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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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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6. 11:24 횃불/1998년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에(10)

 

9. 열 처녀

  열 처녀비유로 천국을 나타내시는 주님의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한다. 매우 흥미있고 중요한 이 교훈은 종의 비유 보다도 훨씬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겠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사역에 한정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 전 영역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짓된 자이든 참된 자이든 기독교인들에게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5:1).  어떤 사람들은 이 비유가 유대인의 남은 자와 관계 있다고 의견을 밝히고 있지만, 그 비유가 나타내는 문맥으로 보나, 표현하고 있는 용어로 보나 그럴 가능성은 없어보인다. 전체 문맥을 면밀히 살펴보면 주님께서 행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들이 차지하게 될 기업(portion)은 마태복음 2444절의 말씀으로 종결된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25 31절부터 끝까지 이방인들을 다루기는 하나, 24 25절부터 25 30절까지 범위를 넓혀 살펴볼 때, 그리스도인의 축복은 분명해진다. 그래서 참 질서 있고 철저한 주님의 이 경탄할만한 말씀으로 인해 사려깊은 독자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 그리고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저마다 분명한 기초를 따라 그리고 각각의 확실한 원칙에 따라 설명이 되고 있다. 어느 하나가 다른 것과 혼합되거나, 서로 상이한 것이 뒤섞이는 일은 없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심오한 말씀이 지니는 질서와 철저함, 그리고 포괄적인 면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기 때문이며, 사람의 영혼을 경이로움과 사랑 그리고 찬양으로 넘치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가 한 말씀을 되새기면서 이 문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11:33).

  이 열 처녀 비유에서 주님께서 사용하신 용어를 연구할 때, 이것이 유대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앙고백한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엄숙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점을 기억해 두자.

  그 때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초기 기독교는 여기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신랑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특징을 이룬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사적인 문제는 제쳐두고 그들이 사랑하는 주님을, 그들이 기다리던 주님을 맞이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물론 이것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가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날마다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고대해 온 자들이 사랑하는 주님을 따르는 시발점이었다.

  여러 교회에게 보내어졌던 서신서를 읽어 본다면 초기에 살았던 성도들의 마음이 주님께서 곧 다시 오시리라는 믿음으로 사로잡혀 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늘로부터 오실 아들을 기다리니.”그들은 주께서 오셔서 저희를 데려가시고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임을 알았고, 이 지식과 능력이 성도들로 하여금 마음을 세상에 두지 않고 주님의 재림에 두도록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 밝고 복된 소망 때문에 그들의 삶은 세상 문제로 얽매이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을 기다렸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느 때고 속히 오시리라는 것을 믿었기에 단지 그 복된 소망을 손상치 않으려는 한도에서 세상 일을 행하였다.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라는 표현으로 이 모든 교훈이 간략하고 분명하게 우리 마음에 닿는다. 이 일이 유대의 남은 자에게 해당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메시아를 맞으러 나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들은 예수께서 감람산에 서실 때까지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과 위치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주께서 다시 오셔서 저희들을 이끌어 가시고 천국에서 함께 있게 하실 것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들의 땅으로 인도해 내시고 천년 동안 평강과 축복스런 통치로 저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부르심은 맞으러 나가는것이었다. 그들은 이 땅  위에서 나그네일 뿐이다. 그들은 이 곳에 머물러 있을 사람들이 아니요, 하늘 영광으로 부르시고 하늘의 신랑에게 합한 자로 받아 주시며,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게 하신 주님을 간절하고 거룩한 열망을 품고서 맞으러 나갈 사람들인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참되고 거룩하며 정상적인 태도요 상태이다. 이 고상한 개념을 초대교회 성도들이 놀랍게 깨달았고 실제적으로 삶에 적용했다. 그러나 슬픈 일이다! 우리가 기독교계에 참된 성도는 물론이고 거짓 교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상기할 때에 그렇다는 말이다.

  가라지알곡이 함께 섞여 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다섯은 지혜로운 처녀이고, 나머지 다섯은 어리석은 처녀이다. 참된 자와 거짓된 자, 진실된 자와 모조품과 같은 자, 참 생명이 있는 자와 생명이 없는 자가 함께 신앙고백하는 무리 가운데 섞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같은 현상은 마지막 때, “신랑이 올 때까지 계속될 일이다. 가라지가 알곡으로 변화될 수 없으며, 어리석은 처녀가 지혜로운 처녀로 바뀔 수 없다. 결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라지는 불에 태워질 것이며, 어리석은 처녀들은 밖으로 내쫓김을 당할 것이다. 세상에 영향을 주는 설교와 자선기관 사업으로 해서 점진적인 개선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우리가 모든 비유와 신약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두루 살펴서 알 수 있는 것은 심히 개탄스럽게도 더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런 일을 행하는 과정이 부패하고, 적대자 편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가 하면, 원칙상으로나 신앙고백을 함에 있어서나, 실제 문제에 있어서 악이 더 강렬하게 확장되어 간다는 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 모든 것들이 종말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신랑이 나타나게 되면 어리석은 처녀들이 드러나게 된다. 주께서 오시기 전에 모든 사람들이 회개한다면, 그 어리석은 자들은 어디서 오는 사람들이겠는가? 현재 시행중인 모든 수단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된다면 신랑이 올 때에 현명한 처녀들 만큼이나 어째서 어리석은 처녀들이 그토록 많겠는가.

  이것을 단지 하나의 비유일 따름이라고 말할는지 모르겠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러면 무엇에 대한 비유란 말인가. 온 인류가 다 회개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모두가 다 회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모독하는 일이요, 사람의 가르침에라도 우리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할 태도로 주님의 가르침을 대하는 모습이 된다.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바는 뚜렷하다. 즉 신랑이 올 때에 그 현장에는 어리석은 처녀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과, 어리석은 처녀가 분명히 있다면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런 비유를 보고도 신랑이 오기 전에 온 세상이 회개에 이른다는 이론을 고집하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처녀에 관해서 면밀히 살펴 보도록 하자. 이 비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한 충고를 준다. 간략하게 다루고 있지만 범위는 대단히 넓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표면적으로는 다를 바 없는 신앙고백을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정작 필요한 영적인 생명이 없는 것이다. 기름부음이 없고, 영원한 생명의 근원과 맞닿아 있지 못하며,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이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신앙고백이라는 , 이름뿐이고 추상적인, 머리로 믿는 신앙의 심지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겉보기에는 매우 그럴듯하지만, 내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명복상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에게는 진실로 무거운 부담이 되는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신앙고백이라는 이 들려 있는 손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는 성령,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영이라 할 기름이 있는 등은 매우 적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없다면 모든 일이 헛되고 무의미한 것이다. 매우 그럴듯한 신앙고백을 하고, 정통 교리를 고수하며, 세례를 받기도 하며, 성만찬에 참여하기도 하고, 교인명부에 등록을 하며, 그리하여 기독교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일학교 교사가 될 수도 있으며, 목회자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불꽃을 잡지 못했으며. 거룩한 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지 못한 것이다.

  종교가 고작 심령을 기만하고, 양심을 마비시키며, 영혼을 망쳐놓고, 죽어 있는 사람인데도 산 자로 여기며, 또한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가 없고, 하나님이 없으며, 소망이 없는 자로 남겨 놓고, 거짓된 자기 확신으로 영혼을 지탱하여 거짓된 평안을 갖게 하다가, 신랑이 나타날 때, 눈을 뜨게 되면 돌이키기에 때가 너무 늦어 버리게 하니, 이 얼마나 기괴한 일인가.

  이런 일이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일어나게 된다. 겉으로 이들은 지혜로운 처녀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무심코 보아서는 어떤 차이점도 찾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채비를 갖추었다. 모두에게 등이 있었다. 더우기 모두가 졸고 잠이 들었다. 어리석은 자들은 물론이고 지혜로운 자들마저도 잠에 빠졌다. 한밤 중에 외치는 소리가 나자 모두가 깨어나서 등을 챙겼다. 여기까지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어리석은 처녀들도 불을 켰다. 그런데 이 등불은 생명이 없는등불이었다. 다만 이름에 지나지 않는 신앙의 심지에 불을 붙인 등불일 따름이었다. 슬픈 일이다! 이는 무익한 일이다. 실은 무익한 것보다 더 해악스러운, 영혼을 망쳐 놓는 치명적인 기만이다.

  그러나 두 부류의 사람들로 그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경악케 할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25:8).

  그들도 등불에 불을 붙였다. 만일 불을 켜지 않았다면 밖에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껏해야 잠시 동안만 깜빡거리다가 꺼져버리는 거짓 된 빛일 따름이었다. 등은 거룩한 기름으로 채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입으로만 고백하고, 머리로만 채워졌으며 그리하여 자기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그것이 정작 필요한 바로 그 순간까지 지속되다가, 마침내 영원한 밤의 두렵디 두려운 어둠 속에 그들을 남겨놓을, 잠시 뿐인 빛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등불이 꺼져가니····

  얼마나 참담한 지경인가!

  신랑은 곧 가까이 오는데 우리 등불이 꺼져가는구나! 때가 되어 다시 오시는 이의 밝은 광채 앞에서 우리의 고백은 다 헛된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모두 정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똑같이 믿는다고 했고, 똑같은 등에다가 똑같은 심지를 가졌었으니까.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우리가 속고 있었다니! 그리스 도 안에 있는 생명의 영, 성령의 기름 부으심, 신랑되신 그리스도께 생명으로 연합되는 것, 바로 그 필요한 것이 없었다니! 두려움이 우리를 압도하는구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 그대, 지혜로운 자들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기름을 좀 나누어 주오. 우리가 영원히 멸망을 당하게 되었으니, 제 발 좀 그렇게 해 주오. 조금만이라도, 그 기름 한 방울 만이라도····

  그러나 이 모든 간청이 다 헛될 뿐이다. 아무도 자기 기름을 남에게 줄 수가 없다. 각자가 자기에게만 필요한 기름인 것이다. 더우기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등을 비쳐 줄 수 있어도 기름을 줄 수는 없다. 이 기름은 하나님 자신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 지라”(25:9,10).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기대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경건한 사람도, 뛰어난 선생도 도움을 줄 수가 없고, 기대어 볼 사람을 찾아 동분서주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교회를 위해 애쓰고, 교리와 성례전에 힘을 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겐 기름이 필요하다.”

  기름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디서 그것을 얻어야 하는가? 사람으로부터도, 교회로부터도, 성인들로부터도, 조상들로부터도 그것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그것을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만이 자유로이 그것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6:23).

  그러나 이 문제는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속에 그 은혜의 선물을 소유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아무도 대신 믿을 수도 없으며, 대신 생명을 취할 수도 없는 일이다. 각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간접적인 신앙이란 없다. 종교도 신학도 혹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도 우리에게 기름을 주지 못한다. 신앙도 생명도 줄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선물은 공기처럼 거저 주신다. 햇빛과 맑은 이슬방울을 주시듯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엄숙하게 강조하거니와 각 사람이 그것을 스스로 얻어야 하며, 자기 속에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 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49:79).

  독자들이여, 이와 같이 엄숙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대는 지혜로운 자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처녀와 같은가. 그대는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주님의 생명을 얻은 자인가? 그대는 교회에 습관적으로 나가는 것으로 단순히 만족하고, 세상에서 인정받게 해주는 종교를 가졌으며, 종교적인 신앙고백을 하지만, 여전히 하늘에 연결되지 못한 자는 아닌가.

  이 문제를 신중하게 살펴보기를 간절히 촉구하는 바이다. 지금, 그 문제를 생각해 보라. 당신이 준비한 등불이 어이 없게도 영원한 밤의 바깥 흑암 속에 그대를 남겨 둘 때,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생각해 보라. 결혼 잔치가 열리는 곳으로 가는 길이 막혀 버린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얼마나 절망스럽게 될 것인가. 그렇게 당신의 눈 앞에서 닫히고 말 것이다.

  주여, 주여, 문을 열어 주소서!”

  얼마나 비통한 외침인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얼마나 기막히고 참담한 응답이란 말인가!

  사랑하는 친구여, 아직 문이 열려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오래 기다리심으로 은혜 받을 때를 연장하고 계시는 지금, 이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기를 바란다. 자비의 문이 당신 앞에서 영원히 닫히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 때가 되면  모든 소망은 다 사라지고, 당신의 귀중한 영혼은 영원한 절망과 어둠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당신을 치명적인 잠에서 깨우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일을 통하여 생명을 얻게 하시며,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시기를! 그리고 복되신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존귀와 영광을 드리게 하시기를!

  글을 맺어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끝마치기에 앞서 잠시 지혜로운 처녀들을 살펴보자.

  슬기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 갔더니”( 25:4). 달리 말해서, 참 성도와 거짓된 자들을 구별하는 것은 이것이니, 참 성도는 하나님의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증으로서, 기름부음으로서, 인침으로서, 그리고 증인으로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크고 영광스러운 사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신자들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이 큰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구속을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거룩히 경배하여 마땅한 지극히 큰 특권이다.

  그러나 이 높고 거룩한 특권에도 불구하고 비유의 말씀처럼 다 졸며 잘새라는 말씀을 읽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어리석은 자도 지혜로운 자도 모두 다 잠들었으니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펴본 비유의 내용이고 또한 기독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신앙고백하는 무리가 다 잠이 들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지평 위에 그토록 밝게 빛나던 복된 소망이 급속히 기울어 가고 희미해져 간 것이다. 사도적 교부(Apostolic Fathers)들로부터 현 시대의 개막기까지 교회의 역사를 면면히 살펴보면, 신랑되신 주께서 몸소 다시 오시는, 교회의 특별한 소망에 대해 무관심했음이 드러난다. 사실상, 그와 같은 소망을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다.

  더우기 주님의 재림을 가르치면 이단으로 취급 받기에 이르렀다. 현재도 수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대로 주님의 재림에 대해 설교하거나 가르치지 않고 있다.

  지난 세기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큰 각성이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령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진리로, 신랑되신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영광된 진리로 부르시고 계신다.

  신랑이 더디 오는 이유는 단지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심이고,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가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이유인가! 오래 기다리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오실 때가 가깝다.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이다. 한밤중에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는 이 허다한 무리의 외침이 세계 곳곳으로 울려 퍼져서 뭇 영혼들을 깨우는 소리가 되어 주님의 영광된 재림을 고대하는 모든 교회를 한결같이 일깨울 수 있기를!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깨어나라! 깨어나라! 모든 영혼을 깨어나게 하라!

  게으름과, 이생의 안일한 잠과, 방종을 다 떨쳐버리고, 종교적인 형식과 상투적인 일들을 제거하고, 우리의 심령을 시들어 가게 하는 거짓 신학의 교리를 걷어 치우며, 우리의 가슴에 사무치는 사랑으로 다시 오시는 신랑을 맞으러 나아가자.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말씀에 힘있게 사로잡히도록 하자.

  그런즉 깨어 있으라 그 날과 그 시를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우리의 삶의 중심에 이와 같은 말씀이 머물러 있기를.

  그럴지라도, 주 예수여, 곧 오소서!”

   죄악의 어두운 물결이

   맹렬히 넘치나니

   깨어서 행하라,

   그대 은혜의 자녀들이여.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열정으로 구하세.

   구속을 위해 지불한 대가가

   얼마나 크던가.

   구주의 크신 사랑을

   큰 기쁨으로 노래하면서

   우리를 변하게 하실

   주님을 기다리세.

   내일에 오실는지, 오늘 밤엔지

   그 누가 아는가.”

   허리 띠 동여 매고서

   등불을 밝혀 두세. <다음 호에 계속>

 

(1998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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