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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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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23. 16:58 횃불/1998년

말씀의 올바른 해석(16) - 비유

죤 필립스

비유는 하늘의 의미를 지닌 땅의 이야기라 정의할 수 있다. 사람의 이야기 너머에 하나님의 진리와 영적인 교훈이 있다.

몇몇 비유는, (특히)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 같은 것은, 명백히 진리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이 비유를 이해하길 원하셔서 이 비유 중 둘을 ― 그 결과 다른 비유를 푸는 열쇠를 제자들이 얻을 수 있도록 설명해 주셨다. 동시에 그분을, 그분의 메시지를, 그분의 사역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숨기셨다.

비유에는 세 가지 면이 있다.

(1) 비유를 말하게 된 상황.

(2) 보통 평범한 사물, 사건에서 짜여진 이야기 자체.

(3) 비유가 의도한 도덕적, 영적 교훈.

그러므로 비유를 이해할 때, 이 각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이 이야기를 언제, 어디서, 왜 하게 되었나를 살펴야 한다. 이야기 자체는 보통 분명하므로, 성경시대의 관습을 고려할 곳을 제외하면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아야 한다.

하나의 비유는 하나의 중심적 진리를 갖는다. 흔히 말하듯 한 비유가 네 발로 기어다니게 해서는 안된다. 즉 비유의 모든 세세한 부분 전부에서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목표는 중요한 핵심을 찾아내는 것이지, 모든 구절마다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비유를 사용해 어떤 교리를 지지하려면, 특히 유의해야 한다. 비유에서 우리가 방어하고 싶은 입장을 읽어내는 것은 쉽다. 그러나 교리적 입장은 비유가 아니라,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서 나와야 한다.

또 어떤 비유가 두 개 이상의 복음서에서 나오는 경우, 다양한 진술들을 비교해야 한다. 유사성이 항상 동일성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른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될 수 있는 특징은, 단지 이야기의 배경 설명으로만 간주할 뿐, 자세히 해석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5명의 슬기로운 처녀와 5명의 어리석은 처녀( 25:1,2)가 나온다 해서 구원받은 사람의 숫자와 멸망 당한 사람의 숫자가 똑같다고 주장한다면 넌센스가 될 것이다. 이 비유는 그런 것을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다.

또한, 터무니 없고 근거 없는 주장을 피해야 한다.

성 어거스틴은 비유를 해석하는데 있어 지나치게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한 해석이 바로 그런 예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 사람은 아담이고 예루살렘은 아담이 쫓겨난 평강의 성이며, 여리고는 달()이고 강도들은 사단과 그 사자들이며, 강도 만난 자의 상처에 부은 기름은 소망의 위로이며 포도주는 열심있는 성령의 사역이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태우고 간 짐승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여관은 교회, 여관 주인은 사도 바울이라고 했다. 이같이 상상력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성경에서 아무 교훈이나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유( 10:2537)에 알맞은 해석방법을 적용해 보자.

첫째로 주어진 상황을 주목해 보면, 주 예수께서는 그분의 지식과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어떤 율법사에게 도전을 받으셨다. 율법사 즉 레위인으로서 이 사람은 모세 율법에 정통했을 것이며, 그의 임무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설명해 주어 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께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주께서 그 질문을 바로 그에게 되물으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 율법사는 율법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하여 대답한다. 그리고 체면을 살리려 누가 내 이웃입니까?” 하고 묻는다. 그는 유대인은 이방인이나 혼혈족인 사마리아인의 이웃일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계층에 속해 있다. 성경에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로 나와 있다. 이 유대인의 배타성이 옳지 않다고 스스로 속으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것이 이 비유의 배경과 상황이다.

실제 줄거리는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년 이상 자기 이름을 두신 성, 예루살렘은 종교적 축복과 특권의 장소이고, 여리고는 저주의 성이었다( 6:26).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의 길에는 강도들이 출몰하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헤롯왕이 최근에 수천명의 성전 건축 인부들을 해고했다고 기록했다. 이 실직자들이 강도 무리에 가담해 이 두 도시 사이의 시골에 들끓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한 여행자가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우고 맞아 거반 죽게 되었다. 유대 종교의 대표자이고, 동물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할( 23:4,5)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다. 하나님께 헌신되고 매일 성전에서 거룩한 사역을 감당하는 자로서, 이 제사장은 틀림없이 길 가에 누워있는 이 불쌍한 사람에게 동정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황급히 피해 가버렸다. 그 다음에 레위인이 나타났다(지금 주님의 권위에 도전한 율법사가 레위인임을 기억하라). 레위인도 제사장과 같은 지파이나 지위가 더 낮을 뿐이다. 그 역시 성전에서 봉사하며, 모세 율법을 해석해 주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모세 율법을 해석하여 백성들이 그 교리를 실천하도록 해 주는 사람이다. 그도 여리고로 가는 길 위에 쓰러져 있는 이 불쌍한 사람을 분명히 도와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 역시 지나쳐 버렸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등장시키셔서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은 조직적인 종교의 공허함, 율법의 사랑 없음, 하나님을 알고 선한 일을 한다고 말하면서 사랑 없는 사람의 실패였다.

그 다음에 주님은 이 이야기에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킨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혼혈족이라 하여 경멸했다. 그들은 사마리아를 지나가느니 차라리 수마일을 돌아갔다.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멸시하고 배척하는, 그러나 잃어버린, 좌절당한, 타락한 사람들을 기꺼이 도우시는 주님 자신을 나타낸다. 사마리아인은 이 불쌍한 사람의 상처를 완화시키기 위해 기름을, 깨끗케 하기 위해 포도주를 바른다. 그 다음 그는 이 고통당한 사람을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비용을 치르고, 다시 와서 더 든 비용을 계산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 이야기를 마치시고, 주께서 물으셨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그 율법사는 머뭇거렸을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대답은 사마리아인입니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사마리아인이라는 혐오스런 단어를 쓰지 않고 대답한다. “자비를 베푼 자이니이다.” 그는 자신의 편견을 계속 고수한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비유의 요점은 무엇인가? 그가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든지 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도우라는 것이 이 비유의 의도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긴급한 영적, 육체적 필요를 가진 사람을 항상 만나게 된다.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지 않은가? 하나님 자신이 죄와 궁핍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모든 인류의 이웃이 되어 주시지 않았는가? 이 비유는 그것을 올바로 해석한다면 복음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1998 4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