치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처럼 가장하면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에스겔은 악평쟁이였다. 그는 계속하여 예루살렘성이 멸망할 것이며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장로들이 그의 앞에 나타나 이러한 예언에 대해 따지며 무언가 새로운 예언을 듣고자 하여 찾아왔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의 죄로 인해 지금 이런 재앙이 임한 것이므로 그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했다

외적으로 그들은 왜 종교적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님은 그 중심을 보신다.”  그리고 모든 감추어진 우상들을 보신다. 에스겔 14 35, 그리고 7절에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라는 구절이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죄악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의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셔야만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그 자기 의에 가득찬 장로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는 얼마나 충격적이겠는가! 그러한 오만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분의 입장을 분명하게 진술하셨다. 비록 의로운 노아, 다니엘 그리고 욥이 그 성에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다만 그들 자신을 구원할 뿐 그들이 과거에 행한 그 의로 인해 다른 이들을 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은 이미 한계를 넘어 너무 심하게 타락되었으며, 심판이 임박해 있었다. 오직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돌이키는 개개인만이 구원받을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이 세상도 마찬가지 상태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것과 모든 것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이 세상에 다가올 진노를 면하게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복음 메시지를 통하여 은혜를 믿는 믿음의 원리에 따르는 각 개인을 구원하신다. 그 복음에 반응하는 자가 극소수이지만, 그리스도에게 입맞추며 그분을 믿는 자들은 다가올 진노의 폭풍에서 건짐을 받게 된다(살전 1:10). 이것은 성경에서 명백히 말하는 것인데 구원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다. 아무도 그 형제를 결코 대속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를 위하여 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오순절 날 베드로가 외친 메시지이다.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2:40). 슬프게도 오늘날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열린 문으로 들어간다( 13:23,24).

그러나 한층 더 심각한 것은 많은 신자들이 멀찍이 따르고 있으며, 외적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 속에 우상을 들여 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탐심이 가득찬 세상에 살고 있는데,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3:5). 주님은 종종 탐심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셨다. 누가복음 12 1321절이 이에 대한 좋은 예이다. 자신의 당연한 권리로 생각했던 것을 얻고자 애를 쌨던 사람의 그 탐심의 위험을 주께서 경고하셨다. 그에게 주님의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것은 남이 가진 것을 탐내는 경우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이기적으로 붙잡고 다른 궁핍한 이들의 필요를 보고도 자신의 부요를 나누지 않는 탐심에 대해 지적하신 것이다. 이처럼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중시할 탐심의 위험성이 언제나 있고, 만일 누군가 그러한 탐심에 빠지면 그는 정말로 무가치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에스겔서 14장으로 되돌아 가보면 거기에 언급된 세 의인의 경우 각자 조금씩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노아는 당시의 패역한 세상을 이겼고 다니엘은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인한 육신을 이겼고, 욥은 마귀를 이겼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의 삼중적인 원수를 이 세 의인은 분명하게 이겼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이러한 각각의 언급시에 항상 노아의 이름이 맨 먼저 나왔는데, 이는 그가 성경의 기록상 맨 먼저 위치해 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로 인하여 그의 가족도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에스겔서 14 20절의 말씀이 이 점을 분명히 밝혀준다.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이처럼 우리는 구약성경에 있는 노아에 관한 참고 구절들을 살펴보았다. 에스겔서 14장에는 노아의 인물됨이 나타나 있고, 이사야 54장에서는 홍수 사건을 들어 하나님 자신이 말씀과 맹세에 얼마나 신실하신 분이신가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셨다. 그런데 이제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에스겔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아를 보아라. 이스라엘에게는 이제 소망이 없고 오직 심판만 있을 뿐이다. 심지어 노아라 할지라도 오늘날 이 시대의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구원의 방도를 마련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장차 건짐받고 회복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회복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홍수 이후에 노아와 맺은 그분의 언약을 지키셨듯이 그분의 모든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54:9).

<다음 호에 계속>

 

(1997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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