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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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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23. 16:57 횃불/1998년

노아-그의 생애와 그 시대(8)

 

8: 베드로전서에 언급된 노아에 대해

위대한 사도요 성공적인 복음 전도자인 베드로는 성경을 열렬히 탐구하는 성경학도일 뿐만 아니라 다재 다능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의 서신의 어떤 부분은 다른 어떤 것보다 깊이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도들처럼, 그는 하나님의 책의 어떤 주제와 부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였다. 예를 들어 시편에 대한 그의 비상한 이해가 사도행전에 기록된 그의 설교에 분명히 나타나 있고, 그의 두 서신에도 시편에 대한 참고가 풍성히 나타나 있다.

노아와 그의 시대는 특별한 면에서 베드로의 주의를 끄는 매력적인 또 하나의 주제이다. 베드로는 그의 두 서신에서 창세기 자체를 제외하고 이 주제에 대해 다른 어떤 성경보다 훨씬 더 깊이 언급한다. 사실 그의 서신에서 이해하기 어려운대목의 대부분은 노아와 그와 관련된 사건들에 대해서이다.

그렇지만, 그 전체 주제에 대한 베드로의 접근방식은 주님과 히브리서의 기자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들이 노아의 때와 노아 자신을 별개의 것으로 말한 반면에, 베드로는 그 동일한 주제를 취하여 하나님 자신에 대해 놀라운 주석을 제공한다. 그는 노아를, 놀랍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길들을 나타내는 일종의 강단으로 사용한다. 그는 홍수의 기록을 주의 깊게 연구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의 두 서신에서 그는 그 홍수로부터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상술하고, 그분의 위대한 성품의 어떠하심을 밝게 드러냈다.

홍수에 관한 전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그와 같이 드러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노아를 부르셨으며, 방주를 짓도록 명하셨고, 어떻게 지을지 그 모형을 제시한 후, 홍수를 보내어 사람들을 심판하셨고,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셨으며, 마침내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다. 그 모두가 하나님께 속했으며, 베드로는 바로 이 점을 주목했다. 홍수와 그와 연관된 모든 일에 대한 베드로의 논평과 설명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놀라운 유익과 축복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참고 구절인 베드로전서 3 1822절은 많은 학도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어렵고도 긴 구절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상충되는 견해들이 제시되었고, 그 중에 어떤 것은 매우 환상적이다.

그 문맥은 난해한 것이며, 베드로전서의 주요 주제이기도 하다. 혹자는 그같은 많은 해석들과 방향으로 인해 혼란을 겪을 수 있다.

(1)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졌기에 그분을 위한 고난을 받을 수 있다.

(2) 그리스도인은 또한 의를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다. 고난의 이러한 양면에 대해 주님은 마태복음 5 10,11절에서 말씀하셨다.

(3) 그리스도인은 유혹에 굴복하는 대신에 죄를 그칠 때 또한 고난받을 수 있다(벧전 4:1,2).

(4) 또한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올 수가 있다. 욥은 그와 같은 고난을 겪은 대표적인 예이다.

(5) 그렇지만 잘못된 행위로 인한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것이 못된다.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는 여러가지 종류의 고난이 허용되지만, 반드시 죄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베드로 당시와 오늘날 우리 자신도 종종 죄로 인한 고난을 자초할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의를 위해 고난 받으신 우리 주님의 본을 따를 수 있다. 그분은 우리의 본이 되시며,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른다(벧전 2:21). 주님 또한 죄를 위한 고난을 받으셨는데, 그분 자신의 죄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따를 수 없는 영역의 고난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분은 우리의 본이 아니라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그분의 고난으로 인해 축복을 받는다.

베드로 당시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고난을 받았다. 그러한 고난은 선한 간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의한 것 내지는 사단의 역사로 인한 경우가 많다.

난해구절은 다음과 같은 3 18절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그분은 우리를 단지 천국으로 들여 보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고 빛 가운데 행하게 하기 위해 죽으셨다.

18절부터 그 가르침은 홍수에 관한 것으로 전환되는데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 여기서 특히 19절과 20절 같은 난해한 의미를 해석하려는 의도는 아니며, 다만 그 구절이 첫 부분에 위치한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베드로 당시의 성도들은 많은 고난을 겪는 중이었고, 왜 그토록 심한 고난이 주어지는지 당혹해 하는 때였다.

만일 성령이 오셨다면(벧전 1:12),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여전히 극소수의 사람들만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이는가?

왜 멸망하는 그 수많은 무리에 비해 구원받은 우리의 수는 이토록 적고, 왜 우리에게 그같은 고난이 주어지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지 않는 것이 아닌가?

베드로는 노아의 때와 비교함을 통해 위로를 끌어낸다. 그는 모든 의심을 제하기 위해 그 재료을 가장 능숙하게 사용하여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를 예상케 하였다. 노아는 성령님의 놀라운 움직임을 보았다. 아마도 당시에 굉장히 놀라운 역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단지 여덟 사람이 구원 받는 것으로 끝났다. 나머지는 다 홍수에 멸망하였고, 잃어버린 영혼들이 옥에 던져지게 되었다(이것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지금 지옥에 처해 있음을 다른 방식으로 말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은혜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인 노아를 보았다. 그들은 회개로 초청하는 메시지를 들었다. 그들은 그들의 목전에 방주가 준비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믿음의 응답이 없었고,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 당시 사람들은 부주의하였다. 그리하여 오직 여덟 사람만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이제 이것을 베드로전서 1 12절과 비교해 보자.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천사들이 홍수 심판 때에는 악한 면으로 관련되었는데, 여기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좋은 면으로 관련됨을 주목하자.

하지만 그 결과는 노아의 날과 마찬가지로 소수만이 응답한 것이었다. 이처럼 역사는 그 자체로 반복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님의 은혜로운 역사가 일어났지만 그로 인한 기대된 응답을 얻지 못한 두 다른 경우를 보게 되었다.

그 대목에서 하나님에 대해 나타난 두 번째 속성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벧전 3:20).

그 메시지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악한 길에서 의로 돌이켜 회개하라는 요청으로써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유사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통해 증거된 하나님의 권면을 거절했던 것처럼( 7:30), 노아 때에도 역시 그러했다. 그 사람들이 불순종으로 정죄되었던 것처럼 그들 또한 불순종하던 자들이었다(벧전 3:20). 그들의 불순종은 그 방주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것이 아니었는데, 실상 그러한 초청은 결코 제시된 적이 없었다. 그들은 다만 회개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 당시에 사회생활에 온통 몰두하여 쾌락에 빠졌는데, 그들은 그 모든 것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메시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 모든 말씀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노아의 식구들뿐이었다. 그들에게 구원이 임한 것은 그들 안에서 은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노아 자신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설교에 중압감을 느꼈음에 틀림없고, 그들 스스로를 당시의 부패와 폭력으로부터 구별했을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방주에 들어간 사실에서 그들의 회개와 믿음의 정도를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그같이 오래 기다리심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불순종했다. 하나님은 매우 오래 참으신다.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15:5).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죄인들에게도 그토록 오래 기다리시며 인내하신다.

어떤 이들은 창세기 6 3절 말씀을 근거로 그 오래 참으신 기간이 12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렇지만 베드로는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셨다고 알려주었는데, 그 기간은 어림잡아 100년 정도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방주가 지어지는 그 행위가 세상을 정죄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처음 말씀하셨을 때, 그는 500세였다. 그리고 그 홍수는 노아가 600세 였을때 일어났다. 그처럼 그 모든 것은 약 백년 내에 발생하였는데, 우리 하나님은 그처럼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셨다.

베드로가 노아의 홍수로부터 드러낸 하나님에 대한 세 번째 사실은 하나님은 구세주 하나님이란 것이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그같은 구원을 받을 어떤 자격이 있었는가?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인이었다. 그러나 다만 그들은 믿음을 가졌고,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에 응답했던 것이다. 바울은 종종 목회서신에서 하나님 우리 구주라는 표현을 썼다. 베드로도 베드로후서에서 적어도 다섯 번 정도 구주라는 사랑스런 명칭을 언급한다.

이 위대한 사도들이 그들의 서신을 마감하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구주로 자주 언급하는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가! 베드로와 바울 둘 다 그들의 생애 말년이 가까워 오면서(딤후 4:6, 벧후1: 14), 어떤 위대한 교리나 그들의 과거 사역에서 있었던 신비한 일이 아닌 구주이신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몰두하였다. 그들은 영혼 구원에 있어서 그들의 성공이나, 건전하고 영적인 가르침을 통해 성도들에게 미친 영향력에 기대지 않았고 오직 구주이신 하나님을 의뢰하였다. 성도들이 천국에 더 가까이 이를수록 그들의 마음에는 오직 구주이신 하나님에 의한 구원의 확신과 그리스도의 미덕만이 가득 채워지게 된다. 홍수 이야기로부터 베드로는 하나님에 대한 이같은 확신과 위로의 사실을 드러낸다.

그 구절에 있는 하나님의 네 번째 속성은 그분의 의로우신 심판에 대한 것이다. 만일 사람이 불순종과 불신을 고집한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은 분노하시며 그에 대한 형벌을 요구하신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의 영들은 모두 하데스인 옥에 갇혀 그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보다 더 큰 심판이 도래할 것이다. 적지 않은 성경학도들은, 주 예수님이 영으로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 죽은 자들의 영이 있는 곳으로 가셔서 그분의 죽으심과 승리를 전파하신 것으로 믿는다. 물론 모두가 이러한 해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20절의 옥은 지옥을 가리킨다는 점은 모두가 동의한다. 그리고 그 음부에 있는 영들은 홍수 이전에 부주의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영이다. 이들은 바로 의로운 메시지를 들었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맛 보았으며,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거절함으로 마침내 홍수로 인해 멸망하였던 자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날에 멸망하였으며, 이제 그들의 영들은 음부(하데스)에 있다. 그 서신을 쓸 당시에 그들은 이미 수천년을 그곳에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거기에 있다.

유다는 그의 서신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멸망하였음을 말한다. 노아의 날에 멸망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그의 영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여기서 바울이 영(spirit)을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을 주목하기 바란다. 영은 육체 가운데 거하는 진짜 사람이다. 성경의 어떤 곳에서는 혼을 같은 개념으로 말하며, “구원받은 자가 여덟 명(, soul)이라하고 전체 사람을 언급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다른 성경에서는 혼이 살아가는 생명의 질에 대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 soul)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8:36).

여기서 목숨은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거나 그렇게 사는데 실패한 생명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죄인에게뿐만 아니라 신자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1998 4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