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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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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9. 11:15 횃불/1998년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에(7)

 

7. 유대인의 남은 자

마태복음 24 1~44절까지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이 말씀은, 유대인의 남은 자가 맞게 될 운명과 기독국가의 역사 그리고 민족에 대한 심판 등을 폭넓은 시야로 다루고 있는, 당시 사람들이 그때까지 들어 볼 수 없었던 매우 심오하고 포괄적인 담화들 중 한 말씀이며, 또 그 중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민족들에 대한 심판에 관해서는 우리는 이미 지난 번에 살펴본 바 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이 참이든 혹은 거짓이든 기독교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관하여 연구해 볼 차례가 되었다.

그러면 먼저 유대인의 남은 자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마태복음 24 1~44절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당시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던 사람들의 입장에 서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만일 이 담화를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보내졌던 서신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빛에 대입시켜 보려 한다면 혼동만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루려는 말씀에서 얻을 수 있는 중대한 교훈을 놓치게 된다. 이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아무 것도 찾아 볼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은 완전하시다. 그런 까닭에그 말씀에 시대적 오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은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어야 할 주제를 사람들에게 소개했다면 그것은 시기상조였을 것이다. 교회에 대한 위대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며,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성령께서 내려 오시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이에 대하여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다. 여기에서는 완전히 유대적인 기초와 유대적인 환경, 그리고 영향들로 둘러 싸여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장면과 암시된 것들이 다 유대인들에 관한 것이다. 이 구절을 교회에 적용하려다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적을 깨닫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의 교회의 진정한 위치를 왜곡하게 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던 당시의 사람들을 살펴보든, 아니면 마지막 때에,즉 교회가 그 현장에서 떠나고 난 후 똑같은 기초 위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든 간에, 우리가 성경을 깊이 상고해 보면 볼수록 거기에 언급된 사람들이 유대인의 입장에 있는 자들이며, 유대인의 터 위에 있는 자들임을 알 수 있다. 그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마태복음 23장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은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엄한 말씀으로 호소하신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32~39).

배도한 그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주님의 증언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 지극하신 사랑으로, 거룩하신 사랑으로 모든 노력을 하셨으나 그들로 인해 무위로 끝이 났다. 선지자들을 보내면 그들은 돌로 쳤다. 말씀을 전할 자들을 보내고 또 보내어 간청하고, 설득하며, 경고하고 탄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보냄을 받은 자들이 전하는 강한 말씀이 마치 귀머거리의 귀와 돌같이 굳은 마음에 떨어지는 것 같을 따름이었다. 말씀을 전하는 이 모든 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이란 수치를 당하고 돌에 맞으며 죽임을 당하는 것뿐이었다.

결국, 하나님 아들 자신을 보내셔서 간절한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다. “그들이 주인의 아들을 보면 저를 공경하리라.” 그러나 실제로 그랬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아들에게는 사람들의 눈에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시온의 딸이 그 왕에 대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포도원은 그것을 제소유로 만들고자 하는 사악한 농부가관리하고 있었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21:38). 위에 언급한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유대인의 도덕적인 상태가 어떠했겠는가.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24:1). 주님께서 얼마나 마지못해 떠나셨겠는가. 자비의 위치를 떠나 심판의 자리로 옮겨 가실 때마다 우리의 거룩하신 주님은 천천히 그리고 신중한 발걸음으로 움직이셨다. 에스겔서 서두에 하나성의 영광이 떠나시는 모습을 주목해 보라.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목전에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 10:18,19)

때에 그룹들이 날개를 드는데 바퀴도 그 곁에 있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도 그 위에 덮였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가서 성읍 동편 산에 머물고”( 11:22,23).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기를 주저하시며 그곳에서 머뭇거리시다가 예루살렘에 있는 전으로부터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떠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넘치는 사랑과 온 마음으로 오셔서 이스라엘 가운데 머물기 원하셨지만, 백성들의 죄와 불법으로 인해 떠날 수 밖에 없으셨다. 하나님은 기꺼이 남아 있으려 하셨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떠나가기를 마지못해 하셨는지, 그 떠나시는 모습을 보면 증명이 되고도 남는다.

마태복음 23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간절한 주님의 말씀을 주목해 보라.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37).

여기에 깊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 “내가 원하였다. “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너희는 원치 않았다. “ 이것은 이스라엘의 중심이다. 주님께서는 에스겔시대에 영광이 그랬던 것처럼 마지못해 떠나셔야 했다. 그러나 장차 찾아 올 그날, 영광이 돌아오고 시온의 딸이 기쁜 노래로 왕을 환영하게 될 광명한 그 날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보배로운 소망의기초가 될 한 마디 말씀을 결코 놓치지 않으셨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그러나 그 광명한 날의 여명이 밝아오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둠과 황폐함과 파멸로 이어질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피하고자 했던 바로 그 일들이 준엄하고 곤혹스런 현실로그들의 머리 위로 덮쳤던 것이다.

로마인들이 와서 네 처소와 나라를 훼파하리라.” 이 일은 문자 그대로, 엄숙하게 성취되었다. 슬픈 일이다! 그들의 처소와 나라는 벌써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마태복음 24 1절에 주님께서 성전을 떠나시는 움직임은 유대인들의 모든 체계가 무너질 것임을 나타내주는 표현이었다.

주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상황은 절망적이었고 모든 것이 포기되었다. 판단력을 상실한 이스라엘민족 앞에는 지나야 할 어둡고 황량한 시간이 남아 있다. 이것은 유대인이 최종적으로 구원 얻기에 앞서서 있게 될 대환난이 절정을 이루는 기간인 것이다.

그러나 에스겔 시대에 저들이 지은 죄와 유대민족이 당한 슬픔으로 인해탄식하고 울부짖는 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마태복음 24장에서도 거절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속을 고대하는 남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인식은 매우 어두워져 있었고, 매우 혼동스러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은 거룩한 은혜로 위로를 받아 이스라엘의 앞날에 대한소망으로 가득했다.

독자들이 이 남은 자의 지위와 그리고 감람산에서 이뤄진 주님의 말씀은 대부분 그 남은 자와 주님 자신에 대한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고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곳에 언급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의 입장에 있는 자들이라고 상상하게 된다면, 기독교의 참된 진리와 사상을 저버리고, 시편과 예언서 그리고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 묘사되어 있는 일정한 무리들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은혜의 선택에 따라 남은 자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언제나 있다. 남은 자들이 겪은 역사와 슬픔, 경험 그리고 시련을 다 기록하고자 한다면 상당히 많은 양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다만 이 경건한 남은자가 감람산 위 우리 주님 곁에 둘러 앉았던 소수의 제자들로 표현되었다는 사실만은 명심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만일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이 탁월한 가르침에서 얻을 수 있는 성경적 시야와 유익 그리고 적용거리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24:1~3).

자연히 제자들은 땅 위의 문제와 유대인의 목적과 기대(성전과 그 밖의 것들)에 사로 잡혔다. 제자들의 질문과 주님의 대답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아직도 제자들의 생각이 지상적인 일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왕국이 세워지고 메시아의 영광이 도래하며 열조에게 주신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렸다. 메시아가 끊어져 없어질 것( 9:)이라는 중대하고 엄숙한 사실을 제자들이 아직도 완전하게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실로 거룩하신 주님께서는 그 일에 대비하도록 시시때때로 말씀하셨다. 그 앞길에 몰려오는 어두운 그림자에 관하여 성실하게 경고하셨다.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능욕을 받고, 채찍을 맞으며,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치 않고 이해하기 힘든 말 정도로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나라의 회복과 축복에만 붙잡혀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야곱의 별이 떠오르기를 고대했다. 그들의 마음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왕국이 회복되리라는 기대감으로 가득해 있었다. 하지만 메시아가 버림을 당하고 죽음에 넘겨지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주님께서는 모임이 세워지는 일에 관해서 틀림없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모임의 지위와 특권, 그리고 그 부르심과 신분, 소망에 관해서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성령을 통해 하늘에 계신 머리, 곧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된에 관한 진리를 그들은 한 번도 깨달은 적이 없다. 어떻게 깨달을 수 있었겠는가? 여전히 중간에 담이 막혀 있기 때문인데, 머지않아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이방인들도 그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대단히 어렵게나마 이해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다시 오심과 세상 끝에 있을 일에 대한 주님의 대답을 올바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모든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님의 대답 속에 교회에 관한 말씀은 단 한마디도 없다. 14절까지가 그렇고, 그 다음 구절부터 끝까지 에도 국가간에 발생할 사건들의 개요가 신속히 제시될 뿐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24:4 ~ 14).

주님께서 말씀하시던 때부터 마지막 시대까지의 전체적인 그림을 이 말씀에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기간 중에 눈에 띄지 않는 일정한 간격, 삽입된 기간, 어떤 틀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심해두어야 한다. 그 기간은 다름 아닌 위대한 비밀인 교회가 드러나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서 그 간격, 삽입된 시간 혹은 틈이 간과되었는데, 이는 그것이 형성될 시기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아직 하나님 안에 숨겨져있으며, 메시아가 최종적으로 거절되고 땅에서 끊어지며 영광에 들어갈 때까지 드러날 수 없다. 이 말씀 전체 가운데는 비록 교회라는 말을 찾아 볼 수는 없을지라도 교회가 완전히 성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세상을 다루실 때에 교회를 같은 상황으로 다루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4절에서 복음설교를 암시해 주는 단어를 보면서 바울이 가르쳤던 하나님의 영광된 은혜의 복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천국복음”(Gospel of the kingdom)이라 일컫는다. 더욱이 교회를 모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열방들에 대한 증인으로서그것을 전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무한하신 지혜로 상이하게 다루시는 것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교회를 천국”(kingdom)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 천국복음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양자는 완전히 구별되며, 이것을 혼동하면 둘 다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자들에게 꼭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의 큰 비밀이 차지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틈이요 간격이요 삽입된 기간을 반드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볼 수 없다면 마태복음 24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계속 살펴보자. 15절에서 주님은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에게 원가 특별한 것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을 하신다. 그것은 유대 신자들에게는 다니엘이 언급했던 바 귀에 익은 말이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맨 자들과 젖먹이던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15~21).

이 모든 것이 아주 분명하다. 다니엘12장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인용된 이 말씀은 타이터스(Ti5) 치하 예루살렘 정복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니엘 12장은 그 때에 네 백성이 구원을 받으리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히 타이터스 시대에 구원받지 않았다. 인용된 말씀은 마지막 시대에 관한 것이다. 이 장면은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언급되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현장에서 떠나고 난 후, 대환난 가운데 있는 경건한 유대 신자들,곧 유대인의 남은 자이다. 어떻게 이들을 교회의 기초 위에 있는 자들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넌지시 겨울과 안식일을 가리켜 그 존재가 알게 되는 세력은 어떤 것인가?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23,26).

하늘로부터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도록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그리고 주님께서 지상에 재림하시기 전에, 그들이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며 그분과 함께 아버지 집에 돌아갈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복된 소망 가운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여기 혹은 저기 있다고 하며, 광야에 혹은 골방에 있다고 누가 말한다고 해서 속을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사람은 하늘로부터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같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지 아니하고는 지상으로 재림한다는 일이 전혀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단순한 진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 그 진리가 말씀하고 있는 사실을 단순히 받아드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실로 원하는 바이다. 순전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자기에게 번개의 번쩍임 같이 임하시지 않고, 광명한 새벽별처럼 임하실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런고로, 비록 교회가 다른 예언서를 다루는 것처럼 흥미와 목적을 가지고 마태복음 24장을 연구하지만, 이 말씀을 교회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성경말씀을 참되게 적용하는 것과 비례해서 흥미가 그만큼 더 강화될 것이고, 우리의 유익이 그만큼 더 깊어지리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지면관계로 바라는 만큼 본문 말씀의 남은 부분을 다루지 못하겠다. 그러나 각 문장을 더 면밀히 살펴보고, 각 상황들을 더 고찰해 보면 볼수록 주님의 말씀 중에 언급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기초 위에 있지 않은 사람들임을 더 명확하게 알게 된다. 여 기서, 우리가 묵상한 바로 그 위치에 조만간 이르게 될 사람들에게 줄 큰 교훈이 있다.

아주 분명한 것은, 15절부터 42절까지 전체 말씀은 성도의 휴거와 인자의 나타나심 사이를 경과하는 한 기간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분들은 34절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그러나 이 세대가 성경에서는 늘 도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그 당시에 살던 사람들에게 한정된다기 보다 인종에 관계된다는 점이다. 이 말씀에서 그 단어는 단순히 유대민족에게 적용된다. 그럼에도, 주님의 재림을 앞에 두고 사람들이 준비된 마음을 지니고 살도록 이 용어를 모든 시대에 걸쳐 열어 놓아 두는 것이다. 이장엄한 사건을 의연히 고대하는 문제에 관해 성경에서 상충되는 점은 전혀 없다. 반면에 모든 비유, 모든 상징 그리고 모든 암시는 말씀으로 아주 분명하게 표현되었기에 각 사람으로 하여금 일생 동안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살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은혜를 따라, 여전히 그 시간을 연장해 두고 계시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1998 3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